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 * *
똑같은 길.
나는 이 길을 걸어 나갈 때마다 항상 투지를 불태웠다.
상대가 누구든 그리고 장소가 어디든 상관하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내가 목표로 했던 두 번째 상대, 킹코브라 토머스 헌즈.
그에 대한 평가를 들으며 두려움에 젖었던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한 번도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의 심장은 강철처럼 단단했고 내 체력은 지상 최강이다.
이런 자신감으로 나는 오늘도 싸울 것이다.
화려한 불빛.
경기장으로 들어서자 먼저 화려한 불빛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고 뒤이어 폭탄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최강철의 입장을 확인한 관중이 내지른 환영이었다.
그 함성을 들으며 오른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뒤를 따라오던 이성일의 손에서 깃발을 뺏어 들었다.
교민회장은 음식을 다 먹었을 때 태극기가 달린 깃발을 전해주며 경기장에 가지고 들어가 달라고 부탁했었다.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으로 인해 국민들의 정신이 좌우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태극기를 드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갖지 않았다.
웃기는 건 그가 태극기 깃발을 들고 들어가는데도 미국 관중들의 환호가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링에 올라 이성일에게 깃발을 넘겨주고 관중들의 환호에 다시 한번 팔을 들어 답례를 해주었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풀며 헌즈가 출전하기를 기다렸다.
“강철아, 훈련한 대로만 가자.”
“알았습니다. 그런데 표정 좀 풀면 안 됩니까. 계속 그렇게 있으면 링에서 확 내려갈 겁니다!”
“인마, 그게 내 맘대로 되냐.”
“하여간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이건 꼭 죽으러 가는 사람들 같잖아.”
최강철이 링에 들어와 긴장된 눈을 하고 있는 윤성호와 이성일을 바라보며 신경질을 냈다.
긴장한 건 이해하지만 너무 바짝 졸아 있는 걸 보니 이 사람들이 산전수전 다 겪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관중들 속에서 다시 한번 함성이 터지며 헌즈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담겨 있지 않았다.
어제 있었던 인터뷰에서 흥분해 날뛰던 것과는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이었으나 무표정 속에 담긴 건 바로 분노였다.
사람들의 함성을 들으며 링에 들어 온 헌즈는 관중들에게 답례조차 하지 않고 최강철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저격수가 총을 겨누는 것처럼.
새끼, 정말 팔은 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빙긋 웃어주었다.
놈이 받아들이기엔 비웃음으로 보였겠지만 그건 아니었고 헌즈의 얼굴에 들어 있는 분노를 확인했기에 지은 웃음이었다.
작전이 먹혔다.
놈은 어제의 일을 잊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자 격렬한 적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국가 제창이 이어졌고 장내 아나운서의 선수 소개가 이어졌다.
이게 마지막 행사다.
길고 길었던 행사가 끝나면 저기 강철 옷을 입은 것처럼 검은 피부의 사내와 운명의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한다.
“선수 소개를 하겠습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마저 떨리는 것 같았다.
최강철의 팬이라면 그에 대한 프로필은 이제 눈감고 외울 정도였고 헌즈 역시 전설적인 복서였으니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에 관중들의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25전 25KO승의 허리케인 최강철, 56승 48KO승 4패 1무의 킹코브라 토머스 헌즈의 무시무시한 전적이 소개될 때마다 관중들은 경기장이 떠나갈 정도의 함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함성은 레프리가 양 선수를 링의 중앙으로 모이게 하자 급격하게 작아졌다가 곧 멈췄다.
함성을 대신해서 경기장을 가득 채운 건 긴장이었다.
곧 다가올 거대한 전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다가오자 관중들은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막상 마주 보고 서자 머리 하나가 더 있는 것처럼 커 보였다.
거기다 머리마저 작아 실제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전신에 매달려 있는 근육이 살아 움직였다. 헌즈의 긴 팔은 전체가 근육으로 뭉쳐져 있는 것처럼 단단했는데 마치 살아 움직이는 창처럼 느껴졌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헌즈의 트렁크가 자신의 배꼽까지 올라와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길다.
큰 키에 긴 다리, 거기에 돌멩이만 한 작은 대갈통, 그리고 창을 무색하게 만드는 팔까지.
상대하기 정말 까다로운 놈이다.
마주 시선이 부딪치자 완전한 적의를 드러낸 헌즈의 눈이 번들거리며 다가왔다.
