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219화 (219/308)

[219]

* * *

드디어 오픈게임이 전부 끝나자 이종엽과 윤근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역사의 현장에 직접 와 있다는 이 감격.

살아오면서 복싱 캐스터와 해설 위원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지만 이런 순간을 맞이하자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잘했던 것인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아마 복싱에 관계된 모든 사람이 이 자리에 있는 자신들을 부러워할 것이다.

“윤 위원님, 이제 오픈경기가 모두 끝났습니다. 곧 최강철 선수와 레너드의 경기가 펼쳐지게 될 텐데요. 언론에서는 이번 시합을 두고 금세기 최고의 매치라 평가하고 있습니다. 위원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전문가들이 두 사람의 경기를 보며 전설과 영웅의 전쟁이라고 말했겠습니까. 최강철과 레너드, 이 두 사람은 그야말로 복싱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 다 모두 무패의 기록을 가지고 있죠?”

“그렇습니다. 레너드 선수는 48전 46승 2무의 전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KO승이 31번이었으니 펀치력도 상당한 편입니다. 반면에 최강철 선수는 잘 알다시피 27전 전승 KO승을 거두고 있죠. 승률 100%에 KO율 역시 100%입니다. 정말 무시무시한 전적입니다.”

“도박사들은 이 경기를 백중세로 보고 있다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록 레너드가 3년의 공백을 가졌지만 도박사들은 그가 7개월 동안 최강철 선수와의 시합을 위해 맹훈련을 했다는 걸 높이 산 것 같습니다. 천재가 노력을 장착했으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내용입니다. 그랬기에 저 역시 이번 경기는 백중세로 보고 있습니다.”

“승부의 포인트는 뭐라고 보십니까?”

“레너드가 최강철 선수의 막강한 공격력을 어떻게 막아내느냐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 레너드 선수가 최강철 선수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며 자신의 스타일로 싸운다면 박빙의 경기가 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주특기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죠?”

“최강철 선수의 가장 큰 무기는 역시 폭발적인 인파이팅입니다. 상대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콤비네이션 펀치들은 가히 예술적인 경지에까지 올라 있습니다. 물론 상대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겠지만 말입니다. 최강철 선수의 진정으로 무서운 점은 어떤 거리에서도 펀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리한 각도에서 터지는 쇼트 펀치는 물론이고 거리를 확보한 채 터지는 스트레이트와 훅은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너드 선수의 주 무기는 빠른 발을 이용한 방어력과 반격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거둔 대부분의 KO승은 반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어요. 상대의 펀치를 흘려내고 워낙 빠른 펀치들을 쏟아내기 때문에 순식간에 경기가 끝난 것도 상당수입니다. 스트레이트와 양 훅의 연사 속도는 역사상 가장 빠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최강철 선수보다 빠른가요?”

“글쎄요. 그건 저로서도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펀치 스피드는 최강철 선수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어떤 상황에서 펀치들이 나오냐는 거겠죠.”

“아, 말씀드리는 순간, 링에 WBA 회장과 관계자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곧 경기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식전 행사가 끝나는 대로 우리의 영웅 최강철 선수의 경기가 시작됩니다. 잠시 광고 보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피디의 사인을 보며 마이크를 내려놓은 이종엽이 특설 링을 가득 채운 관중들을 바라보았다.

이 큰 경기장에 빈자리가 없다.

아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콩나물시루를 보는 것 같았다.

이곳에 들어온 관중들은 맨 마지막 스탠드에 앉아 있는 자들까지 전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무려 3,000달러의 입장료를 내고 여기에 들어올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것도 공식 티켓 가격에 불과했고 VIP석이 아니었음에도 암표 가격이 2만 달러를 상회했다고 했으니 광란에 젖어 있는 저 관중들이 전부 미친놈으로 보였다.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관중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최강철은 링을 향해 다가갔다.

이미 레너드는 출전해서 자신의 코너에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바글바글하다.

시합을 하는데 뭔 인간들이 이렇게 득실대는지 링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윤성호가 로프를 열어주자 최강철은 허리를 숙여 링으로 들어가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관중들의 환호에 답했다.

이미 그의 얼굴에는 라커룸에서 보였던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것은 윤성호와 이성일도 마찬가지였다.

최강철은 관중들의 환호에 답을 해준 후, 천천히 레너드의 코너로 향해 다가가 글러브를 슬쩍 내밀었다.

