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 * *
“어때?”
“역시 쉽지 않아요. 이번에는 기습이었어요. 저놈 정말 방어가 좋네요.”
“그래도 지금까지는 좋다. 저 새끼 들어갈 때 머리를 흔들었어. 복서가 머리를 흔든다는 건 대미지가 있다는 증거야. 너도 알잖아?”
“두드릴 만큼 두드렸습니다. 하느님도 계속 두들기면 열린다는 명언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저놈 방어도 곧 깨질 겁니다.”
“거리가 확보된 상태에서는 절대 맞으면 안 돼. 알지?”
“그럼요.”
경기 시작 전에는 송장을 치르러 온 사람처럼 긴장했던 윤성호와 이성일이 미친 듯이 떠들었다.
1, 2라운드를 통해 자신감을 찾았기 때문이다.
워낙 강했고 체격마저 월등하게 차이가 났기 때문에 자신들도 모르게 두려움에 물들어 있었으나 막상 뚜껑을 열자 최강철은 괴력을 발휘하며 헌즈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다.
벌써 8년 동안 부딪치며 살아왔으나 최강철의 능력은 아직까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헌즈가 괴물이라면 최강철은 악마나 다름없는 놈이었다.
최강철의 대답에 윤성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병을 들어 올리자 이성일의 입이 다시 열렸다.
“강철아, 저 새끼 네가 계속해서 복부와 얼굴을 노리니까 대가리를 뒤로 눕힌다. 레프트 훅을 몇 번 때리다가 스트레이트로 바꿔봐. 효과가 있을 것 같아.”
“좋은 생각이네.”
“어퍼컷 조심해야 돼. 절대 어퍼는 맞으면 안 된단 말이다. 그걸 맞기 시작하면 경기 흐름이 바뀔 수 있어!”
“알았어.”
최강철이 빙그레 웃으며 일어섰다.
정신없이 싸우는 자는 사고가 마비된다.
그것도 최강의 상대와 싸우다 보면 본능에 몸을 맡기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어진다.
윤성호와 이성일이 옆에 있어주는 게 그래서 필요했다.
이들은 싸우고 돌아온 자신에게 상대에 대한 정보와 날카로운 눈으로 전략을 수정시켜 주었는데 그것이 승패를 가르는 경우가 많았다.
* * *
“정 위원님, 2라운드에서 최강철 선수가 우세했습니다. 공이 헌즈 선수를 살렸는데 2라운드 어떻게 보셨습니까?”
“외형상으로는 접근전을 펼친 최강철 선수의 우세로 보일 겁니다. 경기 막판에는 클린히트까지 터뜨리며 일방적으로 몰아붙였으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죠. 하지만 심판들이 어떻게 평가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사실 2라운드는 중반까지 헌즈 선수가 유리했거든요. 중반전에도 펀치를 적중시켰지만 최강철 선수도 여러 번 당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누가 유리하다고 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최강철 선수가 헌즈 선수의 거리는 깨뜨렸잖습니까?”
“그건 상당히 고무적인 일입니다. 최강철 선수가 워낙 빠른 스피드를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문제는 헌즈의 방어력을 무너뜨리는 겁니다.”
“2라운드에서 헌즈 선수가 보여준 펀치들은 그동안 수많은 선수를 쓰러뜨린 강력한 펀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강철 선수는 그 펀치들을 대부분 피했죠?”
“최강철 선수가 선전을 펼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최강철 선수의 방어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헌즈가 펼치는 펀치들을 흘려내며 반격하는 기술들이 완벽에 가깝습니다. 지금까지 최강철 선수는 아마추어를 포함해서 프로 데뷔 후 25전을 싸우는 동안 한 번도 다운을 당한 적이 없어요. 거기에 맷집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판단됩니다. 헌즈와 같은 강펀처의 공격을 여러 차례 허용했지만 잘 견뎌내고 있잖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아… 최강철 선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3라운드가 시작됩니다. 긴장되는 순간, 최강철 선수 2라운드에서의 여세를 몰아 3라운드에서도 잘 싸워주기를 바랍니다!”
김영국이 공이 울리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서는 50대 중반의 정민철이 따라 일어서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생생한 걸 보면 자신보다 더 체력이 좋은 것 같았다.
* * *
최강철은 코너에서 걸어 나오는 헌즈의 몸을 유심하게 살폈다.
분노로 가득 찬 눈은 여전히 번들거렸고 땀에 젖은 검은 육체는 철갑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레프리가 경기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내자마자 거침없이 헌즈를 향해 다가갔다.
선공.
여전히 선공은 헌즈의 몫이었다.
헌즈는 최강철이 다가오는 순간 플리커 잽에 이은 라이트 스트레이트, 그리고 좌우 복부 공격을 연사시켰다가 마지막 순간 어퍼컷을 날려 왔다.