그 시선을 향해 푸른 섬광처럼 뻗어나간 최강철의 시선이 부딪쳤다.
헌즈는 자신의 감정을 모두 눈으로 나타내고 있었으나 그건 최강철도 마찬가지였다.
강력한 투지다. 그리고 절대 지지 않겠다는 불타오르는 전의가 그의 눈에서 줄기줄기 새어 나오고 있었다.
두 선수의 시선이 유성처럼 부딪쳤다.
헌즈도, 최강철도 상대방의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눈싸움.
최강철이 눈싸움을 피하지 않은 것은 기세에서 제압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런 종류의 선수에게는 기세가 제압되는 순간 힘든 경기를 하게 된다.
레프리의 주의 사항을 듣고 코너로 돌아오자 윤성호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바셀린을 점검해 주면서 시선은 헌즈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철아, 저 새끼의 어퍼컷과 옆구리 공격을 조심해야 해. 그걸 맞으면 절대 안 된다. 알겠어?”
“알겠습니다.”
“저놈은 뒤로 빠질 때 직선으로 움직인다. 사이드로 빠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거 잊지 마. 그리고 천천히 봐. 급하게 하지 말란 말이야.”
“예.”
최강철이 윤성호의 지시에 짧게 대답했다.
어차피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고 그에 대한 준비도 많이 했기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 동안 두 사람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플리커 잽에 적중되는 순간 무조건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날아와. 맞으면 더킹을 하거나 슬리핑으로 흘려야 돼. 그리고 붙어!”
“오케이.”
“그리고 말이야, 크랩 가딩은…….”
이성일의 말에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것참 이상하다.
라커룸에서는 그렇게 긴장해서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막상 경기에 들어가자 미친 사람들처럼 떠들어댔다.
* * *
집권당 대선 캠프의 선거 위원장 류택상은 참모들과 함께 선거 사무실에서 텔레비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여당 대통령 후보의 최측근으로서 경남 창원을 지역구로 3선에 성공했으며 이제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군이 대통령이 된다면 청와대 수석 자리든 장관이든 무조건 한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제 선거는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바쁘게 움직여야 할 시간임에도 후보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집에서 쉬고 있어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모든 국민이 아예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전부 단체 응원을 펼치기 위해 모여 있었으니 괜히 나가봤자 모양만 우습게 된다.
어느 등신은 한 장소에 수만 명씩 모이니까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놨으나 류택상은 단칼에 그런 의견을 무시해 버렸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한다.
그 많은 인원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오로지 최강철을 응원하기 위함이었으니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득을 보려고 한다면 오히려 역풍을 맞아 후보의 이미지를 훼손할 가능성이 컸다.
지금 선거 사무실에는 10여 명이 모여 최강철이 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최강철이 태극기를 직접 들고 들어가는군요. 저런 모습은 처음 아닙니까?”
“그렇군요.”
장석명이 슬쩍 묻자 유택상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그의 말대로 최강철이 출전하면서 태극기를 들고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머리에 두른 태극기가 달린 머리띠, 그리고 깃발.
과연 저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금년 초에 벌어진 총선에서 최강철은 눈엣가시 같은 정우석과 몇 명 의원을 지원해서 국회의원에 당선시켰다.
정우석은 삼당 합당 시 당이 정의와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오로지 집권 야욕에만 정신이 팔렸다며 당을 뛰쳐나간 배신자였다.
그로 인해 받은 타격을 생각한다면 지금도 이가 갈린 지경이었다.
삼당 합당에 반대한 국민들은 정우석을 신의와 정조를 지킨 정치인이라 치켜세우며 그의 열렬한 추종자로 변모했기 때문에 여당은 똥물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정치에 절대 관여하지 않았던 최강철이 정우석을 비롯해서 여러 명의 국회의원 선거 유세에 나선 걸 보며 정치권에서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 말들은 금방 수그러들었는데 여야를 구분하지 않고 지원한 것이 개인적인 친분 관계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야당 편에 서서 활동했다면 벌써 반쯤 죽여놨을 테지만 그것이 아니었으니 굳이 국민들에게 영웅 취급을 받는 최강철과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장석명의 입이 다시 슬그머니 열린 것은 링에 오른 최강철을 향해 관중들이 뜨거운 함성을 보내 줄 때였다.
하지만 그에게 들린 것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미국 관중의 소리보다 주변 건물에서 나온 한국 국민들의 함성 소리가 더 컸다.
