[235] 링의 난폭자 - 5
재무부장관 황춘호는 요즘 골프에 빠져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국가 경제는 장관을 맡은 이후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하며 연일 호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했다.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란 말인가.
사실 그가 한 일은 별로 없다.
과거의 정권부터 지속되어 온 경기의 호조는 그저 지켜만 봐도 열심히 굴러가며 자신에게 유능한 장관이란 타이틀을 안겨줬다.
그 결과가 이 것이다.
재벌들이 제대로 사업할 수 있도록 금융기관에서 융자를 팍팍 받을 수 있게 도와주자 자신을 모시기 위해 수많은 기업들이 안달을 부렸다.
이제 이대로만 버티면 자신은 꽤 유능한 장관으로 역사에 기록하며 영광스럽게 퇴장할 수 있을 것이다.
골프는 어렵지만 재밌다.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재밌는 것이 3가지가 있다는 말을 했다.
누워서 하는 것중에 가장 재밌는 것은 섹스, 앉아서 하는 것은 마작, 그리고 서서 하는 것중에 가장 재밌는 게 바로 골프라는 것이었다.
골프를 배운지는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도 보기 플레이 수준이다.
그럼에도 필드에 나갈 때면 가슴이 설렜다.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드는 필드에서 드라이버 샷을 할 때의 쾌감은 사정할 때의 쾌감 이상으로 짜릿했다.
집무실에서 책상을 정리하며 퇴근할 준비를 했다.
내일 서울 근교에 있는 명문골프장에서 라운딩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퇴근이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웠다.
외환국장이 들이닥친 건 그가 책상정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최국장, 퇴근시간에 웬 일이야?”
“장관님, 잠깐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중요한 건가. 그렇지 않으면 월요일에 하는 게 어때?”
“그게....장관님 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태국이 왜?”
“사모펀드들이 대규모로 돈을 회수하고 있습니다.”
외환국장 최천호의 보고에 황춘호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즐거운 퇴근을 그딴 일로 막아선 최천호의 얼굴을 바라보자 짜증스러움이 밀려왔다.
그럼에도 그는 쇼파에 앉으며 최천호를 향해 턱짓으로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국가의 중요한 자리에 앉은 사람은 싫어도 싫은 내색을 내면 안된다.
“앉아,”
“예, 장관님.
“무슨 말이야. 사모펀드들이 돈을 왜 뺀다는 거야?”
“대규모 대손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태국에 투자했던 해외투자자들이 은행들의 대손규모가 점점 커지자 급히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음...태국이 힘들어지겠구만.”
대손이란 금융기관이 채무자의 신용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아 손실을 보는 걸 말한다.
대손이 커진다는 것은 금융의 신용이 평가절하 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황춘호는 정통 경제학자는 아니었지만 과거 경제관련기관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한 적이 있었기에 금방 상황을 눈치챘다.
태국은 한국과 대만을 따라 고금리 정책을 펴 외국자본을 적극 유치하면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어왔다.
하지만 고금리 정책의 가장 커다란 위험성은 외환관리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대처할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외환이 빠져나간다면 디폴트에 빠질 위험성이 크다.
“태국의 반응은?”
“외환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힘들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달러가 떨어지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국가에서 보유한 달러를 쓰고 있어 더욱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바보 같은 놈들이군.”
“장관님, 우리도 대책을 마련해야 됩니다. 태국보다는 우리경제가 훨씬 더 탄탄하지만 어떤 일이 발생될지 모릅니다.”
“이 사람아, 우리나라는 300억 달러를 국고로 보유하고 있어. 태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단 말이야. 우리경제를 태국과 비교한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장관님, 300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지만 외채는 그 5배인 1,700억 달러에 달합니다. 우리도 준비하지 않으면 커다란 문제가 생길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자네 말조심 해. 어디 가서 함부로 그런 소리 하지 말란 말이야. 잘 나가는 우리경제가 자네 한 마디에 흔들거릴 수 있다는 걸 왜 몰라!”
“장관님, 우리나라는 재계순위 30위 안에 있는 재벌들의 부채비율이 500%를 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태국과 같은 사태가 올 수 있습니다. 기업이 무너지면 금융이 무너지고 외국자본들은 가차없이 투자금을 회수하게 될 겁니다.”