그러자 레너드가 마중하듯 주먹을 내밀어 그의 주먹을 툭 쳤다.

“얼굴이 좋군요.”

“자네도 그렇군. 인사 와주서 고맙네.”

“별말씀을…….”

최강철은 그의 반응에 가볍게 고개를 숙여준 후 자신의 코너로 돌아왔다.

도발이라기보다는 전설에 대한 예의였다.

고마웠다.

영원히 은퇴한 후 돌아오지 못했다면 꿈속에서조차 원했던 그와의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공식 기자회견에서 봤을 때처럼 레너드는 별말을 하지 않고 그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침묵이 주는 무거움이 그에게서 줄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최강철은 그 무거움을 받아 들고 돌아와 레너드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대단하구나, 레너드.

당신의 그 침묵은 허리케인을 무너뜨리기 위한 각오겠지.

복싱 역사에서 유일한 전설로 남고 싶어 하는 당신의 마음이 그 침묵에서 절실하게 느껴지는구나.

당신이 천재라는 건 인정한다.

그리고 나를 이기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했다는 것도 들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이길 수 없는 이유가 있어.

나는 당신과 다른 걸 가지고 있거든.

바로,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어봤다는 것이야.

죽음을 경험했던 자는 어떤 두려움도,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고 싸운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곧 당신한테 보여줄게.

* * *

“으… 으…….”

“야, 신음 소리 좀 내지 마. 신경 쓰여 죽겠네!”

“떨려서 그래.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나오는 걸 어떡해.”

박정빈이 링 안에서 행사가 치러지는 걸 보며 부들부들 떨어대자 김철중이 핀잔을 주었다.

지금 학생회관은 500여 명이 꽉 들어차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핀잔을 줬지만 그의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슴을 조여 오는 긴장감.

애써 긴장을 풀어보기 위해 헛기침도 해보고 몸도 뒤틀어 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야, 국민의례다. 일어나!”

미국 국가에 이어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학생회관을 가득 채웠던 학생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애국가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부르는 애국가가 메아리가 되어 서울대를 가득 적셨다.

학생회관뿐만 아니라 학교 이곳저곳에 모인 학생들이 전부 소리쳐 애국가를 불렀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는 이성일이 들고 나온 태극기가 높이 치켜든 채 화면에 잡혔는데 티끌 하나 없이 번쩍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건 최강철의 머리에 두른 태극기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국가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의 호흡이 조금씩 가빠지기 시작했다.

“철중아, 강철 선배가 이기겠지? 그렇지? 꼭 이길 거야. 걱정하지 마라.”

지가 말하고 지가 답했다.

박정빈은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코너로 돌아가는 최강철을 바라보며 중얼대고 있었는데 꼭 미친놈 같았다.

하지만 김철중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도 그리 논리적이지 않았다.

“강철 선배는 울트라 슈퍼맨이야. 전설이고 뭐고 필요 없어. 허리케인이 괜히 허리케인이야? 허리케인은 아마 산도 무너뜨릴걸. 무조건 이겨. 죽어도 이긴다고!”

* * *

최강철은 윤성호가 끼워준 마우스피스를 입안으로 밀어 넣고 이빨을 조절하며 장내 아나운서가 소개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이미 링에는 모든 사람이 떠났고 장내 아나운서만 남아 있었다.

레너드의 피지컬과 전적이 아나운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모든 관중이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내주었다.

역시 같은 맥락이다.

돌아온 전설의 용기 있는 도전에 보내는 진심 어린 경의다.

“강철아, 나 실업자 만들지 마라.”

“이 자식아, 나도 지면 실업자 된다.”

“넌 돈 많잖아.”

“아이고, 이걸 친구라고.”

옆에서 나선 윤성호가 빠르게 최강철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후 주문을 걸었다.

“레너드의 발, 그 발을 끝까지 놓치면 안 돼. 경계를 늦추지 말란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강철아, 펀치가 흐르면 그냥 있지 않는 놈이다. 카운터를 맞게 되면 그냥 돌진해야 해. 알았어?”

“예.”

“선제공격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땐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지?”

“관장님, 아나운서가 나를 소개하고 있잖아요. 저 관중들의 함성 소리 들려요? 나도 이런 분위기 좀 만끽합시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반응하는 관중들의 광란하는 몸짓도 보였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이미 수도 없이 들었던 윤성호의 말을 중간에서 끊고 다리를 두 번 털어낸 후 링의 중앙을 향해 걸어 나갔다.

