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정동그룹의 주 채권자인 산업 은행은 발 빠르게 움직이며 채권단 회의를 소집하고 매각을 위한 실사에 들어갔다.
정동그룹 12개 회사의 자산을 정밀 실사 해야만 매각 절차를 밟아 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사는 한 달여에 걸쳐 시행되었고 정동그룹은 갈기갈기 찢겨져 매각 방안이 논의되었다.
방법은 3가지였다.
그룹 전체를 묶어서 매각하는 방안과 몇 개씩 쪼개는 안, 그리고 계열사별로 매각하는 방식 등이었다.
채권단에서는 첫 번째로 그룹 전체를 매각하는 방안을 선정해서 절차를 밟아 나갔다.
매수자가 있다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매각 자체는 가장 어렵다.
부실로 얼룩진 그룹을 통째로 떠안으며 위험을 감수할 매수자를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룹이 파산될 경우에는 대부분 분할 매각이 이루어진다.
가장 노른자 기업부터 차례대로 매각한 후 마지막 떨거지는 아예 공중분해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채권단은 매각 일정에 따라 공개 입찰을 통해 인수 희망자를 모집했다.
최강철의 훈련을 시작한 지 3달 동안 정신없이 추진된 것들이었다.
그가 마이다스 CKC를 찾은 것은 신규성이 급한 전화를 해왔기 때문이다.
사무실에는 신규성과 김도환이 같이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꽤나 심각했다.
“무슨 일이시죠?”
“회장님, 인수 희망 기업이 우리 빼고도 3개나 더 들어왔습니다. 전부 미국에 있는 굵직한 사모 펀드들입니다.”
“음, 그들이 들어온 이유는 날로 먹어보겠다는 거죠?”
“그럴 겁니다. 성공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테니까요. 정동은 기업 가치보다 지니고 있는 부동산이 더 많습니다. 비록 부동산 매각에 실패하면서 파산까지 갔지만 헐값으로 인수에 성공한다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어요. 그들은 하이에나 같은 놈들입니다.”
“실사한 결과는 노출이 되지 않았나요?”
“채권단에서는 극비에 부치고 있습니다. 그들도 최대한 높은 가격을 받아내기 위해 비상이 걸린 상탭니다.”
“우리가 조사한 건 얼맙니까?”
“정동이 보유한 부동산이 3,500억, 기업 가치가 3,000억, 도합 6,500억입니다.”
“사장님이 저를 보자고 한 건 베팅 금액 때문이겠군요?”
“그렇습니다. 만약 실수를 하게 되면 하이에나들에게 정동을 넘겨줄 수도 있습니다.”
“그건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도 절대 안 됩니다. 부동산 가치는 별반 차이가 없을 테고, 결국은 기업 가치를 얼마로 보느냐에 따라 승패가 달라지겠네요. 그렇죠?”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김 사장님, 그들은 어떤 놈들입니까?”
신규성이 대답하자 최강철의 시선이 김도환에게 돌아갔다.
제우스는 경제 쪽에도 탄탄한 정보 팀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 사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놈들은 기업을 사냥해서 되팔아 돈을 버는 놈들입니다. 그동안 그자들이 산 기업들을 분석해 봤는데 부동산은 70%, 기업 가치는 50% 이하로 후려쳤더군요.”
“부동산 가치를 후려쳐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채권자들의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놈들은 채권 은행들이 기업을 팔기 위해 안달이 나 있다는 걸 최대한 이용하는 겁니다. 부동산은 팔아야 돈이 되기 때문에 임자가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채권단이 울며 겨자 먹기로 팔아넘기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렇다면 그들이 써낼 금액은 어느 정도 될 거라고 예상합니까?”
“저희 경제 팀에서 분석한 바로는 많아봐야 4,000억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4,000억이라…….”
최강철이 액수를 되뇌며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그가 생각에 잠길 때마다 늘 하는 버릇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 사장님, 입찰일이 언젭니까?”
“다음 주 화요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6,000억을 써 내세요.”
“회장님, 그건 너무 많습니다. 제 생각에는 5,000억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뇨, 제 말대로 하세요. 그자들이 얼마를 써 내든 무조건 우리가 가져와야 합니다. 정동그룹은 대한민국의 기업입니다. 외국의 하이에나들에게 절대 넘겨줄 수 없단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 * *
최강철은 레너드와의 시합이 잡히자 늘 그래왔듯이 체력 훈련으로 피지컬을 끌어 올린 후 이성일이 준비한 전략에 맞춰 훈련의 강도를 끌어 올렸다.
