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 * *
최강철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돈 킹과 톰슨이 공항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여전한 인파.
기자들은 그의 라스베이거스 입성에 지대한 관심을 표하면서 새삼 레너드와의 일전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던져 왔다.
이번에도 최강철을 수행한 것은 정철호의 경호 팀이었다.
그들은 이제 공식 일정에는 최강철의 주변을 철통처럼 경호하며 은밀하게 따랐다.
“허리케인, 이번 라스베이거스에 온 이유가 레너드의 경기를 보러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재기전에서 레너드는 여전히 환상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KO승을 거뒀습니다. 그 경기를 보셨나요?”
“봤습니다.”
“경기를 본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3년이나 쉬었던 선수답지 않은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아직 완벽하게 컨디션이 올라온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는 뜻인가요?”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최강철이 되물었다.
허리케인이란 자신감.
슈거레이 레너드가 전설 속에서 살아왔던 선수였으나 지금의 그는 정상에 우뚝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원 톱의 영웅이었다.
기자들의 질문에 조금 더 대답해 준 최강철은 돈 킹이 준비한 리무진에 올라타고 호텔로 향했다.
가히 성대한 환영이다.
파라다이스 호텔은 그가 예약하는 순간부터 성대한 환영 행사를 준비했는데 사장까지 직접 나와 영접하는 성의를 보였다.
당연히 모든 것이 공짜다.
허리케인이 머물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호텔은 몇백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 숙박비를 받는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파라다이스 호텔은 가장 비싸다는 스위트룸을 최강철에게 제공했다.
“오자마자 고생이 많았어. 여행은 힘들지 않았나?”
“아뇨, 즐거웠습니다.”
“다행이군. 레너드가 알아. 자네가 여기에 온 걸 말이야.”
“그렇습니까?”
“계속해서 그쪽과 미팅을 하고 있네. 레너드 쪽은 이번 시합에서 승리하면 자네와의 시합을 추진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네.”
“금년 중에 해야 되겠죠. 안 그러면 저 역시 방어전을 치러야 될 테니까요.”
“당연한 말이지. 자네가 방어전을 치르게 되면 시합은 내년으로 넘어가야 해.”
“어쩐 일이십니까. 헌즈전 때는 그렇게 반대를 하시더니 이젠 아주 적극적이시네요?”
“이 사람아, 나는 이제 자네에 대한 의심을 모두 버렸네. 자네는 허리케인이야. 아무리 레너드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네. 두려워할 놈은 오히려 밥 애런이야. 안 그래?”
“이제야 나를 인정해 주시는군요.”
“하하하, 당연한 일 아닌가. 자네가 그동안 해온 일을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어떻게 인정하지 않겠나. 허리케인, 자네는 금세기 최고의 복싱 영웅이야!”
“고맙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테니 이만 쉬게. 자네 일행 자리는 링 사이드에 마련해 놨으니까 제대로 볼 수 있을 걸세.”
윤성호와 이성일이 날아온 것은 레너드의 시합을 이틀 남겼을 때였다.
안 본 지 불과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반가웠다.
매일 몸을 부딪치고 살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다시 보게 되자 웃음꽃이 저절로 피어났다.
“어라, 이 자식. 지영 씨와 오랜만에 회포를 풀더니 바짝 꼴았네. 아이고, 이걸 어쩐데, 보약이라도 해 먹여야겠어. 허벅지 봐라, 얼마나 써댔는지 흐물거리는구만.”
“인마, 어딜 만져!”
이성일 낄낄거리며 다가와 허벅지를 만지는 척하다가 가운데 다리로 손이 올라오는 바람에 최강철이 펄쩍 뒤로 물러나며 소리를 질렀다.
이놈은 시도 때도 없이 장난을 친다.
“뭐 어때, 시합 때마다 늘 내 대가리로 키스했던 거잖아. 그 물건을 내가 한두 번 만져봐?”
“그렇게 좋냐? 이것들은 친구라고 아주 좋아죽는구만. 그런데 강철아, 이 방 정말 끝내준다.”
옆에서 지켜보던 윤성호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을 둘러보다가 입맛을 쩍쩍 다셨다.
5성 호텔인 파라다이스의 스위트룸은 그야말로 궁전처럼 꾸며져 있기 때문이었다.
대뜸 말을 받은 건 이성일이었다.
“방만 좋으면 뭐 합니까.”
“그럼?”
“호텔에 들어왔으면 여자가 있어야죠. 사은품으로 늘씬 빵빵 한 미녀를 넣어줘야 최고급 호텔이에요.”
“네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연경 씨한테 일러줄까?”
“누가 내가 한데요. 여긴 강철이 방이잖아요.”
