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정동그룹의 몰락은 결국 유산의 불법적인 조작이 언론에 노출되면서 시작되었다.
서병진은 국내 최고의 변호사들을 동원해서 서지영의 유언장이 조작되었다며 강력하게 대응했으나 조직적인 제우스의 언론 플레이에 점점 코너로 몰려 들어갔다.
제우스에서는 서병진의 유언장 조작 과정과 당시 변호사였던 이철성의 육성 증언까지 방송국과 신문에 보냈기 때문에 국민들의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더불어 서병진과 서병탁의 횡령 사건까지 언론에 다시 등장하면서 정동의 주가는 연일 곤두박질쳤다.
5,800원이었던 주가가 불과 4개월 만에 3,200원까지 떨어졌는데 회장 일가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정동건설을 비롯한 계열사의 실적에 빨간불이 들어오자 주가는 연일 최저가 행진을 거듭했다.
예나 지금이나 주식 시장의 정보력은 가장 빠르다.
주식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증권사들은 정동그룹이 오래전에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무차별적으로 주식들을 내다 판 것이 주가 하락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물론 배우에는 마이다스 CKC의 작전이 있었다.
마이다스 CKC가 좌판을 깔았고 제우스가 폭탄을 터뜨리자 무더기로 증권사가 가담했기 때문에 신규성이 동원한 금액은 당초 예상했던 것의 30%밖에 되지 않았다.
생각한 것보다 정동의 시장 기반은 취약해도 너무 취약했다.
* * *
서병진의 저택에 동생인 서병탁이 찾아온 것은 일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그의 표정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맡고 있는 계열사들도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장은 냉정했다.
정동이 코너에 몰리기 시작하자 주관 은행마저 추가 융자를 거부한 채 그룹사에서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자금을 회수하겠다는 압박을 가해 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은행과 채권단에서 자금 회수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형님, 혹시 자료가 노출된 건 없습니까?”
“무슨 자료?”
“비자금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비자금이라니!”
서병진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피를 나눈 형제였음에도 비자금에 관한 것은 극비 중의 극비였기 때문에 눈앞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동생에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서병탁은 절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언론이 알고 비자금의 규모까지 보도를 합니까?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럴 내가 어떻게 알아. 난 비자금을 만든 적이 없다. 혹시… 이 일이 너 때문에 생긴 거 아니냐?”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나는 비자금의 비 자도 몰라요!”
노려보는 서병진을 바라보며 서병탁이 펄쩍 뛰었다.
그는 형이 오리발을 내밀며 자신에게 덮어씌우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없긴 왜 없어.
그럼 나는 땅 파서 장사하란 말이야? 눈먼 돈들이 사방 천지에 돌아다니는데 그 정도를 해 먹는 건 일도 아니잖아.
주주들이 내가 그들의 돈을 빼돌렸는지 어떻게 알겠어.
그건 형도 마찬가지 아니야?
비자금이 한 푼도 없다는 걸 누가 믿어. 장난치지 마.
동생한테까지 그렇게 나오면 나도 똑같이 상대해 줄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서병탁이 표정을 점점 누그러뜨렸다.
여기서 자신의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한다면 세 살 먹은 어린애나 다름없다.
“형님, 비자금에 문제가 없다면 버틸 수 있습니다. 그 계집애의 민사소송 건은 시간을 끌면서 버티면 되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걱정할 거 없어. 언론에서 떠드는 건 전부 개소리에 불과해. 네 말대로 시간을 끌면서 천천히 풀어나가면 돼.”
“그런데 형님, 건설 쪽의 수주액이 작년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면서요. 건설이 주저 않으면 문제가 커집니다. 해결 방법이 있습니까?”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아. 재수가 없는 건지 이상하게 우리가 들어가는 발주마다 경쟁이 치열하단 말이야. 아파트 분양도 노른자위는 다른 놈들이 벌써 다 차지해서 쭉정이만 남았어. 꼭 귀신에 홀린 느낌이다.”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요?”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지 않아도 누가 장난치는 건 아닌가 알아봤는데 전혀 낌새가 없어. 정동건설은 발주처에서 신뢰를 받고 있는 기업이다. 무려 30년의 전통을 가진 정동이란 말이다. 곧 정상을 회복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네가 아니라고 하니까 믿겠다. 하지만 처신 잘해. 문제 생기지 않도록 단도리 잘하란 말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요.”
서병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쓴웃음을 지었다.
형이나 잘해.
비자금 만들어놓은 차명 계좌 노출돼서 나까지 엮이게 만들지 말고!
검찰에서 정동건설의 회장실을 덮친 것은 그로부터 3일이 지난 후였다.
익명으로 들어온 제보에서 서병진의 비자금 계좌와 횡령 내용들이 상세하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검찰에 깔아놓은 자들이 미리 압수 수색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려줬으나 준비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앉아서 당했다.
도대체 차명 계좌로 관리했던 것들을 검찰이 어떻게 알았을까.
300억의 비자금을 20개의 계좌로 쪼개서 관리했는데 전부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검찰이 아니라 검찰 할아비라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언론에서 횡령을 떠들었으나 그것도 걱정하지 않았다.
횡령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정동건설을 비롯해서 계열사 전체의 재무 재표를 샅샅이 뒤져야 한다.
그 일은 며칠 만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실질적으로 영장을 들고 와도 세부 자료들을 폐기하면 찾아낼 방법도 없다.
언론에서 횡령 운운했을 때부터 세부 자료들을 폐기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정동 쪽에서는 나올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오판이었음이 금방 나타났다.
