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 * *
대선은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진흙탕 싸움으로 변해갔다.
한국 정치의 민낯은 너무 한심해서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상대에 대한 비방과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이 주 전략이었고 대한민국의 미래와 국민들의 행복은 뒷전으로 밀렸다.
어이없는 일이었으나 정치권의 전략은 국민들 속으로 아프게 파고들었다.
참으로 지랄 맞게 대한민국 국민들은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정치인들의 권모술수에 놀아나며 그 더러움에 잔뜩 물들어 버렸던 것이다.
영남과 호남이 팽팽하게 대립하며 원수처럼 서로를 적대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서로의 이웃에게 이빨을 드러내도록 만들어 버린 정치인들.
그들은 자신과 당의 이익을 위해 그런 파렴치한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결국 대한민국 전체를 흔들었던 대통령 선거는 집권당 후보가 승리했다.
수십 년 동안 민주화를 외쳤으나 끝내 대통령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군부 정권과 손을 잡은 사람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면 좋겠습니까?”
“무소속 의원들이 먼저 움직여 분위기를 잡으세요. 선두는 정우석 의원입니다.”
“명분은요?”
“대선에서 보여준 양당의 행태에 극도의 절망을 느꼈다는 점과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당리당략에 얽매이지 않는 정당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걸로 하죠. 지역감정을 없애고 오직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일한다는 슬로건이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1차적으로 무소속 의원들 5명을 창당 발기인으로 움직인 후 그다음에 나머지 무소속과 야당, 그리고 여당 의원까지 순차적으로 합류시켜 파괴력을 키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걸리겠군요. 우리가 움직이면 폭탄이 터진 것처럼 시끄러워질 겁니다. 아마 양당의 충격이 클 겁니다.”
“그렇겠죠.”
최강철이 김도환의 말을 받으며 씨익 웃었다.
당연한 말이다.
정우석을 비롯해서 ‘대한정의당’에 가담한 사람들은 국민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여당이나 야당에서는 눈엣가시처럼 여긴 사람들이었으나 확고한 정치 철학과 뚜렷한 신념으로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청문회나 국감에서 날카로운 질문으로 국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만들며 스타로 부각된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김도환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묻기 위함이었다.
“회장님은 어쩌실 겁니까. 회장님의 입당이 ‘대한정의당’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입당 시기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저는 입당하지 않을 겁니다.”
“예?”
“저는 당분간 입당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한정의당’은 회장님이 만든 건데 회장님이 입당하지 않는다면 어쩌란 말입니까?”
김도환이 거품을 물었다.
어쩌면 그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정당을 만드는 것은 상당한 돈이 필요했고 그 대부분의 비용을 ‘제우스’ 쪽에서 부담할 예정이었다.
물론 극비리에 움직이겠지만 ‘제우스’의 실질적 주인인 최강철의 존재는 국회의원 상당수가 인식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최강철이 가지고 있는 명성은 ‘대한정의당’의 입장에서 날개를 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그의 파괴력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최강철의 태도는 완강했다.
“사장님,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대한정의당’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 기준에 32명이나 되는 의원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정치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주인입니다. ‘대한정의당’은 대한민국 정치의 미래를 위해 움직이는 모두가 주인이 되었을 때 진정한 힘을 얻게 될 거에요. 저는 그 다음에 입당하겠습니다. 그들이 치열하게 싸우며 힘을 길렀을 때 얌체처럼 올라탈 생각입니다. 어때요, 제 생각 괜찮죠?”
“회장님!”
“왜요 너무 약삭빠른가요?”
“아뇨… 좋은 생각이십니다.”
* * *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한규복은 카메라를 메고 급히 사무실을 튀어 나갔다.
무소속인 정우석 의원이 중대 발표를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선이 끝난 지금 대통령의 미국 순방과 부정 비리 척결 등 굵직한 정치 이슈들이 계속 터져 나오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사실 정우석 의원의 기자회견은 그리 커다란 관심을 끌어모으지 못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 세력을 끌어모아 창당을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우석 의원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꽤 높았고, 대선 기간 중에 여야의 대통령 후보들에게 진정한 대통령으로서 자격이 부족하다며 정책의 부재에 대해 계속해서 쓴소리를 쏟아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한심한 이야기다.
독고다이로 움직이는 그에게는 정치 세력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창당하겠다는 말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기자회견장에 들어서자 10여 명의 기자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왔기 때문에 시간이 임박하기 전에 간신히 도착했는데도 인원이 겨우 10여 명에 불과했다는 건 그만큼 정우석 의원의 발표에 관심이 적다는 뜻이었다.
“선 기자, 무슨 일이야?”
“나도 몰라. 하도 어이없는 정보라서 확인을 해봐야 돼.”
먼저 와 있던 중앙일보의 선병일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척 봐도 바쁜 와중에 이곳까지 온 게 마땅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창당한다면서?”
“응, 요새는 개나 소나 전부 다 창당한다네.”
“정우석 의원이 꽤 인기가 있지만 혼자서 무슨 창당을 해? 이거,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냐?”
“무슨 속?”
“관심이지. 요즘 한동안 정우석 의원은 언론에 노출된 적이 없잖아.”
“한 기자, 아직도 넌 정 의원을 모르냐? 정 의원은 쇼나 하면서 언론에 노출되려고 한 적이 없어. 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온 거야. 너도 그래서 온 거 아냐?”
“그렇긴 하지.”
“들어보면 알겠지. 무슨 말을 하나.”