이미 레너드와의 일정에 대비하고 있던 이성일은 면밀한 검토 끝에 가장 효율적인 전략을 제시했다.
레너드의 복싱 스타일은 아웃복싱과 인파이팅의 경계선에서 움직이며 상대의 전략에 맞춰 경기를 풀어나가는 스타일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피드와 천부적인 운동신경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설이자 천재였다.
타고난 감각만으로 본다면 역사상 어떤 챔피언도 그와 비견되지 못한다.
이성일이 마련한 전략은 그 특수성에 대비한 것이었다.
복서는 자신의 스타일을 크게 바꾸지 못한다.
복서가 자신이 계속 끌고 왔던 스타일을 단기간에 바꾼다면 그에 따른 역효과가 너무 크기 때문에 오히려 경기를 망치는 요인으로 작용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최강철은 커다란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빠른 말을 이용한 아웃복싱이 가능했고 레너드의 스타일도 소화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허리케인이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인파이팅 능력까지 지니고 있으니 최강철을 상대한다는 건 극히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었다.
최강철이 미국으로 떠나는 날 온 국민이 모두 환송을 하면서 승리를 기원했다.
어이없게도 KBS와 MBC는 최강철의 출국 장면을 생방송으로 내보냈기 때문에 많은 국민이 그의 출국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은 간절하게 두 손을 맞잡았다.
기도이자 간절한 소망이었다.
어려웠던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는 최강철의 존재는 이제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영웅이 된 지 오래였다.
최강철은 뉴욕행 대한항공 퍼스트 클래스에 앉아 활주로를 따라 움직이는 비행기의 진동을 느끼며 창밖을 바라봤다.
이젠 이 장면이 익숙해질 때도 되었으나 이륙하는 순간이 될 때마다 슬며시 가슴이 뛰어왔다.
이제 마지막 순간을 위해 달려가고 있었다.
복싱을 시작하면서 싸우고 싶었던 상대들.
이미 듀란과 헌즈는 격파했고 남은 것은 오직 레너드뿐이었다.
한 가지 아쉽다면 마빈 헤글러가 나이 때문에 자신을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고 은퇴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고 더 이상 싸우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후 영광스럽게 은퇴를 했기 때문이었다.
슈거레이 레너드.
헤비급에 짓눌려 있던 웰터급을 황금 체급으로 만들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가 듀란, 헌즈와 벌였던 명승부들은 지금도 전 세계의 복싱 팬들의 뇌리에 남을 정도로 화려했고 아름다웠으며 강렬한 것이었다.
퍼펙트 가이. 다른 별명 없이 오직 전설로 불린 사나이.
그가 펼치는 예술 복싱은 역사상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결코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려워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레너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은 허리케인이다.
레너드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의 인기보다 훨씬 더 커다란 복싱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지금까지 거칠 것 없이 달려왔고 그가 싸웠던 상대들은 물론이고 더 강한 자들도 꺾어왔으니 두려워해야 하는 건 그가 되어야 한다.
이긴다. 반드시 이길 것이다.
성원하는 모든 사람과 나 자신의 꿈을 위해 반드시 그를 꺾고 그녀 이름을 크게 외치며 활짝 웃을 것이다.
* * *
“아휴, 떨려. 소영아, 너도 봤지. 어쩜 눈빛이 저럴 수 있니?”
“이것아 왜 또?”
“방금 물을 가져다 줬는데 날 보고 웃잖아. 그 시선에 나 쓰러질 뻔했어.”
퍼스트 클래스를 담당하는 민혜린이 짝꿍인 윤소영을 향해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그랬기에 윤소영이 그녀의 어깨를 밀쳐내며 도끼눈을 부릅떴다.
“이것아, 정신 차려. 나까지 심란하게 만들지 말고!”
“소영아, 너도 떨렸니?”
“나는 뭐 여자 아니냐? 저런 남잘 보면서 떨리지 않으면 그게 정상이야?”
“넌 애인 있잖아!”
“애인은 애인이고, 명품은 명품인 거야. 여자가 명품 보면서 황홀해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쳇, 말은 그럴 듯하네.”
