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218화 (218/308)

[218]

* * *

동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먹고, 입고, 자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 외에도 즐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적인 동물인 사람은 단조롭게 살게 되면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려 편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은 친구를 만나고 축제를 열어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활기를 띄게 된 것은 일 년에 한두 번씩 열리는 최강철의 경기로 인해 온 국민이 기대와 흥분, 긴장감을 느끼고 승리를 통해 기쁨과 환호를 내지르며 마음껏 웃고, 울었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이 시합이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자 대한민국은 초긴장 상태로 빠져들었다.

모든 사람의 관심은 오직 하나, 최강철의 방어전에 몰려 있었다.

정치도, 경제도 최강철의 경기가 벌어지면 거짓말처럼 정지된다.

그것은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시합일이 되자 대한민국이 완전히 멈췄다.

전설 대 영웅의 전쟁.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들의 영웅이 돌아온 전설을 꺾어주길 간절히 기원하며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강철아, 나 결혼한다.”

“미친놈.”

“진짜다.”

“이 자식아, 너 오늘이 무슨 날인데 장난질이야. 내 긴장 풀어주려고 하는 농담이라면 하지 마라. 재미없으니까.”

“두 달 후에 간다. 꽃피는 오월에 연경 씨 면사포 씌워주기로 했어.”

“너…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아침을 먹고 방으로 들어와 휴식을 취할 때 불쑥 다가온 이성일이 주절거리며 이야기를 하자 최강철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결혼을 해?

물론 결혼은 해야 한다. 놈의 나이는 벌써 서른 살이었으니 오히려 조금 늦은 감이 있다.

그런데 그 새털같이 많은 날을 내버려 두고 하필이면 오늘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오늘은 그가 레너드와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이는 날이었다.

“이놈아, 내가 너한테 한두 번 속아봤냐. 벌써 5개월째 나랑 붙어 있던 놈이 무슨 결혼을 해. 믿을 말을 해야 믿지!”

“미국에 오기 전에 프러포즈했다. 연경 씨 나이도 있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서 그렇게 결정했어. 너부터 보내고 갈 생각이었는데 네가 하도 미적거려서 어쩔 수 없었다.”

“하아…….”

“그러니까 강철아, 오늘 경기 꼭 이겨주라. 새신랑이 결혼하자마자 실업자가 되면 안 되잖냐.”

“이런 미친 자식!”

이성일이 빤히 쳐다보자 최강철의 얼굴에 쓴웃음이 매달렸다.

갈수록 교활해진다.

놈의 말만 믿고 진위 여부를 가릴 수는 없으나 놈은 이로써 내가 이겨야 하는 이유를 또 하나 만들어냈다.

“사회는 내가 봐야겠네?”

“당연하지.”

“양복은 해줄 거냐?”

“유명 메이커로 맞춰줄게. 아주 비싼 걸로 사줄 테니까 걱정 마라.”

“진짜처럼 말하니까 안 믿을 수도 없고. 어쨌든 시합 끝나고 보자. 너 일부러 거짓말한 거면 죽어!”

“경기나 잘해, 이 자식아.”

최강철이 도끼눈을 부릅뜨자 이성일이 주섬주섬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제 서서히 떠날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복싱 전문가들과 도박사들은 정확하게 승률을 5 대 5로 예측했다.

처음에는 최강철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도박사들이 먼저 승률을 끌어내렸다.

최고의 정보력을 지닌 도박사들이 백중세란 결과를 내놓았다는 것은 상황이 그만큼 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언론과의 접촉을 차단했으나 도박사들은 레너드가 혹독한 훈련을 하면서 이 경기에 철저히 대비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알 수 없었으나 전설이자 천재인 레너드가 최강철을 이기기 위해 7개월이란 시간을 준비했다는 건 쉽사리 승부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최강철은 경기장으로 향하는 차에서 눈을 감고 이어폰을 귀에 낀 채 음악을 들었다.

어제 계체량 행사를 끝내고 공식 기자회견에서 만난 레너드의 모습은 차돌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시선을 잡아끈 것은 그의 침묵이었다.

