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최강철의 시합이 벌어질 때마다 상대가 누구든 대한민국은 전 국토가 들썩인다.
하지만 강도와 긴장감은 상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전설이었던 듀란, 헌즈, 레너드전 때 대한민국 전체가 초긴장 상태에 빠졌으나 최근에 벌어진 2번의 방어전은 그나마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최강철로부터 촉발된 제2차 세계대전.
WBC 슈퍼 웰터급 챔피언 홀리오 바스케스와의 경기가 확정되자 대한민국은 또다시 숨을 죽였다.
이번 시합은 1년여를 질질 끌어왔으나 대전 확정부터 시합까지의 일정이 4개월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홀리오 바스케스.
4년 전 챔피언에 오른 후 공포의 챔피언으로 군림하며 복싱 팬들이 열광하는 중량급의 최강자로 등극한 선수였다.
48전 47승 1패, 43KO승.
열 번의 타이틀 방어전을 치르며 단 1번을 제외하고 나머지 9번의 경기는 KO로 끝냈을 만큼 강력한 펀치를 지닌 링의 맹수였다.
그의 특징은 무자비하다는 것이었다.
링에 오르는 순간 상대에 대한 배려나 예의, 그리고 존경심을 완전히 버리고 오직 승리를 위해 모든 방법을 쓰기 때문에 검은 악마로까지 불릴 정도다.
복싱 팬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매미지를 입어 방어조차 하지 못하는 선수들을 철저히 짓밟았고 다운을 당한 선수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가 욕설을 내뱉는 행동을 시도 때도 없이 저지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강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전문가들조차 그의 펀치와 상대를 압박하는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 평가할 만큼 대단했다.
레너드가 허리케인과 시합할 때 여러 언론에서 레너드의 선택에 대해 말이 많았다.
물론 흥행적인 면과 최강철을 꺾었을 때의 효과를 본다면 당연한 선택이었겠지만 일부 언론들은 레너드가 바스케스와의 대결을 고의로 피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타이밍 때문이었다.
레너드가 재기전을 두 번 마쳤을 때 바스케스는 그와의 시합을 강력하게 제의하며 언제라도 붙겠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레너드는 그의 도발에 일체 대응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지만 말 많은 언론들은 그것을 바스케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입방아를 찧었다.
허리케인 VS 홀리오 바스케스.
두 선수의 대전이 결정된 것은 뜨거운 태양이 대지를 달구던 7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대전 확정, 허리케인 드디어 검은 악마와 운명의 한판 승부를 벌이다!>
<강력한 허리케인의 태풍이 난폭자를 잡는다. 드디어 개봉 박두.>
주요 신문들이 두 선수의 대결을 호외로 터뜨렸다.
그 소식에 모든 국민의 시선에 단박에 몰려들었다.
최강철의 슈퍼 웰터급 통합 타이틀전.
언제나 불같은 투지로 강력한 상대와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던 최강철이 기어코 링의 난폭자인 바스케스와 싸운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은 흥분에 젖어갔다.
세기의 빅 이벤트는 많았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최강철의 경기만큼 심장을 떨리게 만드는 것이 없다.
“미치겠군. 바빠 뒤지게 생겼어.”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냐. 강철이가 방어전을 한 번 더 치르는 바람에 우리한테 돌아왔잖아. 지금 KBS 애들은 초상집 분위기일 거야.”
“왜?”
“이번에 강철이가 이기면 다음 시합은 개들이 중계를 해야 되잖아. 생각해 봐. 바스케스같이 강한 놈을 이기면 다음 시합은 조금 편한 놈으로 고를 거 아니냐. 그리고 그다음 상대가 피넬 휘태커가 될 가능성이 커. 한 번씩 건너뛰고 빅 이벤트가 만들어지는 거지. 정말 그렇게 되면 우리는 대박이 터지는 거 아니겠어?”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냐.”
“크크… 휘태커를 때려눕히고 한 번 건너뛴 후 챠베스와 싸우는 거야. 그러면 2차 세계대전을 우리가 전부 독식할 수 있어.”
“참, 꿈도 야무지다.”
문정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정우가 혀를 찼다.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광고를 맡고 있는 자신에게도 최상의 시나리오다.
문정모도 마찬가지겠지.
엄살을 떨고 있지만 중계 담당 PD인 그는 그렇게 되는 순간 세계의 빅 이벤트를 전부 현장에서 지켜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강철이 아직도 미국에 있냐?”