“호호, 그런데 정말 분위기 죽인다. 난 말이야, 저 사람이 창밖을 보고 있는데 그냥 조각인 줄 알았다니까.”
“아무래도 우리 눈에 콩깍지를 씌운 것 같다. 저 남자 애인도 있다는데 우리가 여기서 뭐 하는 짓이니?”
“그러게 말이다.”
자조 섞인 민혜린의 넋두리에 윤소영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녀들도 안다.
그를 바라보면서 그녀들의 마음이 떨린 건 단순한 호감 때문이 아니란 것을 말이다.
심리학자 토머스는 여자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여자들은 언제나 환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환상의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커다란 건 남자에 관한 것입니다. 여자들은 강한 힘을 갖고 있거나 막대한 부를 지닌 남자, 또는 압도적인 외모를 지닌 남자에게 강력한 매력을 느끼게 되는 거죠.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그건 변하지 않는 진실입니다.
* * *
신규성은 입찰 결과가 나오는 날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산업 은행 본관을 향해 출발했다.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러시아워 속에서 뒷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지만 긴장감으로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처음이다.
이런 업무도 처음이었고 최강철이 이렇게 간절히 무언가를 원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초조했다.
입찰에 참여한 회사들은 전 세계적으로 이름나 있는 사모 펀드로서 기업 사냥의 전문가 들이었다.
이런 자들과의 싸움을 위해 제우스 정보 팀의 힘을 빌렸지만 이긴다는 확신을 할 수 없어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이쪽도 그들을 분석하며 전략을 세웠겠지만 오랜 경험으로 무장된 그들도 마이다스 CKC의 참가를 확인하고 전략을 세웠을 것이다.
산업 은행 본관에 도착해서 입찰 결과 발표 장소로 들어서자 벌써부터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게 보였다.
입찰 결과는 10시에 발표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으니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입찰 관계자들은 20여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몰려든 기자들이었다.
김도환이 다가온 것은 신규성이 기자들을 본 후 잠깐 걸음을 멈췄을 때였다.
수없이 터지는 플래시 불빛.
마이다스 CKC의 한국 지부장으로 언론에 알려진 신규성의 존재는 모든 기자의 머리에 이번 입찰의 주역 중 한 명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신 사장님, 좋은 꿈 꾸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긴장이 돼서 잠 잘 수가 있어야죠.”
“저쪽으로 가시죠.”
김도환이 신규성의 손을 잡아끌고 사람들이 뜸한 곳으로 이끌었다.
입찰에 참여한 블랙스톤의 관계자들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사장님, 혹시 들어온 정보가 있나요. 산업 은행 쪽에는 닿는 선이 없습니까?”
“있지만 전혀 새어 나오지 않아요. 그쪽도 지금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비상이 걸려 있거든요. 옆구리를 쑤셔봤는데 절대 말할 수 없다면서 도망가더군요.”
“그것참 미치겠네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죠.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잖습니까. 회장님께서 직접 판단하셨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멈춰졌다.
위로하는 사람이나 위로받은 사람이나 모두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거의 70여 명이 모인 강당은 사람 숫자에 비해 조용했다.
워낙 중요한 발표였기 때문에 기자들조차 숨을 죽이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기자들은 전부 경제 전문 기자들이라 오늘 나올 발표가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유사한 사례들을 봤을 때 그룹 전체에 대한 입찰은 대부분 유찰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채권단에서 정해 놓은 하한선을 인수 의사를 가진 회사들이 고의적으로 맞추지 않기 때문이었다.
유찰이 되면 채권단에서는 일정 금액을 낮춰 재입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인수 의사를 가진 자들이 알게 모르게 단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적은 금액으로 기업을 사냥하겠다는 의도다.
그리고 고의로 유찰을 시켜 알짜 기업들만 찢어서 매각이 나오도록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쭉정이들은 전부 제거하고 돈 되는 알짜배기들만 먹겠다는 지독한 수법이었지만 채권단은 유찰이 되었을 경우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의도대로 따라줄 수밖에 없었다.
죽은 시체를 가지고 있는 건 그들로서는 엄청난 부담감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며 산업 은행과 채권단 관계자들이 강단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잔뜩 굳어져 있었는데 꼭 죽으러 가는 사람들처럼 보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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