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 * *
“최강철! 왜 그년이 최강철과 함께 있어?"
“결혼식에 참석했답니다. 최강철의 누나 결혼식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알아듣기 쉽게 말해!”
서병진이 벌컥 화를 냈다.
비서실장의 보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서지영이 몇 차례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불같이 화를 냈다.
그가 최강철과 서지영의 관계에 대해서 알지 못한 것은 언론에서 그녀를 미모의 재미 교포라고만 소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비서실 쪽에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건 오래전의 일이었고 그 이후 한 번도 한국에 들어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서지영에 대한 관리 업무는 거의 손을 뗀 상태였다.
비서실 쪽으로 정보가 들어온 것은 작년 말 공항 쪽에 근무하는 정문호로부터였다.
그는 공항 공사 고객 본부장인데 대구공항으로 발령받았다가 작년에 김포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서병진의 부탁을 받고 서지영의 입출국을 체크해 왔었는데 대구로 옮긴 후 소식이 끊어졌다가 갑자기 작년 말에 김포로 돌아오면서 연락이 왔던 것이다.
서병진의 분노는 컸다.
정상적으로 상속이 되었다면 모녀의 자산은 현재 가치로 500억이 훌쩍 넘을 정도로 늘어난 상태였다.
만약 서지영이 자신의 재산을 되찾기 위해 들어왔던 것이라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비서실장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전전긍긍했다.
머슴은 주인의 기분에 따라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저기 확인해 보니 서지영 씨가 최강철 선수와 사귄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식에 참석한 것 같습니다.”
“그년이 미쳤군.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어. 아무리 첩년의 자식이라도 기껏 복싱 선수 나부랭이와 사랑 놀음을 한단 말이냐? 병신 같은 년.”
“최강철 선수는 국민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웅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 새끼는 번 돈을 전부 고아원과 장학금으로 쓴다면서. 저는 전세에 살고?”
“예, 회장님.”
“그러니까 또라이 새끼라는 거 아니냐.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겨우 매 맞아서 번 돈을 벌레들한테 쏟아붓는다는 게 제정신이야? 그래서 출신이 중요한 거다. 갑자기 없는 놈이 큰돈이 생기니까 미쳐 날뛰는 거지.”
“회장님, 지금 애들이 결혼식장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어떡할까요?”
“어쩌진 뭘 어째! 원래 계획대로 가도록. 그년 혼자 있을 때 납치해서 내일 정도 풀어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예, 회장님.”
비서실장이 서병진의 시선을 피하며 내시가 황제 앞에서 물러나는 것처럼 뒷걸음을 쳐서 빠져나왔다.
그런 후 한숨을 길게 흘려냈다.
정말 독사 같은 자다.
비록 이복 동생이라 해도 같은 핏줄인데 사내들에게 먹잇감으로 넘겨주라는 지시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리다니, 독사처럼 잔인한 심성을 가졌다.
더 기분 나쁜 건 회장의 입에서 구체적인 지시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단 것이었다.
늘 그랬듯이.
회장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서 자신에게 불리한 지시는 절대 입으로 말한 적이 없다.
“오늘 고생했어.”
“고생은, 언니 너무 예쁘더라.”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서 힘들지?”
“응,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야.”
“그럼 오늘은 호텔에 들어가서 푹 자. 내일은 내가 서울 구경 시켜줄게.”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몸이 말을 안 들어요. 우리 강철 씨 품에서 자고 싶지만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오셨으니까 내가 양보해야지.”
“그래, 가서 푹 쉬고 있어. 내가 저녁 먹고 일찍 갈게.”
“응.”
최강철은 택시를 잡아준 후 떠나는 서지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비라보았다.
그때 정철호가 다가왔다.
“보스, 애들이 따라갔습니다. 별일 없을 겁니다.”
“누가 보낸 건지 확인하세요.”
“알겠습니다.”
정철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떠나자 최강철이 가족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족들은 멀리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운데 계신 부모님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손자 손녀 전부 합해서 16명의 가족이 부모님을 중심으로 주욱 늘어서 있었는데 구김살이 전혀 없는 얼굴들이었다.
