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최강철의 핵폭탄급 발언에 당황했던 대한민국은 시간이 하루 지나자 환희와 투지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최강철이 헌즈를 꺾고 슈퍼 웰터급 챔피언에 오른 것을 특종으로 뿌렸고, 방송에서는 경기 장면을 무한 반복 해서 내보내며 국민들의 시선을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모았다.
여론을 주도한 것은 방송이었다.
최강철의 경기를 위성중계한 KBS에서는 전문가들을 초빙해서 레너드와 최강철의 전력을 분석했는데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간절한 희망과 자신감을 끌어 올리기 위한 의도적인 방송이었다.
국민들의 염원을 충족시키고 헌즈전을 승리로 이끈 여세를 몰아 국민들로 하여금 헌즈전 때와는 다른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목적도 함께 담겨 있었다.
헌즈전이 결정되었을 때 전 국민이 걱정과 우려로 인해 사회적인 분위기가 한동안 침체되어 많은 문제점이 생겼다.
사회 범죄가 폭증했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번졌었다.
다행스럽게 최강철이 직접 텔레비전에 출연해 승리를 확신하면서 그런 현상은 점차 가라앉았으나 다시는 그런 문제가 일어나게 방치할 수는 없었다.
KBS에 출연한 복싱 전문가 최문석은 방송에서 두 사람의 대결을 이렇게 예상했다.
“레너드 선수와 최강철 선수는 비슷하면서도 완벽하게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너드 선수의 특징은 아웃복싱을 펼치지만 수시로 상대방의 균형을 무너뜨린 후 휘몰아쳐 KO을 이끌어 냅니다. 상대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그의 경기 스타일은 너무나 까다로워 시합 당사자들은 유령과 싸웠다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공격 무기인 스트레이트와 훅, 어퍼컷, 공격을 리드하는 잽까지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아웃복싱을 펼치면서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는 방어 기술 역시 복싱 역사상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누가 이기냐는 질문을 한다면 최강철 선수를 선택할 것입니다. 최강철 선수의 공격력은 레너드 선수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26전을 모두 KO승으로 끝낼 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최강철 선수는 전부 다른 스타일의 선수들과 싸우면서 특유의 태풍 같은 인파이팅으로 모두 KO승을 이끌어냈습니다. 테크닉 면에서도 레너드에 뒤지지 않습니다. 최강철 선수의 펀치는 완벽에 가까운 타이밍에서 목표점을 타격하는 능력이 발군입니다. 더군다나 방어력과 맷집도 레너드에 못지않습니다. 더군다나 최강철 선수는 헌즈라는 큰 산을 무너뜨리며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습니다. 레너드가 재기전을 통해 어떤 기량을 선보일지 모르나 3년이란 시간이 흘렸으니 저는 최강철 선수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레너드를 꺾을 것이라 자신합니다.”
* * *
최강철은 경기가 끝난 후 5일 동안 라스베이거스에서 머물며 서지영과 시간을 보냈다.
더 있고 싶었으나 기말고사를 봐야 했고 복싱 협회에서는 국민들이 목 빠지게 기다린다며 난리를 쳤기 때문에 더 머물 수가 없었다.
윤성호는 시합이 끝나자 황인혜와 함께 뉴욕으로 날아갔지만 이성일은 같이 귀국하겠다며 눈치 없이 남았다.
“시합 끝낸 놈은 몸조리를 잘해야 해. 너무 힘쓰면 다음 시합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트레이너인 내가 감시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러니까 너무 불만 갖지 마라.”
핑계다. 그리고 금방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주저앉았을 뿐이다.
놈은 감시를 한다면서 말없이 사라졌는데 카지노에 드나드는 게 분명했다.
서지영과 함께 라스베이거스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즐겼다.
비록 이틀 동안은 끙끙 앓느라 밖에 나가지 못했지만 3일이 지난 후부터는 퉁퉁 부은 얼굴을 시꺼먼 선글라스로 가리고 관광지를 찾아다녔다.
이것도 습관인 걸까.