“그럼 지영 씨한테 일러주면 되겠구만. 가장 친한 친구란 놈이 바람을 피우게 만들었다고.”
“관장님은 그게 문제예요. 사나이들의 세계에서 이런 농담은 비일비재한 일인데 어째 농담한 걸 가지고 죽자면서 덤벼듭니까.”
“시끄러워. 넌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허, 참. 나 같은 순정 마초를 그렇게 생각하다니 너무하시네요.”
“됐으니까, 이제 레너드 상대에 대해서 브리핑이나 해봐. 준비해 왔지?”
“그럼요.”
윤성호가 스윽 화제를 돌리자 이성일이 쓴웃음을 지으며 가방에서 자료를 꺼내 들었다.
그는 이미 레너드의 상대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를 해 왔던 모양이다.
“존 무가비, WBA 슈퍼 웰터급 5위에 올라 있습니다. 전적은 43승 1무 5패네요. 그중 KO승이 31번이나 있는 강타잡니다.”
“꽤나 센 놈이구만.”
“존 무가비는 레너드를 꺾고 강철이에게 도전할 생각입니다. 돈 킹 씨가 그렇게 만들었죠. 레너드와 무가비의 대결을 통해 돈도 벌고 실력을 평가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주 무기는?”
“원거리에서 던지는 라이트 훅이 위력적입니다. 화끈한 인파이터로서 스피드도 빠른 편입니다. 맷집도 상당히 좋은 편이라 KO패가 한 번밖에 없어요. 더군다나 상대를 압박해서 로프나 코너로 몰아넣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위험 존에 상대를 몰아넣으면 더티 복싱으로 전환합니다. 상대는 그의 피지컬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한 채 쓰러졌죠…….”
이성일이 계속해서 존 무가비에 대한 특성들을 열거하자 최강철과 윤성호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자료만 가지고도 상당히 강한 선수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강철의 입이 열린 것은 거의 15분가량 이성일의 브리핑이 끝난 후였다.
“성일아, 네가 봤을 때 이 시합의 승부 관건은 뭐라고 생각하냐?”
“레너드의 방어력!”
“응?”
“이번 시합은 레너드가 전성기 시절의 방어력을 보여주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레너드는 웰터급에서 뛰다가 은퇴를 했던 사람이야. 체중이 불어났기 때문에 슈퍼 웰터급으로 재기를 했지만 그가 상대했던 선수들과 존 무가비는 근본적으로 피지컬이 다른 선수야. 더군다나 펀치력도 훨씬 강해서 방어력이 약해졌다면 이기기 쉽지 않을 거다.”
“그렇겠지. 하지만 저번 시합을 보니까 움직임이 꽤 괜찮던데?”
“상대가 다르잖아. 그 친구와 존 무가비는 레벨이 달라. 그리고 또 하나의 승부 추는 레너드의 체력이야. 그가 예전과 같은 체력과 테크닉을 보여준다면 레너드가 이기겠지. 판정승으로.”
이성일의 설명을 들으며 최강철과 윤성호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꽤 날카로운 분석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최강철의 상대가 존 무가비였다면 이성일은 이 정도 분석에 그치지 않고 호미로 땅을 후벼 파 듯 존 무가비의 단점을 파고들어 쓰러뜨릴 전략까지 마련했을 것이다.
레너드와 존 무가비의 경기는 전 세계 복싱 팬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했다.
레너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파괴력도 파괴력이었지만 이 경기를 그가 이기게 될 경우 세기의 빅 이벤트가 다시 열린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평가는 레너드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측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경기가 존 무가비의 승리로 끝날 수 있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전망이었다.
그만큼 존 무가비의 능력이 뛰어났고 레너드가 과거처럼 언터처블의 선수가 아니라는 판단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복싱 팬들은 경기가 다가오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전설의 명경기들을 만들어낸 슈거레이 레너드였기에 경기가 펼쳐지는 시저 팰리스 호텔 특설 링은 관중들로 가득 들어찼다.
더욱 그들을 흥분시킨 것은 관중들을 뚫고 최강철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최강철은 선수가 아닌 관중으로 경기장에 들어섰지만 대형 전광판에 그의 모습이 잡히자 모든 관중이 일어서서 그를 맞아주었다.
손을 흔들어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허리케인을 연호하고 있었다.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불을 뿜는 쏟아지는 허리케인의 인파이팅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천천히 걸어 자신의 자리에 앉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하기를 원했다.
그의 자리는 링사이드로 링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그 이야기는 자리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최고의 VVIP란 뜻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최강철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고 싶어 안달을 부리고 있었다.
최강철은 자리에 앉기 전에 차례대로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중에는 할리우드 최고 여배우라는 줄리아 로버츠도 있었는데 그녀는 최강철이 손을 잡아주자 감격에 겨워 환호성까지 질러댔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지막 오픈 경기가 시작되었다.