그가 다가서자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큰형이 말을 붙여 왔다.
“강철아, 그분은 가셨니?”
“예, 어제 들어와서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됐어요. 같이 저녁 먹기에는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제가 쉬라고 보냈어요.”
“잘했다, 이제 강숙이도 갔으니까 우리 강철이만 남았네. 그렇죠, 아버지?”
“강철이도 이제 스물아홉이니 갈 때가 되었어. 강철아, 넌 언제 갈 거냐?”
큰형의 말에 아버지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궁금증은 옆에 있던 어머니와 모든 가족에게도 공통된 것이었기에 모두의 시선이 최강철에게 몰려왔다.
“아버지, 저는 이제 4학년이니까 졸업 먼저 하겠습니다. 그래서 내년 정도에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라, 아홉수는 좋지 않으니까 그게 좋겠다. 임자, 강철이가 내년에 장가간다는구먼. 서운하지 않지?”
“내가 왜 서운해유. 내년이면 딱 적당해. 강철아, 넌 중요한 사람이니까 우린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그런데 그 색시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거여?”
* * *
정철호는 서지영이 탄 택시를 따라 움직이는 놈들의 뒤를 쫓았다.
저놈들의 의도는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서지영은 최강철의 연인이었지만 가급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정체는 거의 노출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어렸을 적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거기서 자랐으니 한국에 원한을 가질 만한 자들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괴한들이 그녀를 쫓는다는 건 결국 최강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을 위해 움직이는 친일파들이 아직 국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고 생생히 활보하는 중이었고 선거 과정에서 원한을 맺은 놈들도 많았다.
놈들은 자신들의 낙선이 최강철 때문이라며 이를 갈며 미워했다.
거기에 고아원을 운영하며 갖은 못된 짓을 하던 떨거지들도 최강철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놈들은 정부 보조금과 각종 지원금을 착복하며 떵떵거리고 살다가 갑자기 나타난 최강철이 대형 고아원을 만드는 바람에 아이들을 전부 뺏기고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었다.
정철호는 놈들을 뒤따르며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서지영의 행선지는 신라호텔이었다.
그 말은 시내의 중심지를 관통하다는 뜻이고 저자들이 대낮에 일을 벌이기 어렵다는 걸 의미했다.
신라호텔의 정문에 도착한 서지영이 택시에서 내리자 뒤를 따르던 두 대의 차에서 4명이 내리는 게 보였다.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호텔까지 따라와서 내려?
“규태야, 따라와. 넌 차 가지고 여기서 대기하고.”
“예, 실장님.”
운전을 하던 요원이 차를 옆으로 빼자 정철호가 황규태를 데리고 호텔 정문으로 움직였다.
그들 뒤에는 2대의 차가 더 따라왔는데 4명의 요원이 차에서 내리며 은밀하게 자리를 찾아갔다.
따로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었다.
워낙 훈련이 잘된 요원들이었기 때문에 놈들을 확인한 후 서지영을 급히 찾았다.
그녀는 이미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중이었다.
“규태야, 너는 여기서 쟤들을 살피고 있어. 나는 저놈을 따라가야겠다.”
“알겠습니다.”
황규태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겨 커피숍 쪽으로 향했다.
서지영의 뒤를 따르던 놈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커피숍으로 걸어갔기 때문에 이미 다른 요원들은 놈들을 포위하듯 자리를 잡고 대기하는 중이었다.
정철호는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검은색 슈트를 차려 입었는데 넥타이까지 매고 있어 사업가처럼 보였다.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서 있는 서지영의 뒤쪽으로 다가가 놈과 그녀 사이를 슬쩍 가로막았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건 그들 외에도 외국인 부부가 있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사람들이 타자 서지영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꽤나 고단한 모양이었다.
외국인 부부가 5층에서 내린 후 엘리베이터는 9층으로 올라갔다.
서지영이 먼저 내렸고 그 뒤를 정철호와 사내가 따랐다.
그러나 방향이 다르다.
