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99화 (199/308)

[199]

최강철은 순순히 이성일의 대가리를 받아들였다.

이놈이 얼마나 이 짓을 하고 싶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딱딱한 대가리를 가랑이에 끼우고 링을 돌았다.

링에서 싸운 것은 자신이었지만 이성일은 링 사이드에서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싸웠을 것이다.

이런 게 행복이다.

자신을 위해 울어준 윤성호와 지금 대가리를 자신의 가랑이에 넣은 채 미친놈처럼 링을 뛰어다니는 이성일이 있기에 자신은 너무나 행복했다.

그리고 이 여자.

링 사이드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는 서지영.

바보처럼 그녀도 울고 있었다.

왜 전부 이렇게 좋은 날 울고 있는 것일까.

이성일의 귀를 잡아당겨 캔버스에 내려선 후 서지영에게 다가가 키스를 해주었다.

“지영 씨, 밑에서 조금만 기다려. 곧 끝내고 내려갈게.”

“응.”

서지영을 자리로 돌아가게 만든 후 최강철은 반대쪽 코너에 앉아 있는 헌즈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 후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그를 향해 인사를 했다.

“훌륭한 경기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저지른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허리케인,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너 같은 선수를 몰라보고 자만을 했으니 내가 진 게 당연해. 너한테 부탁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기회를 다오. 다시 한번 너와 싸우고 싶다.”

“그러십시오. 하지만 순서를 기다리셔야 될 것 같습니다. 아직 제가 싸워야 할 상대들이 많이 남았거든요.”

“알았다. 기다리겠다.”

“감사합니다.”

최강철이 손을 내밀자 헌즈가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적의가 없다.

그리고 상대의 승리를 축하해 주는 따뜻함이 그의 손에 담겨 있었다.

이래서 최고의 선수구나. 이래서…….

슈퍼웰터급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두른 후 윤성호, 이성일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최강철의 타이틀 획득에 대한 기쁨을 마음껏 표현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았다.

특히 돈 킹은 그 뚱뚱한 몸으로 다가와 끌어안았는데 얼마나 힘을 줬는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허리케인, 네가 있어서 난 정말 행복하다. 너는 금세기 최고의 복서다.”

그의 표정에서 진심이란 게 느껴졌다.

내가 금세기 최고의 복서라고?

아닙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그의 기쁨을 훼손시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최강철은 사람들의 축하 인사가 끝나자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차고 링 사이드를 돌며 관중들에게 다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관중들은 거의 대부분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행사.

관중들은 최강철이 경기가 끝날 때마다 터뜨렸던 폭탄선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링 아나운서가 다가와 옆에 서자 관중들의 입에서 또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최강철로 인해 새로 생겨난 문화다.

대부분의 관중은 시합이 끝나면 자리를 뜨기 위해 급하게 움직인다.

빨리 나가야 차를 빼내는 데 유리했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혼잡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강철의 시합만큼은 예외였다.

“허리케인, 승리를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불과 3라운드의 짧은 시합이었지만 모든 관중이 만족할 만한 경기였습니다. 양 선수가 지닌 역량을 모두 쏟아 부은 경기라고 생각됩니다. 헌즈 선수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헌즈 선수는 비록 패배했지만 복싱 영웅으로서 조금의 손색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펀치가 나올 때마다 저는 두려움으로 힘든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그가 지닌 모든 기술은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위력을 가진 것들이더군요. 저는 그가 정말 훌륭한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승리의 요인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헌즈 선수가 저의 접근전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것이 주원인입니다. 그는 저의 스피드를 간과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십시오. 지금 관중들이 남아 있는 건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링 아나운서는 알아서 최강철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고 뒤로 물러났다.

중계방송을 했던 모든 카메라가 최강철과 링 사이드에 있던 레너드, 그리고 마빈 헤글러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최강철은 경기를 승리로 이끌면 언제나 폭탄선언을 해왔기 때문에 전 세계 언론이 이 순간 엄청난 긴장감에 빠져들었다.