“허어,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우리경제는 지금도 호황을 거듭하고 있어. 그런 호황에 찬 물 끼얹는 소리 하지 말고 그만 나가 봐!”
“장관님!”
“나가 보라는 내 말 안 들려!”
“....알겠습니다.”
일어서는 최천호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외환전문가로서 대한민국의 외환을 관리하는 그에게 지금의 상황은 더 없이 커다란 위기로 느껴졌으나 장관의 태도는 차가울 정도로 냉정했다.
무슨 뜻인지 안다.
계속 경제는 호황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외환관리에 들어가면 제동이 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제동이 걸린다 해도 미연에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엄청난 위기가 올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휴우...
사무실을 나서며 깊은 한숨을 흘려냈다.
자신의 판단이 틀리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다.
장관이 정치적인 이유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신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허어, 그것 참 날씨가 정말 좋구만. 11월 답지 않게 꼭 가을 같은 날씨야.”
“그렇습니다. 장관님.”
산자부 장관 허영도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기획실장 엄길영이 말을 받았다.
오늘은 금산에서 비룡의 연구단지가 6년만에 완공되어 기념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전임정권에서부터 시작된 이 대규모 공장과 연구단지는 대지 천만평에 건물들과 연구소만 해도 100개동에 달했는데 국내는 물로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의 메머드한 규모였다.
장관에 취임한 후 관련 업무를 보고 받으며 처음 비룡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믿기지 않은 규모였기 때문이었다.
더 믿을 수 없었던 건 비룡의 배경에 마이다스 CKC란 투자회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비룡은 단순한 이익을 위해 투자할 수 없는 방산업체였다.
막대한 투자가 선행되어야 하고 이익의 발생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방산업체들은 정부의 강압에 의해 재벌기업들이 눈물을 머금고 참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더군다나 그를 더욱 경악하게 만든 것은 비룡의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기획실장에게 최종적으로 보고 받았을 때 비룡의 연구단지에 들어간 돈이 6억 달러를 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6억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무려 7,800억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너무 놀라 마이다스 CKC의 의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사해 보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무자들의 분석자료를 보면서 한숨을 길게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모든 가능성을 대입시켜 봐도 마이다스 CKC가 연구단지를 만들어 가져갈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미사일과 항공기 제작수준은 미국이나 유럽, 러시아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했다.
뛰어난 기술력이 있다면 불순한 의도가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했겠지만 그것도 없었으니 마이다스 CKC의 투자의도가 무엇인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엄실장, 오늘 마이다스 CKC에서도 온다고 했지?”
“에, 장관님. 그쪽에서 사장이 직접 내한한다고 했습니다.”
“32살이라고?”
“그렇습니다. 클로이라는 여잔데 펜실베이아 경영대학을 졸업한 재원입니다.”
“휴우...겨우 32살 밖에 되지 않은 여자가 미국 최대의 투자회사를 끌고 나간단 말이지. 정말 믿겨지지 않는구만.”
“미국에서 들리는 정보에 따르면 실질적인 보스는 따로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전문경영인인 것 같습니다.”
“비룡측은?”
“윤석환 사장을 비롯해서 정일환 박사와 수석연구원들이 오늘 자리를 같이 합니다. 정박사는 록히드 마틴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재직했던 항공분야의 최고전문가입니다.”
“비룡측의 연구진이 세계적인 수준이라며?”
“예, 장관님. 비룡측에서는 미국은 물론이고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관련 연구원들을 스카웃했고 국내 최고를 자랑하는 카이스트 출신 연구진들 까지 확보한 상태입니다. 연구진만으로 본다면 세계 어떤 기업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일까. 설마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어떤 기업이 전쟁터에 연구단지를 세우겠습니까. 한국에 투자된 돈이라면 미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국방부 쪽에서는 뭐라든가?”
“그 쪽도 여러 각도로 분석을 해 본 것 같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아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관님, 제가 어제 우연히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뭔가?”
“마이다스 CKC의 실질적인 보스가 한국인이라는 정봅니다.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런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그게....정말인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뭐가 이해된단 말인가?”