최강철의 출전에 강남 선거 캠프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빌딩 등이 들썩거렸던 것이다.
“이번 선거에 최강철이 우릴 도와준다면 훨씬 수월하게 싸울 수 있을 텐데요. 저놈은 국민들한테 엄청난 인기가 있잖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혹시 장 위원님은 저 사람과 인연이 있습니까?”
“아뇨,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저 친구와 인연 있는 사람이 우리 당에 있잖아요. 민인식 의원 말입니다.”
“그런 개차반을…….”
민인식의 이름이 나오자 류택상의 입에서 즉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또라이다.
민인식은 집권당의 일원이면서도 수시로 당론에 반발하며 야당 편을 들기도 했고, 어떤 때는 저 혼자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시키지 않은 법률을 제정하겠다고 설쳐댔다.
누가 국가를 위해서 일해야 된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도 정권을 유지해야 가능한 일이고 권력이 있어야 국민들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걸 민인식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류택상은 민인식의 얼굴만 보이면 옆으로 고개를 틀고 알은척을 하지 않았다.
“위원장님, 민인식은 최강철의 지원을 받고 선거에 당선되었어요.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던 최강철이 그를 위해 나선 것은 커다란 친분이 있기 때문이에요. 민인식이 껄끄럽지만 이용해 먹을 때는 이용해 먹어야 합니다.”
“음……”
“우리가 못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최강철 때문에 우린 저번 사건으로 꽤 큰 타격을 입었어요. 이제라도 그를 영입해서 선거에 써먹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겁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리고 최강철을 정말 지원 유세에 가담시킬 수만 있다면 이 선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최강철의 인기는 국민들 사이에서 압도적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최강철이 헌즈와 눈싸움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강렬한 눈빛.
꼭 한 마리 야수를 연상시키는 최강철의 눈을 확인하자 슬그머니 오한이 올라왔다.
그만큼 그의 눈은 보는 사람을 송연하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좋습니다. 민인식에게 이야기해 보세요. 저놈만 데려온다면 그토록 원하던 국방위원회에 넣어주겠다고 하세요!”
* * *
때앵!
공이 울리자 최강철은 링의 중앙으로 나가 레프리의 주재 아래 헌즈와 주먹을 부딪쳤다가 잠시 물러났다.
하지만 레프리가 중앙에서 팔을 그어 내리는 순간 빠르게 헌즈의 가슴팍을 향해 다가갔다.
쌔액!
접근하는 순간 공간을 가르는 파공성이 장검을 내리치는 것처럼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플리커 잽이다.
먼저 주먹을 날리지 않은 것은 바로 이 플리커 잽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헌즈의 스텝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화면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겅중겅중 뛰는 것처럼 보여 느리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그가 접근했을 때는 이미 전권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접근을 멈추지 않았다.
쉬익, 쉬익, 쉬익!
원거리에서 헌즈의 레프트 잽이 창처럼 날아와 최강철의 전신을 노리며 연사되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주먹을 내는 대신 더킹과 위빙, 슬리핑, 스웨잉 등 모든 방어 기술을 펼치며 접근전을 멈추지 않았다.
헌즈는 플리커 잽이 계속해서 빗나가자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가동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잽이 실패했을 때 날아오는 상대의 반격이었다.
레너드와의 경기에서 그는 패링에 의한 레너드의 양 훅에 여러 번 당했고 결국은 1차전에서 KO패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최강철이 노린 것은 패링에 의한 스트레이트나 양 훅이 아니라 바로 옆구리였다.
파공음이 귓가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 최강철의 라이트가 헌즈의 복부를 향해 날아갔다.
빠악!
맞혔다.
움찔하는 게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바디 공격이었다.
최강철은 헌즈가 복부를 맞고 뒤로 물러서는 순간 다시 바짝 따라붙었다.
위기 때가 되면 복서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 무기들이 튀어나온다.
그건 복서로서의 본능이었다.
아무리 상대를 속이기 위해, 또는 전략상 감추었던 것들도 예상치 못했던 위기에서는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우웅, 웅, 웅!
최강철의 라이트 스트레이트와 양 훅을 피해낸 헌즈의 반격이 시작되자 귀신의 울음소리가 링에 가득 찼다.
그가 자랑하는 공포의 라이트 스트레이트와 양 훅, 그리고 어퍼컷이 난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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