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제27장 판이 깔리다
1993년 3월.
최강철은 ‘제우스’에서 ‘대한정의당’에 관한 일들과 주요 정치 현안에 대한 정보들을 들은 후 성호체육관으로 향했다.
최근 들어 재기한 슈거레이 레너드의 경기가 위성 녹화 방송 되기 때문이었다.
레너드는 2월 말에 벌어진 재기전에서 슈퍼 웰터급 북미 랭킹 5위인 존 카터와 시합을 벌였는데 8라운드에 KO승을 거뒀다.
MBC에서는 급하게 그의 경기 장면을 입수해서 오늘 방송했는데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인 것이었다.
국민들의 관심도 컸지만 최강철이 전화해서 최대한 빨리 방송해 달라고 독촉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너 기다리느라고 목 빠질 뻔했잖아.”
“목이 빠지긴, 벌써 한 병씩이나 마셨구만.”
최강철이 비어 있는 맥주병과 반쯤 없어진 오징어를 보면서 두 사람을 노려봤다.
하여간 정말 못 말릴 사람들이다.
방송 시작하기 30분 전에 왔는데 벌써 둘은 맥주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술판을 벌려놓았다.
윤성호가 따라준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방송이 시작되며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 순간부터 세 사람은 맥주잔을 놓은 채 화면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북미 랭킹 5위인 존 카터는 절정의 기량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괜찮은 전적을 보유했고 펀치력과 테크닉도 뛰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레너드는 그런 존 카터를 한마디로 데리고 놀았다.
원투 스트레이트는 기본이고 온갖 펀치를 시험 가동 하듯 퍼부었는데 존 카터는 경기가 진행될수록 넋이 나간 모습을 수시로 보여주었다.
빠르고 경쾌한 스탭은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날아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고, 여전히 날카로운 잽과 이어지는 원투 스트레이트, 콤비 블로로 터지는 양 훅과 어퍼컷까지 번개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슈거레이 레너드는 이 경기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오랫동안 쉬면서 둔화되었던 자신의 경기력을 다시 끌어 올리기 위해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경기를 진행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일방적인 경기다.
경기를 지켜보던 윤성호와 이성일의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레너드는 8라운드에 들어 상대방의 전신을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마치 무섭게 몰아치는 해일을 보는 것 같았다.
“우와, 환장하겠군. 저게 3년 쉰 사람 맞아?
“펀치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구만. 엄청난 스피드야. 외신에서 보니까 이 경기를 위해 3개월 훈련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저 정도라면 본격적으로 훈련을 했을 땐 어느 정도란 말이냐. 역시 레너드군. 대단해!”
윤성호와 이성일이 번갈아 말하며 최강철의 눈치를 슬금슬금 봤다.
아직까지 그가 한마디로 하지 않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강철의 입이 열린 것은 화면을 통해 팔을 들어 올리며 활짝 웃고 있는 레너드의 전신 모습이 클로즈업되었을 때였다.
“슬슬 피가 끓는군요. 하지만 저 정도 가지고는 아직 안 됩니다. 레너드는 더 준비하고 와야 나하고 싸울 수 있습니다. 관장님, 알면서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건 나 약 올리려고 하는 소리죠?”
* * *
서병진은 기획실장이 가져온 결재를 하다가 만년필을 집어 던지며 서류를 허공으로 던져 버렸다.
정동그룹의 주력은 정동건설과 12개의 계열사로 이루어졌는데 그는 그룹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정동건설은 작년 매출액이 6,500억을 수주했지만 2년 전에 비하면 30%나 줄어든 규모였다.
문제는 턴키 사업에서 3번이나 물먹은 것이 컸다.
고속도로 건설 사업은 건설사에게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였으나 몇 번 실패를 하게 되자 수주액이 급감하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당신들 위원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왜 우리가 한참 뒷 순위인 태산건설한테도 밀린단 말이야.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어!”
“죄송합니다, 회장님. 인력풀이 늘어나면서 위원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조금 더 적극적인 전략을 마련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럴 말이라도 하나? 그럼 태산이 된 건 뭐야, 그 새끼들이 낙찰된 건 뭐냐고!”
일리가 있는 말이다.
턴기 사업은 심사 위원들이 기술적인 부분과 개량적인 부분을 평가해서 낙찰자를 결정하는 방식인데 어떤 회사가 더 적극적으로 영업해서 위원들을 사로잡느냐에 따라 낙찰 결과가 달라진다.