때앵!

드디어 공이 울리자 최강철은 천천히 걸어가 레너드의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부딪친 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레너드의 행동도 그와 비슷했다.

주먹을 부딪치자마자 그는 뒤로 물러서며 사이드로 돌았는데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최강철은 그의 스텝을 보면서 천천히 전진해 들어갔다.

그런 후 불시에 그의 안면을 향해 레프트 잽을 쏘아냈다.

쐐액!

단발 잽이 아니라 연사였다.

한꺼번에 세 번이나 날아간 최강철의 잽은 위빙으로 첫발을 피해낸 레너드의 안면 궤적을 따라가며 그대로 직격했다.

깜짝 놀란 레너드가 뒤로 물러났을 때는 이미 최강철의 레프트 잽이 두 번이나 그의 안면을 훑고 나온 후였다.

빠르다. 그리고 강하다.

최강철의 잽은 스트레이트처럼 위력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났지만 이번에 보여준 레프트 잽은 스트레이트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회피 동작에 맞춰 궤적을 따라잡았기 때문에 그토록 빠르다는 레너드조차 그의 잽을 피해내지 못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잽을 맞췄지만 최강철은 곧장 따라 들어가지 않고 거리를 확보한 채 팬케이크 스텝으로 레너드의 이동 경로를 차단하며 서서히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레프트 잽.

마치 창으로 찌르는 느낌.

정확한 거리에서 시전되는 그의 레프트 잽은 워낙 순식간에 작렬했기 때문에 펀치의 시작부터 회수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이것이 이성일이 최강철에게 주문한 첫 번째 전략이었다.

선제공격의 첨병 역할을 하는 레프트 잽에서 레너드를 압도하면 경기의 절반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이성일의 주장이었다.

레너드의 가장 큰 무기인 반격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게 3달 동안 꾸준히 레프트 잽을 갈고닦은 이유였다.

마주 잽을 날렸으나 계속 맞는 건 레너드였다.

그만큼 최강철의 레프트 잽은 빨랐고 정확했다.

하지만 레프트 잽만 가지고 경기를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레너드 정도의 레벨이 단순한 레프트 잽에 의해 무너진다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레너드는 잽의 싸움에서 자꾸 손해를 보자 성큼 뒤로 물러나 외곽으로 돌며 거리를 확보했다가 급작스럽게 거리를 좁혀 왔다.

위이잉… 윙, 윙.

또다시 최강철의 레프트 잽이 날아가는 순간, 패링에 이은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번개처럼 날아왔다.

레너드의 펀치는 절대 단발 공격이 없다.

레프트 잽을 자신의 왼손으로 쳐낸 그는 최강철의 왼손이 회수되기 전 바짝 접근하며 순식간에 스트레이트와 양 훅이 포함된 콤비네이션을 퍼부었다.

펀치가 날아오는 순간 최강철의 허리가 숙여지며 상체가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스트레이트를 피하면서 후속 공격인 양 훅은 회수된 왼손으로 스토핑을 걸고, 가딩하고 있던 오른손 훅이 기다렸던 것처럼 레너드의 안면을 노렸다.

레프트 잽을 특화시키면서 적의 반격에 대한 대비책을 놓칠 이성일이 아니었다.

이성일은 레프트 잽을 무력화시키고 반격해 올 경우에 대비해서 역공까지 계획해 놓았던 것이다.

파방… 팡!

레너드의 레프트 훅이 복부를 두드리는 순간 같이 날아간 최강철의 오른손 훅이 레너드의 안면을 강타했다.

휘청.

레너드의 신형이 주춤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튀어 나가는 게 보였다.

역시 대단한 반사 신경이다.

맞는 순간 고개를 돌려 충격을 완화시키는 그의 반응은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자들 중에서 단연 독보적이었다.

감탄하고 있을 새가 없다.

뒤로 물러났던 레너드가 어느새 레프트 잽에 이은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던져 왔기 때문이다.

방어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반격 능력도 레너드에게 밀릴 것이란 생각을 가져보지 않았다.

그때부터 둘은 링의 중앙을 돌면서 끝없이 주먹을 교차시켰다.

물론 링의 중앙을 장악한 것은 최강철이었지만 레너드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작전은 언제나 똑같다.

상대를 링의 중심에 가둬놓고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맴도는 초원의 사자처럼 끊임없이 이빨을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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