“마이다스 CKC의 보스가 한국인이라면 조국에 연구단지를 만들고 싶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물론 말이 안되는 생각이란 건 알지만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머리를 뱅뱅 돌더군요. 조국에 대한 선물, 그가 애국자라면 말이죠.”
“자넨 꿈을 꾸는군. 아무리 애국자라 해도 어떤 사람이 7,800억이란 거액을 쏟아 붓는단 말인가. 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돈이 들어갈지 몰라. 미사일과 항공기가 그냥 나오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성과를 보기 위해서는 아마 오랜 시간이 걸려야 될 겁니다.”
“어쨌든, 최대한 지원해 줄수 있는 방안을 계속 강구해야 해.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이런 연구단지가 우리나라애 있다는 거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야. 국가에서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안 그래?”
“당연한 말씀입니다.”
비룡을 맡은 윤석환은 미국 하버드 경영학 박사 출신으로 GM과 IBM에서 근무했고 보잉의 부사장까지 역임한 후 2년전 한국으로 넘어온 경영전문가였다.
최강철의 부탁을 받고 서지영이 3년동안 분석해서 최고적임자로 선택된 사람으로 1년여의 구애 끝에 겨우 스카웃 할 수 있었다.
50대 초의 그는 비룡을 맡은 후 연구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 대해서 빠르게 정비를 해 나갔다.
장차 발생할 수익모델을 개발했고 정부와의 긴밀한 관계유지, 조직의 효율적 운영에 관한 방안등을 재정비했는데 세계적 유수기업에 근무했던 최첨단 관리기법을 적용했다.
“클로이 사장님, 기어코 회장님은 오지 못하셨군요.”
“원래부터 그 분은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셨어요. 그 분이 움직이면 모든 언론이 이 곳을 주목하게 되잖아요. 더군다나 시합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렇죠.”
윤석환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최강철은 세계적인 슈퍼스타였으니 그가 연구단지의 개소식에 참석한다면 모든 언론의 시선이 이곳으로 몰린다.
더군다나 시합이 한달도 채 남지 않았으니 그가 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최강철이 마이다스 CKC의 실질적 보스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어느 날 밤.
불쑥 찾아 온 그로 인해 얼마나 놀랐단 말인가.
보잉사에서 최고대우를 받으며 잘 나가던 그가 비룡으로 올 결심을 굳힌 것은 결국 최강철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금 산자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기다리기 위해 행사장소에 도열해 있는 상태였다.
마이다스 CKC를 대표해서 참석한 클로이는 비룡의 연구시설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어마어마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건물들과 연구시설들, 그리고 활주로.
무려 6억달러가 투입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규모를 가졌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정말 넓군요. 천만평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제가 회장님한테 듣기로는 앞으로도 수익이 발생하기까지 1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던데요. 그동안 들어가야 할 연구비용이 매년 1억달러 이상이라던데 사실인가요?”
“그건 정박사님이 대답해 줄 겁니다.”
윤석환이 자신을 바라보는 클로이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자신은 회사의 운영을 전담하고 있지만 그녀의 질문은 정일환 박사의 대답을 들어야 이해가 될 것이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정일환 박사가 입을 연 것은 클로이의 고개가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비룡에 투자된 비용을 회수하기 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앞으로도 많은 비용이 추가적으로 투자되어야 할 것이고요. 하지만, 연구단지가 건립되는 동안 우리 연구진은 상당한 연구성과를 올렸습니다. 이제 연구단지와 공장들이 완성되었으니 우리는 곧 제품들을 생산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되면 어느정도 추가 연구비용은 만회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아...벌써 그 정도로 연구가 진척되었단 말인가요?”
“회장님의 성화가 대단했습니다. 비룡은 이미 오래전에 미사일과 항공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수준을 확보했고 지금은 그 이상을 추진 중입니다. 보스는 우리가 노는 꼴을 절대 그냥 두고 보지 않거든요.”
“호호...그 분이 그렇긴 하죠.”
“아, 저기 장관님들이 들어오시는 것 같습니다.”
정일환의 대답에 클로이가 미소를 짓는 순간 멀리서 3대의 세단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윤석환이 산자부장관을 초청한 이유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방산업체는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고 산자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은 그 역할에 선봉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