지금 서병진의 말은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다.
밥만 축내는 벌레들.
월급을 받으면 돈값을 해야 되는데 정동건설의 기술자들은 아직도 세상이 변한 줄 모르고 기술로만 승부를 걸려는 버릇이 남아 있었다.
영업이란 사람을 잡는 것이다.
돈을 처먹이든, 계집을 안겨주던, 그것도 아니면 골프 접대를 하든 어떤 방법이라도 동원해서 심사 위원들을 잡아야 한다.
그것이 돼야 정동건설이 발전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동건설의 임원진과 기술자들은 아직도 선친이 운영할 때처럼 정직한 기술력만 있으면 수주가 되는 줄 알고 있었다.
답답했다.
회장에 오른 후 계속해서 닦달했음에도 오랫동안 정동건설을 지배했던 정직과 신뢰라는 사훈 때문인지 다른 회사와 다르게 직원들의 영업에 대한 마인드가 형편없었다.
씩씩거리며 기획실장을 내보냈을 때 문이 열리며 동생인 서병탁이 들어왔다.
비실거리며 들어오는 서병탁은 돌아가신 선친이 떼어준 정동물산과 정동식품을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형님, 뭐가 잘 안 됩니까?”
“아버지가 워낙 고지식하게 운영해서 그런가, 아직도 직원들이 정신을 못 차려. 씨발, 내가 돌아버리겠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패야죠. 그런 새끼들은 옷을 벗기면 됩니다. 몇 놈 시범 케이스로 잘라 버리세요.”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밥벌레들은 모가지를 잘라야 정신을 차려.”
“그럼요, 그런데 그년이 또 들어왔다면서요?”
“그래.”
“내가 분명히 경고를 했는데 또 기어들어 왔어. 그년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왔으니 어쩌겠어. 그에 대한 보상을 해줘야지.”
“이왕 하시는 거 화끈하게 해줘야 됩니다. 그래야 다시는 기어들어 오지 못해요. 한국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끔찍하게 여기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몇 놈 붙일 생각이다?”
“좋은 방법이네요. 아무래도 계집애들한테는 그 방법이 제일 좋죠.”
서병진의 대답에 서병탁이 손뼉을 치면서 격하게 동의를 나타냈다.
그들의 이복동생인 서지영을 푼돈만 쥐어주고 미국으로 내쫓은 건 벌써 십몇 년 전 일이었다.
그동안 쥐 죽은 듯이 살았기 때문에 잊고 살았는데 최근 들어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는 것을 안 순간 저절로 살의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아버지는 그녀에게 말도 안 되는 유산을 남겼다.
미리 알고 유서를 조작해서 강남의 빌딩들과 주식들을 전부 뺐었기 때문에 서지영 모녀에게 쥐어진 건 유서에서 남긴 재산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재산도 재산이었지만 그년에게는 어떤 것도 주고 싶지 않았다.
첩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어머니의 일생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 아팠단 말인가.
절대 그들 모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 * *
막내 누나의 결혼은 4월의 아름다웠던 봄날에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는 누나의 얼굴은 서서히 눈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막내 누나는 거의 모든 시간을 부모님과 보냈다.
둘째 누나가 결혼을 해서 분가를 한 후부터 집에는 부모님과 막내 누나만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병원을 혼자 다 챙겼고 수시로 모시고 나가 외식도 시켜드렸다.
착한 누나.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스스로 대학을 포기했고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태겠다는 마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린 나이에 취직을 했다.
누나는 아름다웠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누나의 모습을 보면서 최강철은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오는 게 느껴졌다.
그 옛날, 가난이 눈물을 흐르게 만들었던 그 아픈 시절.
누군가의 선물로 얻게 된 카스텔라를 먹으며 행복에 겨워할 때.
학교에서 돌아왔던 막내 누나는 침을 삼키며 내가 빵을 먹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누나의 나이는 그때 10살, 초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나이였다.
“맛있니?”
“응.”
“빵은 한입에 크게 베어 먹는 거 아니야. 조금씩 맛을 보면서 먹어.”
“응.”
누나의 시선이 무엇을 말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나는 절대 빵을 나눠줄 생각이 없었다.
어린 누나는 침을 삼키고 참았지만 결국 나를 향해 어렵게 손을 내밀었다.
“강철아, 누나 조금만 떼어주면 안 돼?”
“싫어!”
그때를 기억한다. 그 아픈 시절을…….
