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존 무가비는 수많은 레너드의 공격을 받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화려한 레너드의 공격과 상반되는 묵직함.
그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레너드를 압박하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8라운드부터 보여준 그의 투혼은 보는 사람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집념도 레너드의 완벽한 방어력을 뚫어낼 수 없었다.
레너드의 체력은 전성기 못지않았다.
상대의 움직임을 매의 눈처럼 지켜보며 움직이는 동선은 정교했고, 스텝이 잡혔을 때도 펀치를 허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의 스텝은 마치 안개처럼 흩어졌다 모였고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결국 경기의 승자는 레너드였다.
누구도 그의 승리에 대해서 반론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승리였다.
화끈한 KO로 승부가 난 것은 아니었으나 레너드의 팔이 올려졌을 때 모든 관중은 자리에서 그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완벽한 부활.
최강철도 관중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진심으로 그의 재기를 축하해 주는 박수였다.
서서히 피가 끓기 시작했다.
이번 경기를 보면서 그의 심장은 서서히 달궈지며 그와의 대결을 강렬하게 원했다.
레너드가 보여준 기량은 압도적이었고 최강철은 그의 상대가 전설로 다시 되돌아온 것을 기뻐했다.
최강철이 박수치는 모습이 클로즈업되면서 전광판에 떴기 때문에 관중들의 반응이 다시 요동쳤다.
간절히 원하는 그것.
바로 꿈의 대결이다.
2만여 명의 관중이 자리에 앉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렸다.
바로 링 아나운서가 레너드에게 다가가 인터뷰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링 아나운서의 질문에 레너드는 달변가답게 속사포처럼 말들을 쏟아냈다.
그는 떠버리 헌즈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신경전을 펼칠 정도로 독설가였고 달변가이기도 했다.
링 아나운서가 경기에 관한 질문들을 모두 마쳤을 때 그의 입에서 결국 관중들이 간절히 고대했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가 다가온 곳은 바로 최강철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허리케인, 나의 경기를 보러 와줘서 고맙다. 나는 이제 준비가 되었다. 수많은 복싱 팬이 기다리던 경기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 나는 너와 싸울 생각이다. 장소와 시간을 정해라. 그럼 내가 그곳으로 가겠다.”
그의 선언에 관중들의 시선이 단박에 최강철 쪽으로 몰려들었다.
이미 방송 스태프들의 손에 의해 그에게 마이크가 넘겨지는 걸 전광판에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최강철은 스태프가 전해준 마이크를 거부하지 않고 곧바로 받아 들었다.
그런 후, 레너드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너드, 나는 당신의 복귀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누차 말했듯이 나는 당신과의 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곧 장소와 시간이 정해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경기하느라 힘들었을 테니 몸을 잘 추스르고 계십시오. 그리고 나와 경기할 때는 완벽한 상태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당신도, 그리고 나도 최고의 컨디션으로 다시 링에서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기어코 터졌다.
레너드의 경기를 취재하기 위해 몰려든 전 세계의 기자들은 이 순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레너드가 이겨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야 이런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레너드가 승리를 하고 최강철을 향해 입을 여는 순간 많은 기자가 만세를 불렀다.
드디어 꿈의 대결이 성사된다.
무패의 복서들.
한 번도 지지 않았던 전설 슈거레이 레너드와 현재 링을 평정하며 전승 KO승을 거둔 허리케인 최강철의 대결.
그 누가 이 떨림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레너드에 이어 최강철이 레너드의 도전을 흔쾌히 받아들이자 전 세계의 매스컴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잡느라 전쟁을 벌였다.
관중들은 두 사람의 이름을 연호하며 광란에 젖었는데 아마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전 세계의 복싱 팬들이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기자가 시합을 마치고 링을 떠나는 레너드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장을 벗어나는 최강철을 따라 움직였다.
그중에는 스포츠라인의 토머스와 잭슨도 포함되어 있었다.
“후와… 토머스, 난 아직도 떨려.”
“진정하고 얼른 따라와. 오늘은 이럴 시간이 없어.”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
“내가 항상 말했잖아. 나만 따라오면 특종 잡는 데 지장이 없어. 허리케인은 나한테 브라더와 같은 친구야.”