최강철이 그의 강력한 선제공격을 뚫고 전진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위잉!
돌고래처럼 솟구쳐 올라오는 어퍼컷의 위력은 강력함을 넘어 두려울 정도다.
더군다나 허리를 굽힌 채 자세를 낮췄기 때문에 어퍼컷에 취약점을 가지고 있어 맞으면 단방에 치명적인 대미지를 받을 수 있었다.
헌즈가 3라운드에 들어와 접근하는 최강철을 향해 좌우 어퍼컷을 난사하고 있는 건 최강철의 다운 스탠스를 깨뜨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기회와 위험이 공존한다.
헌즈의 어퍼컷이 나오는 순간 최강철의 라이트 훅이 교차되듯 그의 턱을 노렸다.
같이 때리고 맞으면 누가 이득일까?
최강철이 계속해서 생각한 것은 헌즈의 방어막을 깨뜨리기 위해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타이밍을 잡는 것이었다.
크로스 카운터.
위험하다. 그러나 충분히 결행할 이유가 있었다.
헌즈의 라이트 어퍼컷이 나오는 순간 빠져나간 최강철의 레프트 훅이 정확하게 턱에 걸렸다.
물론 최강철의 피해도 상당했다.
헌즈의 어퍼컷에 정통으로 맞는 순간 정신이 반쯤 나갈 정도의 충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물러선 건 헌즈였다.
헌즈는 최강철의 레프트 훅에 걸린 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얼굴 어디를 맞아도 정신이 반쯤 나간다.
얼굴 전체는 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일시에 사고를 정지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뇌가 마비된다는 것은 뇌의 명령을 받은 신체의 마비로 이어진다.
최강철은 자신의 다리가 허공에 붕 뜨는 충격을 받았으나 이를 악물고 뒤로 빠지는 헌즈를 추격했다.
헌즈의 상태는 자신보다 더 나쁘다는 확신이 들었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던 헌즈가 급하게 따라붙은 최강철을 향해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던지며 반격을 가해왔다.
멈추지 않는다.
슬리핑으로 스트레이트를 피한 후 헌즈의 몸통을 들이박았다.
최강철이 선택한 것은 초근접전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싸운다.
충격으로 인해 다리의 움직임이 둔해진 헌즈를 때려잡는 건 근접전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포프에 묶어놓고 폭발적인 양 훅을 휘둘렀다.
근접 거리에서는 자신이 유리하다.
팔이 길다는 것은 회전 반경이 크다는 걸 의미했고 헌즈의 팔은 약점이 노출될 만큼 충분히 길었다.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꺼내 들었다.
헌즈가 자신의 레프트 훅을 계속해서 슬리핑으로 피하자 이성일이 말한 대로 급작스럽게 더블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쐐액!
나중에 시합이 끝나면 이성일을 한번 안아줘야겠다.
계속해서 훅을 때리다가 갑작스럽게 스트레이트를 날리자 헌즈의 머리가 피하지 못하고 덜컥 뒤로 밀려나는 게 보였다.
그 순간을 이용해서 거리를 잡은 채 모든 콤비네이션 펀치를 작렬시켰다.
그에게는 최적의 거리였지만 헌즈에게는 여전히 근접된 거리였다.
점점 반격하는 횟수가 줄어들며 헌즈가 로프를 타고 뒤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오른쪽으로 달아났으나 이번에는 최강철의 레프트 훅이 그의 턱을 붙잡았다.
다리가 움직일 때도 슬리핑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이드스텝, 그것도 오른쪽으로 도는 과정에서는 아무리 운동신경이 뛰어나도 레프트 훅을 막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다.
콰앙!
정확하게 턱을 얻어맞은 헌즈가 도망가던 자세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그대로 캔버스에 나뒹굴었다.
달아오른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최강철이 앞으로 전진하자 레프리가 달려와 끌어당기며 코너로 가라고 소리쳤다.
다운을 시켰지만 주먹에서 울리는 감각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겠지만 스윙에는 손맛이라는 게 있는데, 정확하게 임팩트 되었을 때 느끼는 손맛은 쾌감을 느낄 정도로 산뜻하나 그렇지 않을 경우는 지금처럼 주먹이 은은하게 울리면서 찜찜함이 찾아온다.
바닥을 굴렀던 헌즈가 양손을 짚으며 캔버스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역시 정타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인지 펀치 드렁크에 들어가지 않은 모습이었다.
레프리가 카운터를 센 후 다시 경기를 시작하라는 사인을 보이자 최강철은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펀치 드렁크 상태는 아니었지만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었으니 여기서 끝장을 보고 싶었다.
관중들의 비명 소리가 마치 꿈결처럼 들려왔다.