누나는 빵을 들고 매몰차게 몸을 돌린 나를 향해 한 방울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누나. 그건 내 본심이 아니었어. 너무 어렸잖아. 그리고 그때의 나는 카스텔라가 누나보다 더 좋았는걸.
누나마저 떠나면 이제 부모님만 남게 된다.
그때처럼.
하지만 예전과 같은 일은 반복되지 않게 만들 것이다.
부모님의 소망대로 제주도 바닷가에 아름다운 정원이 달린 집을 마련해 놨다.
잔디가 비단처럼 깔려 있고 꽃이 만발한 정원과 아버지가 좋아하는 진돗개 2마리, 단층이었지만 두 분이서 충분히 머물 수 있는 집을 지었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이었다.
막내 누나가 결혼해서 떠나면 곧 바로 그곳으로 가실 수 있도록 신규성에게 부탁해서 준비해 놨었다.
바보 같은 누나.
기어코 부모님께 인사하는 시간이 오자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 누나. 그리고 잘 살아줘.
누나의 결혼식은 성대했다.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축하 화환이 결혼식장 전체를 삼킬 만큼 많이 들어왔다.
물론 최강철로 인한 것이었다.
수많은 기자와 하객들.
하객들은 정재계는 물론이고 언론, 문화, 체육 등 어느 분야에 특정되지 않았다.
그동안 최강철이 거미줄처럼 인맥을 만들어온 것이 막내 누나의 결혼으로 인해 폭발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김도환이 은밀하게 다가온 것은 누나의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떠날 때였다.
“회장님, 오늘 3차로 6명의 의원들이 대한정의당에 합류합니다. 그들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할 겁니다.”
“그럼 총 몇 명이 되는 거죠?”
“13명입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가담시키십시오. 지금까지 간을 본 거라면 이제부터는 폭발시켜야 합니다.”
“그럼 5차에서 마무리하고 2회에 나눠서 남은 인원을 전부 입당시키겠습니다.”
“그러세요.”
“그 인원이 전부 가담하면 대한정의당은 원내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지금 현재는 정우석 의원이 당 대표를 맡고 있는데 인원이 많아지면 조직을 재정비해야 됩니다. 오더를 내려주시죠.”
“정우석 의원을 당 대표로 하시고 민인식 의원을 원내 대표로 꾸미세요. 나머지 직책들은 당규에 따라 두 분이 상의해서 정하는 걸로 하십시오.”
“당원들은 어떻게 합니까?”
“대정당 의원들을 총가동하시고 필요하면 방송국과 신문사에 홍보도 때리세요. 진정한 힘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국민들의 지지가 없다면 대정당은 뿌리가 약한 나무에 불과합니다. 제우스는 그들이 당원들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제우스의 황규태는 팀원인 손주인과 함께 예식장 주변을 감시하다가 이상한 놈들을 발견하고 계속 주시했다.
정철호가 이끄는 특수 팀은 최강철이 이렇게 대중에 노출될 때는 10명이 경호 임무를 맡는데 근접 경호에 5명, 외곽 경호에 5명이 배치되었다.
황규태와 손주인은 나머지 세 명과 최강철 주변 30m 거리에서 움직이며 이상한 자들이 있는지를 수시로 살피다가 5명의 수상한 사내를 발견했다.
“형님, 저 새끼들 뭐 하는 놈들일까요?”
“흐음, 시선이 보스로 향하지 않고 있어. 목표가 보스는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신경이 거슬리는군요?”
특전사 출신인 손주인이 자신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놈들을 노려보자 황규태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황규태는 해병대 특수수색대 출신이었고 그의 주특기는 요인 암살이었다.
그랬기에 누구보다 경호에 최적화된 사람이기도 했다.
“주인아, 보스는 아닌데 보스 주변을 따라오고 있어. 아무래도 저 새끼들 저분을 노리는 것 같다.”
“서지영 씨 말입니까?”
“그래.”
“저분을 왜요? 저분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 분 아닙니까. 어제 들어왔는데 저분을 노릴 이유가 있을까요?”
“저 중간에 서 있는 놈 보여?”
“예.”
“그리고 저놈, 저 새끼들 눈알이 자꾸 서지영 씨 쪽으로 돌아가잖아.”
“흐음, 난 서지영 씨가 예뻐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네요. 어쩌죠?”
“일단 실장님께 보고하자.”
“먼저 때려잡지 않고요?”
“이 자식아, 우리가 깡패냐? 우린 회사원들이야. 감시한다고 무조건 때려잡을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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