“경호원들이 막으면 어떡하지?”
“안 막는다. 나는 프리 패스라고 몇 번이나 말해!”
토머스가 자신감 있는 얼굴로 걸음을 옮겨 나가자 잭슨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수십 명의 기자가 최강철의 발걸음을 붙잡는 게 보였으나 토머스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이 하는 짓을 그냥 지켜만 봤다.
특종은 이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 자식들 더럽게 괴롭히네.”
“먹고살려면 어쩌겠어. 뭐라도 건져야지.”
“한참 걸리겠군.”
“저 정도로 몰려들었으니 최소 10분 이상은 잡아먹겠다. 그런데 토머스, 오늘 레너드 정말 대단하지 않았어?”
“원래의 기량을 거의 회복한 것 같더군.”
“허리케인과 싸우면 누가 이길까?”
“휴우, 잭슨. 넌 내가 점쟁이로 보이냐? 저런 선수들이 싸우는데 승패를 내가 어떻게 알아. 아까 존 무가비가 속절없이 당하는 거 못 봤어? 레너드나 허리케인은 다른 선수들과 레벨이 다른 놈들이야.”
“그건 그렇지. 그래도 허리케인이 이기지 않을까. 허리케인은 지금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잖아. 레너드가 고전했던 헌즈도 박살 냈고?”
“레너드는 헌즈와 다른 놈이다. 막상 붙으면 헌즈보다 훨씬 까다롭지. 파괴력은 헌즈가 더 세지만 다른 것들은 모두 레너드가 더 뛰어나. 그래서 레너드가 헌즈를 이길 수 있었던 거야.”
“말이 많겠구만. 막상 경기가 잡히면 전문가들이 골머리를 앓겠어. 오늘 경기에서 레너드가 워낙 인상적인 경기를 했잖아.”
“그래서 더 흥분하는 거야. 더군다나 레너드는 허리케인과 시합할 때 최선을 다해서 훈련하고 나올 거다. 아마 둘의 대결은 복싱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명승부가 될지도 몰라.”
“그랬으면 좋겠다.”
“난 허리케인의 광팬으로서 허리케인을 응원할 거야. 그가 창조하고 있는 영광이 내 피를 뜨겁게 만들어주거든.”
말을 마친 토머스가 기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최강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언제 봐도 최강철만 보면 즐겁고 흥분된다.
기자라는 신분과 개인적인 친분을 떠나 한 명의 복싱 팬으로서 허리케인의 경기를 보는 것은 언제나 축제였고 기쁨이었다.
* * *
최강철은 뉴욕으로 돌아와 일주일을 더 머물다가 귀국했다.
이미 한국은 최강철로 인해 난리가 나 있었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대한민국의 언론들은 끊임없이 두 사람에 관한 기사들을 토해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듀란, 헌즈에 이어 이번에는 슈거레이 레너드다.
전설의 정점에 서 있는 선수.
비록 3년이란 공백이 있었으나 두 번의 재기전을 통해 전성기 못지않은 완벽한 실력을 보여줬기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흥분과 걱정이 교차되고 있었다.
최강철은 입국한 후 기자들의 성화에 몸살을 앓았다.
아직 시합이 결정되지 않았음에도 언론은 두 사람의 인터뷰를 근거로 시합을 기정사실화하며 최강철을 괴롭혔다.
하지만 최강철은 그들을 피하지 않았다.
이런 괴로움도 잠시에 불과할 뿐이란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시합이 결정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세계 타이틀전. 그것도 슈퍼스타들 간의 대결은 수많은 조건과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 * *
“뭐라고, 민사소송?”
“예, 회장님. 오전에 사무실로 등기가 왔습니다.”
비서실장이 슬그머니 봉투를 내밀자 서병진의 손이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잡아 갔다.
봉투의 외면에는 법원에서 보낸 것을 증명하는 소인이 찍혀 있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내용물을 확인하는 서병진의 손이 분노로 흔들거렸다.
기어코 걱정하고 있던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개 같은 년이, 기어코……!”
“회장님, 갑자기 민사소송을 걸어온 이유가 뭘까요? 15년이나 지난 일입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는 유언장에 있는 대로 집행하셨잖습니까?”