독설가이자 달변가로 알려진 레너드는 기자들의 질문에 거의 단답형으로 대답하며 최대한 말을 아꼈다.

자신 역시 다른 때와 다르게 레너드를 자극하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조용하게 앉아 있다가 자리를 떴다.

기자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이번에는 어떤 일도 벌이지 않고 싶었다.

경기장에 도착하자 수많은 기자가 몰려나와 차에서 내리는 최강철을 향해 플래시를 터뜨렸다.

최강철은 잠시 제자리에 서서 기자들이 사진을 찍도록 포즈를 취해주며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MGM 호텔의 특설 링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눈부시도록 빛나는 저 성에서 오늘 나는 지상 최대의 적과 운명의 한판 승부를 벌인다.

* * *

신규성과 김도환은 최근 들어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피닉스그룹의 가동을 위해 상의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문 경영인을 배치해서 정동이 가지고 있던 기존 시장을 빠르게 다시 확보했고 서병진 일가의 개들을 차근차근 제거해 나갔다.

WORLD BEST.

최강철이 그들에게 준 숙제였다.

하지만 세계 최고는 단순한 비전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최강철의 오더를 받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작업과 중, 장기 전략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업의 정신은 리더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최강철은 피닉스그룹의 사훈을 미래에 대한 도전과 청렴, 그리고 세계 최고의 기술력 확보로 정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피닉스그룹으로 사명이 바뀌었으나 직원들은 기존 정동그룹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신규성과 김도환은 자신이 있었다.

최강철이 출국 전에 그들에게 남겨놓았던 피닉스그룹의 비전에 대한 실행 계획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피닉스그룹의 기업 정신은 물론이고 각 계열사별로 추진되어야 할 단기, 중기, 장기 과제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정말 오랜 시간을 같이했으나 최강철은 매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을 보여준다.

주력인 피닉스 건설은 설계 팀의 강화를 지시하며 사장교, 현수교, 초장대 터널, 4-BAY 건축 기술 등에 관한 기술 확보 내용이 들어 있었고 피닉스제약은 바이오 기술 개발과 유전자 기술 확보, 피닉스 중권은 모바일을 이용한 트레이더망 구축, 수수료 인하 방안, 기업 분석과 향후 기업 발전에 관한 리포트를 제공하는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 외의 계열사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들이 나왔을까. 그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이었다.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비전들이었기에 그것을 보며 두 사람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 사장님, 사장님께서는 저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회장님을 아셨죠?”

“고등학생 때부터 봤으니 벌써 13년이나 되었네요.”

“그때는 어땠습니까?”

“저는 그 당시 기자였기 때문에 회장님의 복싱 능력만 봤습니다. 회장님은 불가사의한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었어요. 동양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체력을 지녔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복싱 선수가 서울대에 진학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것도 수석으로 말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죠. 저 역시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맞습니다. 그런데 회장님은 불가능한 일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더군요. 그래서 이제는 포기했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회장님을 판단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휴우,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지금에서 말씀드리지만 회장님은 끝없이 뭔가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전차라고나 할까요. 곧 조만간 다시 대형 사건이 터질 겁니다.”

“대형 사건이라뇨?”

“회장님은 삼성전자를 노리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삼성전자요!”

김도환이 눈을 부릅뜨며 엉덩이를 반쯤 일으켰다.

삼성전자는 국내 최대의 기업이었고 삼성그룹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신규성의 얼굴에서 쓴웃음이 떠오른 건 김도환의 놀람이 충분히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김 사장님은 알고 계셔야 될 것 같아 말씀드린 겁니다. 우리는 벌써 삼성전자의 주식을 2,000억이나 확보한 상탭니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찢어서 확보한 거죠.”

“으…….”

김도환의 입에서 기어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2,000억이라면 삼성전자 주식의 7%에 해당되는 거액이었다.

도대체 최강철이 확보하고 있는 자금력이 어디까진지 그는 추측조차 되지 않았다.

피닉스그룹에 이어 삼성전자까지 손아귀에 넣는다면 대한민국 경제는 최강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회장님께서는 삼성전자 인수 시기를 98년으로 잡고 계십니다. 그러니 김 사장님은 지금부터 삼성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 * *

라커룸에 들어가 준비를 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들어왔다 나갔다.