전문가를 동원한 검찰이 컴퓨터를 전부 수거했고 관련 자료들을 트럭으로 한 대 분량이나 압수하자 겁이 덜컥 났다.
스스로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었으니 어디서 구멍이 생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서병탁은 형인 서병진이 검찰 조사를 받는다는 소릴 듣자마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식을 팔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상황이 반전되기를 기다렸으나 점점 악화될 뿐이었으니 더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언론에서는 자신의 이름도 거론되었다.
그 말은 자신도 검찰에 소환당할 위험성이 크다는 걸 의미했다.
본능적으로 정동 전체가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천문학적인 부채.
계속되는 건설사와 계열사들의 저조한 실적, 그리고 형의 구속.
과연 여기서 벗어날 방법이 있을까?
자신은 서병진과 다르다.
형이야 장남이었으니 정동이란 이름을 지키고 싶겠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
나부터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가차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현금으로 확보하기 위해 발악을 했다.
머리가 좋은 여동생은 자신보다 먼저 주식을 처분하고 있었기에 더욱 마음이 급했다.
돈이면 살 수 있다.
현금만 확보해 놓으면 남들이 어찌 되든 자신은 떵떵거리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놈들이 주식을 팔고 있어요. 하지만 그리 많이 팔지는 못했습니다. 그놈들이 한꺼번에 주식을 내놓고 있어 하한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누가 살 사람이 있어야 팔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정말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서병진은 어떻게 되고 있죠?”
“검찰에서 증거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복원했는데 거기에 자료들이 남아 있었다고 하더군요. 더군다나 비자금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서병진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비자금은 결국 회사 돈을 횡령해서 만들어진 거니까 근거를 만들어낼 수 없거든요.”
“그자들이 주식을 팔지 못하게 만드세요. 그놈들이 현금을 확보하게 만들어주면 안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팔고 싶어도 팔 수 없을 겁니다. 워낙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있어서 사람들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아요.”
“우린 얼마나 박혀 있죠?”
“30억 정도 남았습니다. 증권사들이 가담하며 떨어질 때 50% 이상 처분했습니다.”
“그건 그대로 두시다가 결정적일 때 쓰십시오.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보험으로 남겨두세요.”
“아깝지 않습니까?”
“아깝긴요, 정동이 수중에 들어오는데 그까짓 30억이 문제겠습니까.”
“하하, 그렇긴 하죠.”
신규성의 입에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최강철을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똑똑하고 세심하다.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30억을 베팅하는 배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얼마나 버틸 것 같습니까?”
“길어봐야 3달입니다. 이렇게 지속되면 결국 법정 관리를 신청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들 힘으로는 어떤 자구책도 마련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것도 막아야겠군요.”
“당연하죠. 서병진 일당이 그동안 회사를 워낙 개판으로 해놨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고민이 될 겁니다. 정부는 정동이 무너지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쉽게 살릴 수 없어요. 지금 국민들 여론이 너무 안 좋아요.”
최강철의 질문에 신규성이 빙그레 웃었다.
법정 관리는 정부에서 기업을 맡아 운영하면서 회생 절차를 밟는 것이었다.
모든 채무는 동결되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회사를 정상적으로 되살리는 방법이었으나 만약 정부가 법정 관리를 받아들인다면 언론을 통해 정동의 기업 사정을 잘 아는 국민들로부터 혈세를 쏟아붓는다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법정 관리를 막아야 하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법정 관리에 들어가면 죄 없는 수많은 직원이 구조조정이란 명분 아래 실직하게 되고 서병진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다.
더불어 정동을 마이다스 CKC의 손아귀에 넣는 것도 어렵게 된다.
정동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반드시 파산이 되도록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
“정동의 법정 관리는 제가 막아보겠습니다. 다른 건요?”
“정동에서 가지고 있는 부채 총액은 전부 합해서 7,500억입니다. 만약 파산이 된다면 인수하는 데 최소 5,000억 이상은 손에 쥐고 있어야 합니다.”
“한꺼번에 들어가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인수 금액은 담보 융자가 가능하고 몇 년에 걸쳐 지급할 수도 있으니까 당장 들어가는 현금은 1,000억 정도면 충분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사장님께서 정동 인수 팀을 만들어서 차근차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인수전에 달려들 자들이 있을까요?”
“그건 두고 봐야 되겠습니다. 워낙 부실해서 많지는 않겠지만 기업 사냥꾼들에게는 충분히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일 테니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정동을 인수해야 합니다. 경쟁자가 생긴다면 무조건 찍어 누르세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아셨죠?”
정동그룹의 비자금 문제와 횡령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한바탕 들썩였다.
계속해서 오리발을 내밀던 서병진이 결국 검찰의 집요한 추적 조사를 견디지 못하고 자백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서지영에 대한 유산 사기 사건도 법원은 서병진의 죄를 인정하며 재산의 환원을 명령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비난은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재벌의 부정과 비리.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감정은 폭발 직전이었다.
정동그룹은 마비 상태에 빠져들었다.
총수 일가가 전부 구속되자 가뜩이나 휘청거리던 정동그룹 전체가 급격하게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룹 전체의 매출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졌고 주가 역시 곤두박질치면서 1,000원 이하로 빠져 버렸다.
채권단의 주체인 은행권에서 자금 회수에 들어가자 정동그룹은 동력 자체를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기업의 생명은 자금이다.
자금이란 피가 흐르지 못하는 기업은 전신 마비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다가 고사할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는 정동그룹의 위기로 인해 대책 팀을 만들어 회생 방법을 강구했으나 결국 법정 관리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만큼 정동건설의 부실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국민들의 감정이 악화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새로 들어선 정권은 국민들의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대신 받아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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