“으…….”
비서실장의 질문에 서병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서지영의 유산을 가로챈 걸 아는 사람은 동생 둘과 이철성이 전부였다.
비록 비서실장이 자신의 수족 같은 사람이었으나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만 보고도 비서실장은 금방 눈치를 채는 것 같았다.
“허 실장, 법원에 알아봐. 이 정도 가지고는 대처할 수 없잖아. 어떤 근거로 소송까지 냈나 알아보란 말이야. 그리고 최대한 빨리 고문 변호사를 불러!”
“알겠습니다.”
“왜 안 나가? 서두르라니까!”
“회장님, 보고할 게 몇 가지 더 있습니다.”
“뭐야?”
서병진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주말 동안 유미령과 청평 별장에서 즐기다 오느라 회사에 늦게 출근했더니 비서실장이 폭탄을 들고 들어왔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질 대로 나빠진 상태였다.
고문 변호사를 불러 상의해야겠지만 서지영이 민사소송을 걸어온 것을 보면 그토록 막고 싶었던 유언장을 확인한 게 분명했다.
“저기… 서울경제에서 회장님의 비자금 문제를 기사로 터뜨렸습니다. 그룹 전체에서 상당 금액을 빼돌려 차명 계좌로 관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뭐라고!”
“이게 어제 신문에 나온 내용입니다.”
어쩐지 비서실장이 신문을 들고 있는 게 이상했다.
서병진은 그가 내민 신문을 펴고 정신없이 읽었다.
비자금은 철저하게 관리해 오고 있었다. 한 번에 거액을 마련한 것이 아니라 매년 그룹의 계열사들을 통해 야금야금 빼먹었기 때문에 재무 재표상으로도 거의 흔적이 남지 않았다.
신문을 보는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기사의 내용이 사실과 거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정확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걸 알고…….
시지영이 걸어온 민사소송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불과 10줄짜리 신문 기사에는 소름이 끼쳐왔다.
이것의 여파가 얼마나 큰지 직감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유산을 가로챈 것은 사기죄에 해당되나 공소시효가 지났기에 문제가 없지만 횡령 문제는 자칫 감옥에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막아. 다른 곳에는 안 나왔지?”
“아직은 나온 곳이 없습니다.”
“홍보실을 동원해서 전 언론을 틀어막아. 다시는 이런 기사가 나오지 않도록 조치하란 말이야. 그리고 기획실장 들어오라고 해. 대처 방안을 마련해야 되지 않겠어!”
“회장님, 지금 기획실장은 회사에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저희 회사 주관 증권사 본부장과 미팅을 한다고 나갔습니다.”
“왜?”
“저희 회사 주식이 다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금요일 오후에 2%가 빠졌고 오늘도 3% 이상 빠지고 있는 중입니다. 기획실장은 누군가가 고의로 작전을 펼치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증권사 본부장에게 우리 주식을 사고 판 내역을 확인하러 간 겁니다.”
“으…….”
기어코 서병진의 입에서 참고 참았던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달에 비해 20%가량 떨어졌던 주식은 2주 전부터 하락을 멈췄기 때문에 서병진은 안도의 한숨을 돌리며 유미령과 오랜만에 바람을 쐬러 청평 별장으로 갈 수 있었다.
주식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더군다나 상반기 매출액이 급격히 줄어들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틀 만에 다시 5%가 빠졌다는 말을 듣자 머리털이 곤두섰다.
만약 이 일이 누군가의 사주를 벌어지는 것이라면?
서지영의 민사소송, 그리고 자신의 비자금, 주식의 하락.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안 좋은 일들이 한꺼번에 발생하자 머리가 한순간 텅 빈 것 같아졌다.
그럼에도 그는 슬그머니 이빨을 깨물며 정신을 차렸다.
거대 그룹의 회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런 위기 정도로 쉽게 무너진다면 어찌 대기업을 운영할 수 있겠는가.
최악의 상황에 몰려 서지영과의 소송에서 진다 해도 아깝지만 돈으로 막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비자금 문제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증거조차 남기지 않는다면 언론이 아무리 지랄을 해도 그를 어쩔 방법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일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배후가 있다는 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막강한 적이 정동을 노리고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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