“관중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이 시합을 보며 저를 응원해 주신 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저의 승리를 간절하게 기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사랑과 존경을 담아 고개 숙여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최강철은 잠시 말을 끊고 카메라를 향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방송으로 이 장면이 그가 말한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알기에 한 행동이었다.

그런 후 최강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링 사이드로 걸어갔다.

그의 걸음에 따라 수많은 카메라의 각도가 틀어졌다.

최강철이 걸음을 멈춘 곳은 슈거레이 레너드가 앉아 있는 곳이었다.

불세출의 영웅.

테크닉의 교과서이자 금세기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리며 웰터급 통합 타이틀을 6차례나 방어했던 극강의 챔피언, 슈가레이 레너드 말이다.

“슈거레이 레너드, 관중들은 제가 다음 상대로 누구를 원하는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시합하기 전 들었는데 당신이 곧 재기전을 한다더군요. 저는 관중들께 제 다음 상대로 당신을 지목하겠습니다. 물론 오래 쉬었으니 제대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오십시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아름답고 화창한 날에 저에게 와주십시오. 당신과 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과 나의 경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부탁드립니다, 레너드 씨. 저의 제안에 대답을 해주시겠습니까?”

최강철이 자신의 말을 끝내고 물끄러미 바라보자 모든 카메라가 슈거레이 레너드를 향해 돌아갔다.

다가온 최강철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던 레너드가 마이크를 든 것은 카메라의 초점이 모두 자신에게 왔을 때였다.

“허리케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내가 은퇴를 한 것은 더 이상 나를 상대할 선수가 없다는 외로움과 허망함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허리케인은 나의 투지를 다시 불러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기량을 가졌더군요. 허리케인, 당신과의 대결에 응하겠소. 좋은 날, 내가 다시 예전의 기량을 회복했을 때 그때 도전하지!”

슈거레이 레너드가 굳어졌던 얼굴을 풀면서 밝게 웃는 순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관중들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부 일어서서 기립 박수를 쳤는데 그 함성에는 설렘과 흥분이 잔뜩 담겨 있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단 말인가.

꿈의 대결.

정말 이 두 사람의 시합이 결정되면 금세기 최고 복서들의 싸움이 된다.

시저 팰리스 호텔 특설 링을 찾아온 전 세계의 기자들이 미친 듯이 플래시를 터뜨렸다.

또다시 터져 나온 폭탄선언과 그리고 응전.

이런 걸 보고 기자들은 ‘드림 드로잉 매치’라는 용어를 쓴다.

* * *

승리에 대한 광란의 시간이 지나고 최강철의 인터뷰가 나오는 순간 잠실 야구장에 몰려 있던 25,000명의 관중은 숨을 죽이며 그의 말을 들었다.

볼수록 자랑스럽다.

유창한 영어로 승리에 대한 소감을 말하던 최강철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인사할 때는 쩌렁쩌렁한 한국어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잠실 야구장을 뒤흔드는 성원.

그의 감사 인사가 전해지는 순간 모든 응원단이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다.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응원단의 박수와 함성이 멈춘 것은 인사를 마친 최강철이 동쪽 링 사이드를 향해 걸어갔을 때였다.

뭔가 거대한 먹구름이 그쪽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레너드, 나는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정말 미친다.

최강철의 도발과 레너드의 화끈한 응전이 이어지자 잠실 야구장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전부 뒤집어졌다.

산 너머 산이라더니 헌즈라는 거대한 괴물을 물리치자마자 또 다른 거센 해일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양 선수의 이야기를 듣고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들의 감정이 어떤 건지 정확하게 인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헌즈와의 대결로 인해 얼마나 조바심을 내면서 긴장과 초조감을 느꼈단 말인가.

그런데 이제 슈거레이 레너드와 싸운다고 하니 심장이 벌렁거려 제대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든 중계방송이 끝났어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강철이 던진 도전은 사람들의 행동을 제어할 만큼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가슴이 저절로 답답해서 많은 사람이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김영호와 류광일은 습관적으로 소주병을 찾았으나 이미 6병이나 가져온 소주병은 내용물이 텅텅 비어 그들의 발밑에서 뒹굴고 있었다.