서지영은 오른쪽으로 걸어갔으나 정철호와 사내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놈은 반대쪽으로 걷는 척하다가 서지영이 룸 앞에 서자 그녀가 있는 쪽으로 되돌아갔다.
정철호는 복도를 10m 정도 그냥 더 걸어간 후 룸으로 들어가는 척하면서 사내의 행동을 관찰했다.
놈은 룸 번호를 확인한 후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되돌아 나오는 중이었다.
‘으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는 놈의 뒷모습을 확인한 정철호의 걸음이 서지영이 들어간 룸으로 향했다.
기분이 점점 좋지 않았다.
그저 사람을 미행했다고 해서 놈들을 제압할 수는 없었으니 조금 더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기다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귀에 꽂아 놓은 무전기에서 황규태의 목소리가 급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실장님, 놈들 올라갑니다.”
* * *
종로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는 신강북파의 행동대장 중 하나인 서진표는 동생들을 호텔로 올려 보낸 후 차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호텔로 들어섰다.
그러자 조양주가 급하게 다가왔다.
“형님, 917호입니다. 꽤 피곤한 모양이던데요. 하품을 계속 해대는데 꼴려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자면 더 일이 편하겠구만.”
“자다가 일어난 년은 맛이 없을 텐데요.”
“이 새끼야, 내가 먼저 홍콩 보내놓을 테니 뒤처리나 잘해.”
서진표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조양주의 설레발을 끊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기회들도 가끔씩 찾아온다.
처음 지시를 받았을 때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갓 들어온 똘마니도 아닌데 계집이나 후리라는 지시를 받자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지시는 보스에게 직접 내려왔고 보너스로 나온 돈도 꽤 많았기 때문에 서진표는 조직원들을 이끌고 서지영을 쫓았다.
대박이다.
못생겼거나 몸매가 엉망인 계집이었다면 동생 놈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서진영의 몸을 보자 저절로 군침이 삼켜졌다.
뒤를 따르는 동생 놈의 표정이 밝았다.
워낙 험한 곳에서 놀던 놈들이라 이런 일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호텔의 도어록 정도는 전문가들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쉬운 건 벨을 누르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추적을 받거나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하는 자가 아니라면 벨을 누르면 백이면 백 다 기어 나오게 되어 있다.
띵동, 띵동.
순식간에 벨을 5번이나 눌렀다.
그러자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잠에서 깨지 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룸서비스입니다. 손님께 와인과 꽃이 왔습니다.”
“와인과 꽃요, 누가 보낸 거죠?”
“최강철 씨가 보낸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끝나며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진표의 험상궂은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야리야리한 몸을 안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몸이 후끈거리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홍콩에 보내줄게!
문이 열리며 당황한 여자의 모습을 기대했으나 나타난 것은 말쑥한 양복을 차려 입은 자였다.
“뭐해, 들어와. 꽃하고 와인은 어디 있나?”
“넌 누구냐?”
“하아, 이 새끼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구만. 네가 룸서비스라며? 그런 놈이 내가 누군지 묻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꽃하고 와인 어디 있어?”
정철호가 씨익 웃으며 한 발 다가오자 서진표의 표정이 굳어졌다.
종로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수도 없이 치렀기에 상대의 자세만 봐도 어느 정도 실력인지 가늠이 되었다.
하지만 이자는 다르다.
서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냥 시퍼렇게 갈린 칼을 보는 것 같았다.
그가 이 판에서 살아남은 것은 상황을 읽는 판단력과 감각이 남다르기 때문이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
저절로 인상이 일그러지며 빠르게 두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그게 다다.
천하의 서진표가 한 놈 때문에 꼬리를 말고 도망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5명의 사내가 나오는 게 보였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기세를 지닌 자들이었다.
사내들은 문 앞에 서 있는 자신들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왔는데 싸움에 대한 두려움이나 긴장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니들 뭐야, 이 새끼들아!”
서진표가 인상을 긁으며 몸을 돌렸다.
조직원들이 엘리베이터에 나타난 사내들을 향해 몸을 돌린 건 그의 고함 소리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워낙 구역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싸움을 해봤기 때문에 자신들의 동생들은 싸움이라면 도가 튼 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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