돈 킹은 당연했고 WBA 회장과 간부들, 뉴욕 시장과 상원 의원 등이 인사를 왔다.

하지만 오픈게임이 시작되자 모든 사람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라커룸에는 오직 최강철 일행만 남았다.

당연한 일이다.

시합을 앞두고 몸을 풀어야 하기 때문에 시합 1시간 전부터는 모든 사람의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이다.

천천히 섀도복싱을 하면서 몸을 풀었다.

늘 그렇지만 이 시간에 자신의 몸을 감싸는 강렬한 긴장감이 너무나 좋다.

링에 올라가는 순간부터 그의 정신은 오직 상대를 부수는 것에만 집중되기 때문에 긴장감을 느끼지 못했다.

한동안 섀도복싱을 하자 몸에서 서서히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미 경기장에서는 마지막 오픈게임이 절정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성일아, 한 가지 물어보자.”

“뭐?”

“결혼한다는 거 진짜 정말이냐?”

“그 자식, 의심 더럽게 많네. 정말이라니까.”

“그럼 프러포즈는 어떻게 했는데?”

“성당에 손잡고 들어가서 했다. 연경 씨를 성당에 데리고 들어가서 눈을 감게 한 후 하나님께 이야기했어. 이 사람과 평생을 행복하게 함께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반지를 주면서 결혼해 달라고 협박했다.”

“이야, 이 자식 로맨티스트네. 그런데 성당에는 왜 갔어. 종교도 없는 놈이!”

“거기가 분위기 잡는 데는 최고거든.”

“이 싸가지. 너, 이 자식아. 그렇게 무데뽀로 덤벼들면 하나님이 황당해하셔. 믿지도 않는 놈의 기도를 누가 들어주겠냐.”

“바보 같은 놈, 그래도 연경 씨가 감동에 겨워서 펑펑 울더라. 그 정도면 성공한 거 아냐?”

“어… 그건 그렇지…….”

이성일의 반론에 최강철이 눈을 껌벅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정이야 어떻든 목적을 훌륭히 달성한 이성일이 갑자기 부러워졌던 것이다.

그때 옆에서 왔다 갔다 하던 윤성호가 끼어들었다.

“난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나 했네. 니들 미친 거니? 지금이 어떤 땐데 그런 소리나 하고 있어? 이 자식들이 시합을 코앞에 두고 그런 이야기나 하고 있으면 어떡해!”

“그럼 어떤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요?”

“어떻게 잘 싸울지를 상의해야지. 이게 얼마나 중요한 시합인데 그러는 거냐.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뭐 이런 놈들이 다 있는지 모르겠네.”

“이제 와서 잘 싸우라고 떠들면 뭐 합니까. 이미 항구에서 배는 떠났는데요. 그리고 관장님, 그러는 거 아닙니다.”

“내가 뭘?”

“결혼한다는데 축하한다는 말 한 번도 하지 않았잖아요. 나는 관장님 결혼할 때 얼마나 내일처럼 축하해 줬는데요. 쳇, 너무하십니다.”

“어이구, 이놈아. 제발 정신 좀 차려라. 강철이 시합한다고, 레너드랑!”

라커룸을 나오기 전까지 즐겁게 웃으며 떠들었다.

지상 최대의 적과 승부를 벌여야 했지만 어떤 시합 때보다도 최강철 일행의 분위기는 좋았다.

윤성호와 이성일.

영혼의 파트너인 두 사람은 아예 작정한 듯 번갈아 가면 농담을 던져 왔고 시합을 준비하면서 연신 웃음꽃을 피워냈다.

그들의 의도를 너무나 잘 안다.

그리고 나도 그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그렇게 싸울 것이다.

라커룸에 눈부신 조명이 들어오며 진행 요원이 출전해 달라는 사인을 보내왔다.

이미 경기장은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진동하고 있었는데 레너드가 출전한 모양이었다.

복도를 따라 조명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나를 기다리는 그를 향해, 돌아온 전설을 향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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