그들은 자신의 공격으로 인해 헌즈가 다운을 당하자 이젠 함성에서 더 나아가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지 헌즈는 반격조차 포기하고 도망가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아, 정말 롱 다리다.
반격을 생략하고 무조건 도망치자 펀치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100m 달리기 시합이었다면 어떻게든 해봤겠지만 이건 복싱이었지 경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여유를 갖고 듀란과 허니건이 자신에게 썼던 팬케이크 스텝을 사용해서 방향을 제어했다.
링은 좁다.
누군가는 사각의 링을 약자에게 지옥이라 표현했다.
한정된 공간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에 약자는 도망갈 공간이 제약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런 말을 만들어낸 게 분명하다.
헌즈는 겅중거리며 그 긴 다리로 도망가기 위해 몸부림을 쳤으나 팬케이크 스텝을 완벽하게 피하지 못했다.
다시 헌즈를 잡은 최강철은 미친놈처럼 반격을 가해오는 헌즈의 펀치를 지금까지와 다른 컷팅과 암 블로킹으로 막았다.
위빙과 더킹, 스웨잉을 쓰지 않은 이유는 헌즈를 조금도 쉬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헐떡거리는 헌즈의 숨소리가 이제 귀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커졌고 분노를 가득 담았던 눈은 당황함으로 물들어 냉정함이 반쯤 사라진 상태였다.
헌즈, 나를 향한 너의 분노는 어디 갔느냐!
위대한 영웅, 그 영웅이란 칭호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허망한 거야.
너도, 나도, 우리 모두에게 다 마찬가지지.
최강철은 이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강철 같았던 헌즈의 상체는 그가 몸통으로 밀어내자 휘청거리며 밀리고 있었다.
이미 그는 크랩 가딩을 포기하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턱을 보호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강철의 펀치 샤워를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한 행동이다.
링 줄에 매달린 헌즈의 몸은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가여웠다.
큰 키를 가진 헌즈가 로프에 매달리자 관중들의 비명 소리는 괴성으로 변했고 경기장은 온통 그들이 내지른 괴성으로 인해 마비가 되어버렸다.
전 세계의 중계진들도 마찬가지였다.
관중들로부터 거대한 함성이 끊이지 않았기에 그들은 중계방송을 하면서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댈 수밖에 없었다.
최강철은 로프에 묶인 헌즈의 몸을 철저히 유린했다.
철통처럼 얼굴을 방어하는 상대에게 특효약은 복부 공격과 펀치가 나오는 순간 크로스 카운터를 터뜨리는 것이다.
크랩 가딩을 쓰는 자들은 복부가 약하다는 약점을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쓰는 자들의 특성이 그렇고 헌즈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강철은 미친 듯이 헌즈의 복부를 향해 펀치를 갈겨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안면이 노출되면 곧바로 안면을 향해 펀치가 올라갔다.
핀치에 몰린 상태에서도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펀치를 내고 있었으나 그것이 헌즈를 지옥으로 이끌었다.
펀치를 낼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최강철의 펀치가 그의 안면을 훑었기 때문이다.
로프에 묶인 지 불과 30초 만에 헌즈의 몸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최강철의 펀치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복싱은 때리는 자도 지치지만 맞는 선수도 지친다.
그 원인은 충격을 받는 순간 회복을 위해 신체의 전기관이 맹렬하게 칼로리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최강철은 조금씩 거리를 늘려 나가며 자신의 거리를 완벽하게 확보한 후 비틀거리는 헌즈의 안면에 펀치를 집중시켰다.
이미 복부에 많은 펀치를 맞았기 때문인지 그의 가딩이 벌어진 게 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점점 벌어진다.
펀치가 가드를 뚫고 안면에 적중될 때마다 헌즈의 몸은 더 흔들거렸고 가드의 틈도 넓어졌다.
헌즈, 이만 가라.
벌어진 가드의 틈을 향해 최강철의 송곳 같은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파고들었다.
헌즈의 머리를 직격하는 통렬한 일격이었다.
머리가 덜컥 뒤로 밀렸다가 앞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최강철의 토네이도 양 훅이 순식간에 그의 턱을 갈기고 빠져나왔다.
쿠웅!
모든 게 끝났다.
양 훅이 헌즈의 턱을 정확하게 가격한 순간, 최강철은 뒤로 물러서며 그대로 캔버스를 향해 쓰러지는 헌즈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레프리는 헌즈가 쓰러지는 장면을 보면서 카운터 대신 급하게 링 닥터를 부르며 머리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최강철은 손을 번쩍 치켜든 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헌즈를 향해 다가갔다.
미안, 헌즈.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당신은 정말 대단했다.
이렇게 힘들었던 경기는 처음이었어.
내가 경기를 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도록 만들었으니 당신은 전설로 남기에 충분한 사람이야.
이런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해줘서 정말 고마워.
진심으로 존경한다, 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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