시합이 끝나고 서지영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행복해지고 있었다.
“자기야, 우리 저기 가볼까?”
“카지노?”
“응, 난 저런데 한 번도 가보지 않았어. 궁금해.”
“그럼 가보자.”
서지영이 가리킨 곳을 향해 최강철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무엇이든 해준다.
전생의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피닉스호텔의 카지노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입구부터 로마의 궁전에 들어서는 것처럼 아름다운 조각상이 늘어서 있었는데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모습인 것 같았다.
더불어 온갖 조명으로 치장되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돈을 뺏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눈요기는 해줘야겠지.
서지영은 정말 카지노가 처음이었는지 눈을 남산만 하게 만들고 어린아이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아휴, 사람들 봐. 꼭 시장터에 온 기분이야.”
“한번 해볼래?”
“아니, 그냥 구경만 할 거야. 난 도박 같은 거 무서워.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한순간에 탕진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야.”
“건전한 생각을 가졌구나. 그럼 여긴 왜 왔어?”
“궁금하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자기도 보다시피 엄청 화려하잖아. 여자는 화려한 걸 좋아한다고요.”
“하하, 그런가. 그럼 구경만 하자.”
최강철은 그녀를 데리고 카지노 여지저기를 돌아다녔다.
슬롯머신, 블랙잭, 바카라 등등 수많은 종류의 게임이 카지노 전체를 차지한 채 벌어지고 있었는데 게임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천천히 걸으며 게임이 벌어지는 곳마다 돌아다녔다.
여러 번 와봤지만 언제 봐도 카지노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카지노에는 3가지가 없다고 한다.
바로 창문, 시계, 그리고 거울이다.
시계가 없는 이유는 고객들이 시간을 알 수 없게 만들어 게임에 빠져들도록 하기 위함이며, 거울이 없는 것은 자신의 피폐해진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창문이 없는 것은 어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극대화해서 고객들의 호주머니를 완벽하게 털기 위함이었다.
천천히 걷던 최강철의 눈이 번쩍 빛난 것은 사람들의 탄식이 터진 곳에서 이성일의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 그리고 초췌하게 변해 버린 얼굴.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고통과 후회, 번민에 빠진 모습으로 허탈하게 앉아 있는 친구 놈의 모습을 본 순간 최강철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졌다.
놈은 라스베이거스에 올 때마다 카지노에 한동안 머물었는데 여러 번 돈을 땄다며 자랑을 하곤 했다.
놈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선글라스를 꼈고 모자까지 눌러썼기 때문에 금방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의 정체가 허리케인이란 걸 알아보고는 전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최강철의 눈은 사람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이성일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다가가 놈의 어깨를 두드렸다.
뒤늦게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한 이성일의 눈이 최강철을 확인하고 당황함으로 물들어갔다.
그는 여기서 최강철을 보게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날 감시한다는 놈이 아주 카지노에서 사는구나. 땄냐?”
“…….”
대답을 하지 못한다.
몰라서 물은 게 아니다. 다만 놈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켜 주고 싶어서 물었을 뿐이다.
“얼굴이 안 좋은 걸 보니까 잃은 모양이네. 얼마나 잃었어?”
“그냥… 조금 잃었어.”
“그럴 수도 있지. 심심한데 나도 같이해야겠다. 저기, 미안하지만 자리 좀 양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예… 그럼요.”
최강철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자 30대 중반의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상대가 허리케인이라 걸 안 순간부터 눈을 떼지 못했는데 자신에게 말까지 붙이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최강철이 자리에 앉자 중단되었던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게임은 블랙잭이었고 룰은 무척 간단했지만 실력이 가장 필요한 게임이라는 게 도박사들의 평이었다.
피닉스호텔 카지노의 블랙잭 리밋 금액은 오백 달러였다.
회당 최대 베팅 금액이 오백 달러란 뜻이고 스플릿을 할 때는 그 배까지 가능했지만 스플릿이 나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판돈으로 봤을 때 5일 동안 이성일이 맥시멈으로 잃은 돈은 많아봐야 30만 달러였을 것이다.