밴텀급 세계 랭킹전으로 그 유명한 라울 페레즈의 경기였다.
세계 챔피언이었던 그는 8차 방어를 끝으로 그랙 리차드슨에게 타이틀을 뺏긴 후 다시 리매치를 벌이기 위한 전초전을 치르는 것이었다.
역시 경량급의 스피드와 테크닉은 훌륭하다.
상대 역시 세계 랭커인 디에고 아발라였기 때문에 두 선수는 매 라운드마다 엄청난 난타전을 벌여 관중들을 흥분시켰다.
이래서 복싱 경기를 보는구나.
두 선수의 경기는 예술을 보는 것 같았다.
중량급 같은 강력한 펀치력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들은 링의 중앙에 붙어서 서로 치고받으며 복싱의 마력을 한껏 뿜어냈다.
상대의 펀치를 흘리는 기술과 반격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복싱은 언제나 결과가 있고, 승자는 라울 페레즈였다.
라울 페레즈의 체력과 스피드가 라운드가 지날수록 아발라를 압도하며 결국 7회에 KO로 승부가 났던 것이다.
메인 경기를 기다리는 관중들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명경기였다.
“정말 좋구만.”
“그렇죠?”
“라울 페레즈가 저번 경기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해 타이틀을 뺏겼지만 리턴 매치가 성사되면 만만치 않겠어.”
“원투 스트레이트가 정말 번개 같았어요. 아주 좋은 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기가 끝나자 최강철을 중심으로 양옆에 앉아 있던 윤성호와 이성일이 번갈아 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복싱 전문가들답게 그들의 대화 수준은 경기를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웠다.
최강철도 이야기에 동참해서 한창 의견을 나눌 때 폭발적인 관중들의 환호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전광판을 통해 레너드와 존 무가비의 모습이 잡혔기 때문이다.
두 선수는 출전 준비를 위해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데 금방 라커룸을 나설 것 같았다.
세계 타이틀전은 아니었지만 관중들의 함성은 끝이 없었고 드디어 존 무가비에 이어 레너드가 출전했을 때 모든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의다.
전설을 쌓아 올린 위대한 선수에 대한 관중들의 경의는 진심과 존경이 가득 들어 있었다.
가벼운 식전 행사에 이어 두 선수가 링에 부딪쳤을 때 윤성호가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보였다.
수많은 경기를 치렀음에도 레너드의 경기를 직접 보게 되자 긴장이 된 모양이었다.
레너드를 맞이한 존 무가비는 자신의 경기 스타일을 고수하며 처음부터 몰아붙였다.
원거리에서 날리는 강력한 훅, 그리고 압박.
관중석에서 보는데도 몸이 움찔거릴 만큼 강력한 공격들이었다.
하지만 레너드는 냉정하게 링을 돌면서 그의 공격들을 무력화시켜 나갔다.
그냥 방어만 한 것이 아니라 빠르게 움직이며 존 무가비의 공격이 실패할 때마다 반격을 가했다.
그의 특기다.
레너드는 완벽한 아웃복서가 아니라 상대의 급소를 날카로운 창처럼 수시로 찔러대는 파이터였다.
헌즈와의 경기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강력한 압박은 인파이팅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완벽한 것이었다.
오픈게임으로 벌어졌던 밴터급 경기처럼 치열한 난타전은 아니었으나 경기장은 긴장으로 가득 덮여 숨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레너드와 존 무가비가 보여주는 중량급의 묵직함과 화려한 테크닉은 왜 슈퍼 웰터급이 지금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지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레너드는 경기가 시작된 후부터 링을 돌며 존 무가비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강력한 접근은 스텝으로 벗어났고 공격을 무력화 시킨 후 알리가 했던 것처럼 나비처럼 날아 벌같이 쏘았다.
처음 재기전을 벌였을 때와 또 다른 레벨이었다.
그의 방어력은 뚫은 곳이 없어 보였다.
존 무가비의 공격력이 최고 수준에 달해 있었지만 레너드는 빠른 발과 특유의 더킹과 위빙으로 모든 공격을 흘려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다.
패링에 이은 라이트 스트레이트, 크로스 카운터, 잽을 맞혔을 때 번개처럼 날아가는 원투 스트레이트와 양 훅의 조화.
아예 공격조차 시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스토핑, 그리고 숄더 롤, 반격을 위한 암 블로킹.
마치 그의 몸은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바로 전설의 위용이다.
그 누구라도 무기력하게 만들며 야금야금 정신을 흔들어놓는 후 쓰러뜨리는 파괴자.
슈거레이 레너드는 과거의 화려했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존 무가비를 사냥해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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