“아, 미치겠네. 몇 병 더 사올 걸 그랬다.”

“류 대리, 아무리 생각해도 강철이가 미친 거 같다.”

“왜?”

“난 강철이 정신 구조가 의심스러워. 쟨 정말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놈인 것 같아.”

“우리와 똑같으면 저 자리에 가 있겠냐?”

“하아, 레너드라니. 레너드는 무적 행진을 구가하다가 은퇴했어. 그것도 지가 스스로 통합 챔피언 벨트를 벗어던지고 떠날 정도로 대단한 놈이었단 말이야. 떠난 이유가 뭔지 알아? 자신의 적수가 더 이상 없다면서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떠난다고 했다니까!”

“알아, 하지만 너도 강철이가 헌즈 꺾는 거 봤잖아. 강철이가 충분히 이길 수 있어. 레너드는 은퇴한 지 거의 3년이나 되었다고!”

류광일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빽 질렀다.

그는 김영호가 레너드를 최강철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말을 계속하자 절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김영호의 말은 그의 표정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레너드가 3년 쉬었다고 기량이 변할 것 같아? 강철이도 1년에 한 번 시합을 했어. 레너드 정도의 레벨은 상식이 통하지 않아. 그는 금세기 최고의 테크니션이자 무적의 복서야.”

“아, 씨발. 난 그런 거 몰라. 하여간 우리 강철이가 무조건 이겨. 헌즈도 이겼잖아!”

“헌즈는 레너드도 이겼다.”

“한 번은 무승부였어.”

“그때는 컨디션이 최악인 상태에서 싸웠다고 대문짝만하게 뉴스에 나왔었지. 레너드가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헌즈는 또 쓰러졌을 거야.”

“넌 우리 편이냐. 레너드 펀이냐? 정말 신경 쓰이게 만들래!”

“사실이 그렇다는 거야. 저번에 링지를 보니까 레너드가 곧 재기전을 갖는다고 하더라. 지켜봐야 되겠지만 난 헌즈보다 레너드가 더 어려운 상대라고 생각해.”

“왜?”

“레너드는 결점이 없기 때문이지. 헌즈는 두 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어. 바로 턱이 약하다는 것과 후반으로 갈수록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헌즈가 진 경기들이 전부 KO패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하지만 레너드는 달라. 무패의 전적으로 은퇴할 때까지 그는 모든 선수를 압도하는 경기력을 보여줬어. 못 치는 펀치가 없고 체력도 강해서 15라운드를 뛴 게 10번도 넘어. 그래서 레너드를 전설이라고 부르는 거다. 대부분의 전문가가 헌즈보다 레너드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야.”

김영호가 전문가 뺨치는 식견으로 유창하게 말을 이어나가자 그들의 양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학생들과 회사원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레너드라면 그들도 이미 알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기량을 선보이며 연전연승을 거두던 불세출의 복서였다.

그런 복서가 재기해서 최강철과 싸운다고 하니 저절로 심장이 떨려왔다.

결국 막무가내로 버티던 류광일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져 갔다.

김영호는 복싱에 관해서는 전문가였기 때문에 선수들의 프로필은 물론이고 장단점까지 훤히 꿰고 있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다면 정말 그런 것이다.

“협박하지 마라. 심장 떨린다고!”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다. 레너드가 두 번 정도 시합을 하고 나면 강철이와 예측할 수 없는 승부를 벌이게 될 거야.”

“아이고, 오늘부터 발 쭉 뻗고 잠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더니 이게 웬일이래. 강철이 저놈은 왜 이런 짓을 자꾸 벌여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네.”

류광일이 바닥에 구르고 있는 빈병을 들어 겨우 남아 있는 소주 몇 방울을 쪽쪽 빨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김영호가 두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강철이는 복싱 역사를 새로 쓰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전설적인 영웅들을 모두 꺾고 천하를 통일하는 최강의 군주가 되고 싶은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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