“응. 그래서 윤성호 관장하고 이성일 트레이너가 내일 급히 미국으로 넘어간단다.”
“그 사람들도 바쁘겠네. 이미 준비는 하고 있었겠지?”
“당연히 그랬을 거야.”
“잘 좀 해줬으면 좋겠다.”
하정우가 식은 커피를 홀짝 마시며 중얼거리자 문정모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 광고료를 또 올린다며. 이거 너무 자주 올리는 거 아냐?”
“위에서 결정한 걸 어떡해. 윗선에서는 최강철 효과를 단단히 볼 생각인 것 같아. 공영방송이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기업들이 들어올까?”
“걱정도 팔자네. 시합이 확정되자마자 지네 광고 넣겠다고 덤빈 놈들이 20개도 넘어. 강철이 시합인데 돈이 문제겠어. 아마, 지금보다 따블을 달라고 해도 미친 듯이 달려들 거다.”
“크크, 그렇기도 하겠군. 전 국민이 다 지켜보니 오죽 효과가 커야지.”
“이번엔 12월의 추위가 무색해지겠다. 문 PD, 네 생각에는 강철이가 이길 것 같냐?”
“내가 중계 PD지 전문가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서당 개 3년이면 풍월도 읊는다며. 그래도 복싱 중계를 오래 했으니까 대충 들은 게 있을 거 아냐?”
“바스케스는 무식할 정도로 강한 놈이다. 비록 강철이가 세계 복싱계의 영웅으로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 자식은 조금 버거울 거야. 일단 피지컬에서 차이가 나. 그놈은 생긴 게 꼭 불곰 같다니까.”
“잔인하다며?”
“여러 선수가 시합 끝나고 병원에 직행했다더라. 시합이 시작되면 미친놈이 되는 모양이야.”
“하아…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하네.”
“걱정하지 마라. 강철이는 불사조야. 언제 걔가 상대를 두려워하는 거 봤어? 악마가 아니라 악마 할애비가 와도 강철이한테는 안 돼!”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하정우가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이 되지만 간절하게 기다려진다.
지금까지 최강철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며 국민들과 자신에게 한없이 큰 기쁨을 줬다.
아니다.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자긍심과 희망, 그리고 도전 의식까지 최강철의 승리로 얻었으니 그가 이길 때마다 엄청난 선물을 받은 것이다.
그랬기에 그를 좋아했고 사랑했다.
이제 최강철의 시합은 단순한 복싱 선수의 시합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위대한 도전이 된 지 오래였다.
* * *
“왔습니까?”
“야, 무슨 일을 콩 볶아 먹듯 해치우는 거냐?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힘들어죽는 줄 알았다.”
“하하, 고생하셨습니다.”
“지영 씨는 잘 있고?”
“그럼요.”
윤성호의 질문에 최강철이 빙그레 웃었다.
반가운 얼굴들. 이 사람들의 얼굴은 언제 봐도 즐겁다.
윤성호와 함께 들어온 이성일은 코를 킁킁대면서 집 안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신혼집에 처음 와본 놈처럼 열심히 돌아다녔다.
“이 자식아, 거긴 왜 들어가!”
“여기가 침실이냐? 좋네, 좋아.”
“안 나와!”
“이불이 엄청 보드랍다. 일 치르기에는 최고겠어.”
“지랄한다, 에잇!”
“아파, 인마. 놔라. 귀 떨어진다.”
기웃거리는 이성일의 귀를 잡아당기자 놈이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소파까지 끌고 온 후에야 귀를 놔줬다.
“지영 씨는 어디 갔어?”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6시면 들어올 겁니다.”
“그럼 독수공방 중이구만. 크크, 원래 사람 사는 게 다 그래. 언제 처지가 바뀔지 모른다니까.”
“고소한 모양이네요.”
“당연하지. 천하의 최강철이 독수공방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아. 아마 지영 씨도 일부러 그러는 걸 거야.”
“참, 대단하십니다.”
“별거 아냐. 너 같은 고집쟁이와 오래 살다 보면 다 그렇게 돼. 그런데 짐은 다 쌌냐?”
“아뇨.”
“왜 안 쌌어? 시간 없구만.”
“관장님, 낮에는 독수공방이라지만 밤에는 여우 같은 마누라가 들어옵니다. 이번에는 편하게 집에서 출퇴근하면 안 될까요?”