물론 일반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돈이다.
그러나 그 정도 돈을 잃으려면 인생에서 가장 재수 없는 일들이 반복해서 발생했을 때나 생길 정도로 운이 없어야 가능하다.
블랙잭의 기본 승률이 최소 47%를 넘기 때문이었다.
최강철은 지갑에서 오백 달러를 꺼내 칩으로 바꿨다.
그가 바꾼 것은 10달러짜리 칩 50개였다.
게임이 시작되자 이성일은 자신의 패에 주저하지 않고 500달러를 걸었다.
손이 나가는 속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놈은 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베팅한 게 분명했다.
놈의 자리 앞에는 백 달러짜리 골든 칩이 30여 개 있었는데 그 자리에 얼마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이성일의 패는 하트3이었으니 블랙잭으로 봤을 때 최악의 패였다.
반면에 10달러를 건 최강철의 패는 스페이드 퀸이었다.
블랙잭은 숫자 10부터 그림 카드는 전부 10으로 계산하는데 21과 근접한 숫자를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그림 카드에 에이스.
1과 11를 함께 쓸 수 있는 에이스가 그림 카드를 만나면 블랙잭이 된다.
따라서 최강철의 그림 패는 상당히 좋은 것이었다.
결국 최강철은 이번 게임에서 10달러를 땄으나 이성일은 500달러를 잃었다.
그 후 오랫동안 최강철은 매 게임마다 10달러를 걸었다.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이다.
그럼에도 그는 뒤에 서 있던 서지영은 물론이고 구경꾼들과 호들갑을 떨면서 게임을 즐겼다.
시간이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이성일은 또다시 2만 달러를 잃었다.
여전히 그는 재수가 없었고 만 달러짜리 수표에 여러 번 사인을 해야 했다.
이성일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그러져 갔다.
돈을 잃어서가 아니다.
옆에 앉아 10달러씩 판돈을 걸며 즐거워하는 친구 놈의 모습에서 자신의 자화상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놈은 자신이 도박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쓸데없이 1시간이 훌쩍 넘을 동안 10달러씩 걸면서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왜 한 번 시합에 몸값이 2천만 달러에 달하는 슈퍼스타 허리케인이 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면서 옆에 앉아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놈은 10달러씩 걸면서 웃고 떠들며 카지노의 무서움을 알려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성일은 자신이 건 500달러짜리 골든 칩이 딜러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며 얼굴을 손으로 쓸어냈다.
그런 후 쓴웃음을 지으며 최강철을 바라보았다.
“강철아, 그만 가자.”
“왜, 한창 재밌는데?”
“그만 가자. 내일 떠나려면 마지막 날이니까 힘 좀 써야 되잖아.”
놈이 서지영을 힐끗 바라보면서 흰소리를 했다.
이미 놈의 목소리는 평상시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렇긴 하지. 오늘 힘 안 쓰면 내일 얼굴에 손톱 자국 생길걸?”
“강철 씨!”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지영이 소리를 빽 지르자 두 놈이 동시에 비실거리며 웃었다.
먼저 일어난 건 최강철이었다.
“성일아, 가자.”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내가 너한테 추적 장치를 달아놨다. 그러니까 넌 엉뚱한 짓 하면 전부 나한테 걸리게 되어 있어.”
“내 몸에 칩 같은 거 심어놨냐?”
“아니, 네 정신에 심어놨지. 나한테서 도망가지 못하게.”
“지독한 놈.”
“성일아, 이런 거 계속하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울리게 돼. 나는 네가 이제 이런 거 그만했으면 좋겠다.”
“알아. 네가 왔을 때부터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꾼 거 같구만. 도박이 무섭다고 하더니 제대로 맛을 봤어.”
“그럼 됐다. 가자.”
“그래.”
다 죽을 것 같았던 이성일의 얼굴에서 밝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돈, 그게 무슨 상관일까.
나에게는 이런 친구가 있는데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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