선병일이 시간을 흘끔 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문이 열리며 정우석 의원이 보좌관과 함께 들어오는 게 보였다.
여전하다.
양복을 입었지만 늘 그렇듯이 그가 입으면 폼이 안 난다.
고급 양복이 아니었기에 그런 면도 있었지만 그는 볼 때마다 옆집 아저씨를 연상시켰다.
물론 말투도 마찬가지다.
“기자님들, 오래 기다리신 건 아니죠?”
“늦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전부 모인 것 같은데 말씀해 주십시오.”
구석 쪽에 앉아 있던 경향일보의 임철영이 주절거렸다.
그 역시 자꾸 시계를 보고 있었는데 2시간 후에 청와대 정무수석이 부정 비리에 대한 사정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시간들 없으신 것 같으니까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정우석은 미리 준비해 놓은 기자회견문을 단호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현재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들과 한심한 정치 행태에 맞서 진정으로 국가를 위하는 정당을 만들겠다는 포부였다.
미리 들었던 내용이었기에 수첩에 연설문의 주요 내용을 긁적거리며 쓰고 있는 기자들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된 것은 정우석 의원이 연설문을 전부 읽었을 때였다.
“정 의원님, 창당을 혼자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동조하고 계시는 의원님들이 있는 건가요?”
“저 혼자 정당을 만들 수 있나요. 당연히 있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그때서야 기자들의 얼굴이 달라졌다.
그들은 정우석이 혼자 창당한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역 의원이었으니 떨거지 몇을 데리고 창당을 할 수 있지만 그건 현재의 정치판에 아무런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
대부분 창당에 참여하는 자들은 다음 선거에 얼굴이나 내비치기 위해 달려드는 자들뿐일 테니 창당해 봤자 무소속으로 움직이는 지금이나 달라질 게 없다.
하지만 현역 의원들이 가세한다면 이야기가 확실하게 달라진다.
“의원님, 그럼 몇 분이나 되십니까. 실명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저희가 창당을 하겠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추후 창당에 대한 과정에서 그분들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몇 명이나 되는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 현재는 저를 포함해서 5명입니다. 하지만 저와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여럿 있기 때문에 더 늘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씀 정말입니까!”
정우석의 발언에 지금까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기자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손을 들면서 소리를 질러댔는데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판이 컸기 때문이었다.
정우석은 기자회견을 발표한 후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켜 나갔다.
창당 발기인에는 그를 포함한 현역 국회의원 5명과 각 분야의 명망 있는 인물들이 20명이나 가담했는데, 그중에는 서울대의 윤문호 교수와 채철표 교수가 포함되었고 총선에서 아깝게 탈락한 정치인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대박이다.
정우석 혼자만도 충분히 파괴력이 있는데 무소속 국회의원들인 이병창, 허윤회, 지석훈, 박훈도가 가세하자 언론의 눈이 한꺼번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모두 기존 정치판의 더러움에 신물을 내며 무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더불어 창당 발기인으로 가담한 사람들의 면면이 굉장히 화려했기 때문에 ‘대한정의당’의 출현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이 되어버렸다.
그랬기에 기자들은 ‘대한정의당’의 창당을 연신 방송을 타고 있는 대통령의 행보와 경제계 비리와 함께 주요 이슈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커피숍에서 만난 조선일보의 한규복과 중앙일보의 선병일은 언론 쪽에서 봤을 때 찰떡궁합이었다.
둘은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며 한발 빠른 뉴스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다른 신문들도 이런 공동체를 형상하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선 기자, 뭐 더 나온 거 있어?”
“있다.”
“뭔데?”
“아무래도 이성준 의원이 가담할 것 같아. 어제 직접 만났는데 뉘앙스가 이상해.”
“뭐라고 했는데?”
“대한정의당의 정치 이상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한다고 하더구만. 그래서 슬쩍 물어봤더니 여건이 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더라.”
“립 서비스 아냐. 그는 야당의 중진이잖아?”
“그러니까 놀라운 일이지. 넌 뭐 없어?”
“씨발, 난 정말 큰 걸 가지고 왔다.”
한규복이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내놓기 아깝다는 듯 입맛을 쩍쩍거리자 선병일의 몸이 바짝 다가왔다.
그는 빨리 말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죽일 것 같은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여당 속의 야당, 민인식 의원!”
“그 사람이 왜?”
“아무래도 민인식 의원의 행동이 이상해. 조만간에 ‘대한정의당’ 쪽으로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무슨 개소리야. 그 사람이 비록 입바른 소릴 잘해서 왕따를 당하지만 그쪽에서 잔뼈가 굵었어. 더군다나 다시 집권한 여당의 프리미엄을 버리고 가시밭길을 왜 걸어?”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민 의원한테 물어야지.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거 아니겠어?”
“근거는?”
“어제 민인식이 정우석 의원과 비밀리에 회동했어. 이건 그쪽에 있던 사촌 동생 놈이 보내온 정보다. 이 사실은 아무도 몰라!”
“허어, 이거 정말 미치겠네. 야, 한 기자, 뭔가 이상하지 않냐?”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씨발, 이거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정치판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단 말이야. 느낌이 싸해.”
“나도 이상하긴 한데 조금 기다려 봐야 해. 우리나라 정치판, 뻔하잖아. 그 나물의 그 밥들이 지들 밥그릇을 위해 치고받고 싸우는데 뭐가 변할 게 있겠어? 그리고 아직까지 나온 게 없으니까 더 지켜봐야 해.”
“그래도 뭔가 있는 것 같다. 꼭 시한폭탄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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