“네가 죽고 싶은 거지? 난 이 자식아, 네 시합 있을 때마다 마누라와 생이별을 하면서 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짐 싸!”
“나는 신혼이잖아요.”
도끼눈을 부릅뜨는 윤성호를 향해 최강철이 꿋꿋하게 버티자 이번에는 이성일이 나섰다.
“이놈아, 나도 신혼이거든!”
“성일아, 저놈 저기 저 끈으로 묶어. 아예 포박해서 끌고 가자.”
4개월. 그래, 4개월이면 충분하다.
방어전이 끝나고 벌써 8개월이 지났지만 최강철은 언제나 시간이 날 때마다 꾸준히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근육이 이완되게 만들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번 경기도 기대 속에서 훈련에 돌입했다.
레드불스도 많이 변했다.
그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있었던 선수들은 대부분 떠났고 다른 선수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레드불스에서 훈련하는 선수들은 최강철이 합류할 때마다 존경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들의 소원은 최강철과 1라운드라도 스파링을 해보는 것이었다.
세계 복싱사에 한 획을 그어버린 영웅과 주먹을 맞댈 수 있다면 복싱 선수로서 다시없는 영광이었다.
훈련 패턴은 언제나 똑같다.
먼저 피지컬 훈련을 통해 체력을 극대화시키고 전술 훈련으로 들어가 상대를 쓰러뜨릴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젠 윤성호와 이성일도 판정으로 간다는 생각을 버린 지 오래였다.
31전 31KO승.
최강철이 보유한 전적은 무결점이었으니 그들은 그런 전적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레드불스는 또다시 기자들의 천국으로 변했다.
시합이 다가올수록 그 숫자는 늘어났는데 이럴 때마다 다운타운은 난데없는 호황을 맞았다.
거의 300명에 육박하는 기자들이 레드불스 근처에서 머물렀다.
미국뿐만 아니라 대한민국과 전 세계 언론이 몰려들었으니 레드불스는 언제나 기자들로 북적였다.
레너드전을 끝으로 최강철은 훈련 기간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시합을 한 달 앞둔 11월의 두 번째 수요일.
최강철이 훈련 모습을 공개하고 간단한 인터뷰를 하는 날이었기에 스포츠 조선의 어윤천과 스포츠 중앙의 한만석은 레드불스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손목시계가 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으니 아직도 1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레드불스의 정문은 기자들로 인해 시장 바닥을 연상시켰는데 전부 카메라를 들고 있어 그 모습이 꼭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들로 보였다.
“휴, 바글바글하구만. 이러다가 사진이나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냐.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새벽부터 지랄했잖아.”
행동이 빠른 것으로 따지면 외국 기자들은 한국 기자들을 따라오지 못한다.
그동안 최강철을 취재하면서 요령을 익혔고 일찍 나와 기다렸기 때문에 두 사람은 가장 앞쪽에 서 있는 상태였다.
드디어 문이 열리는 순간 두 사람은 총알처럼 움직여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레드 라인.
빨간 줄을 길게 그어 기자들이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은 선이다.
두 사람은 레드 라인의 가장 앞에 서서 카메라를 벗어 사격 자세를 취한 후 미친 듯이 사진을 박아댔다.
조금 후면 뒷 선에 있던 놈들이 마구 밀고 들어온다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빨리 좋은 사진을 확보해 놔야 한다.
이미 최강철은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온몸이 땀으로 번들거리는 중이었다.
“언제 봐도 끝내주는군. 최강철 복부의 식스 팩 봐라. 그냥 굵은 선을 그어놓은 것 같네.”
“그래서 여자들이 전부 뻑 가는 거잖아. 저런 몸을 가진 놈들이 어디 있겠어.”
“그건 그렇지.”
“이젠 정확하게 한 달 남았군.”
“씨발, 여기서 한 달 동안 버틸 생각을 하니까 눈앞이 깜깜해. 그나저나 내일 텍사스에 갈 거냐?”
“가봐야지. 꽁꽁 숨어 있던 바스케스가 갑자기 기자 인터뷰를 한다잖아. 그놈이 무슨 소릴 하려고 기자들을 부른 걸까?”
“글쎄, 워낙 음흉한 놈이라서 무슨 소릴 할지 종잡을 수가 없어. 일단 가보면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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