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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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팰리스 호텔 특설 링에 화려한 불빛이 들어왔다.
저녁 6시부터 벌어진 오픈게임부터 텔레비전 중계가 시작되었지만 이미 다운사이징 게임은 2게임이 끝난 상태였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시저팰리스 호텔의 화려함은 독보적이었다.
거대한 궁전을 연상시키는 호텔의 규모도 대단했지만 특설 링을 밝히는 조명 시설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오픈게임이 벌어질 때부터 관중들은 이미 만원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것도 쉽게 볼 수 없는 일이다.
2만여 석의 관중 중 일반 판매를 기록한 것은 5천 석에 불과했으니 나머지 1만 5천 석은 세계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유명 인사들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오픈게임이 벌어지는 타임에 모든 관중석이 찼다는 건 이 게임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과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크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들의 흥분이 얼마나 큰지는 오픈게임을 지켜보는 태도에서 알 수 있었다.
랭킹전에 불과했음에도 관중들의 피는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연신 함성이 터지고 있는 중이었다.
세기의 빅 매치를 맞이해서 운 좋게 중계권을 따낸 ABC 측에서는 최고의 캐스터인 더글러스와 해설자인 닉 켄트를 중계방송에 배치시켰다.
그들은 6시가 되자 오프닝을 시작했는데 오픈게임에 대한 중계를 간간히 하면서 경기장의 모습과 앞으로 벌어질 최강철과 헌즈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
“켄트 씨, 정말 대단한 인파입니다. 오늘 이곳 시저팰리스 호텔 특설 링은 2만여 명의 관중이 운집되어 있는데요. 벌써부터 모든 객석이 꽉 찼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두 선수가 지닌 파괴력이 그만큼 크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아, 저기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모습이 비춰지는군요. 작년 터미네이터로 엄청난 관중을 끌어 모았죠?”
“조던의 모습도 보이네요. 정말 링 사이드는 슈퍼스타들이 전부 자리한 것 같습니다. 슈가레이 레너드와 마빈 헤글러의 모습도 보입니다. 판타스틱4를 형성하며 복싱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는 전설의 인물들입니다.”
“정치인들과 경영 쪽에서도 많이 왔군요. 제가 알기로는 클린턴 대통령 내외도 오려고 했는데 긴급한 정치 현안 때문에 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인기로 보면 허리케인이 헌즈보다 훨씬 높죠?”
“헌즈 선수도 워낙 뛰어난 선수이기 때문에 엄청난 팬을 확보하고 있지만 허리케인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차이가 나죠.”
“이유가 뭘까요?”
더글러스가 모른 척하면서 묻자 닉 켄트의 시선이 잠깐 그를 바라봤다가 다시 돌아갔다.
그는 이 대화에 대해서 조금 더 끌고 나가려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닉 켄트는 빙긋 웃음을 지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해설을 하면서 누차 말씀드린 것처럼 허리케인의 경기 스타일은 강렬한 인파이팅입니다. 거기에 슬램 뱅(Slam-nutty: 격렬한 난타전)에 익숙하고 슬러거(Slugger)이기도 합니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25전승 KO승만 봐도 알 수 있죠. 최근 벌인 경기들을 보면서 저 역시 허리케인의 팬이 되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불리하다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일방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도 관중들의 피를 펄펄 끓게 만들 정도의 명경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여성 팬들에게도 인기가 많은데요. 잘생긴 외모와 완벽한 그의 피지컬이 한몫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 경기도 전문가들의 평가는 헌즈 쪽에 유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죠?”
“복싱 전문가들은 7 대 3까지 보고 있습니다. 워낙 피지컬에서 차이가 나고 경기 운영 면에서도 헌즈가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어제 확인한 결과 도박사들의 배팅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라스베이거스의 도박사들은 6 대 4로 헌즈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확인해 보니 5 대 5로 팽팽한 균형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건 참 의외군요. 전문가들보다 더 정확한 분석력을 가졌다는 도박사들이 그런 평가를 내렸다면 오늘 경기가 더욱 기다려지는군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더글라스의 대답에 닉 켄트의 얼굴에서 다시 한번 웃음이 떠올랐다.
밥값을 제대로 했다.
같이 일하는 더글라스까지 놀라게 만들었으니 이 중계방송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얻어 낸 정보를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노련하게 표정을 바꾸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켄트 씨, 전문가들은 헌즈의 플리커 잽과 크랩 가드, 그리고 숄더 롤로 이어지는 방어력을 허리케인이 뚫어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켄트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헌즈의 방어력은 정말 뛰어나죠. 큰 키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숄더 롤을 깨는 건 정말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크랩 가드가 워낙 좋아서 복부 공략도 힘들죠.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허리케인도 뚫기 어려울 겁니다.”
“사람들은 헌즈 선수가 보여주는 강력한 라이트 스트레이트만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죠?”
“그럼요, 워낙 헌즈 선수의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인상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의 어퍼컷과 레프트 복부 공격은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선수가 접근전을 포기한 것은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헌즈 선수의 공격 패턴은 원거리에서 플리커 잽으로 균형을 무너뜨리고 허점이 보이면 라이트 스트레이트 콤보로 이어집니다. 상대가 그런 공격을 겨우 피한다 해도 반격이 쉽지 않죠. 곧바로 빠른 스텝을 이용해서 뒤로 물러나는데 워낙 다리가 길어서 스탭의 폭이 상대방의 두 걸음이나 됩니다. 무리를 해서 공격을 하는 순간 어퍼컷과 짧은 졸트(Jolt)가 날아옵니다. 대부분의 선수가 여기서 대미지를 받고 쓰러지죠. 옆구리를 바짝 붙인 상태에서 날아오는 그의 졸트(Jolt) 펀치는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기가 피피노 쿠에바스와의 경기였죠. 쿠에바스는 헌즈의 장거리 포격보다 졸트 펀치에 무수한 대미지를 입었습니다.”
상세한 설명을 들은 더글러스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 역시 오랫동안 복싱 쪽에서 일을 했지만 닉 켄트의 설명을 듣자 도저히 뚫고 들어갈 구멍이 없어 보였다.
그의 걱정은 허리케인이 과연 이렇게 완벽한 공수 능력을 가지고 있는 헌즈를 잡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공식 석상에서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허리케인의 열렬한 팬이었다.
“점점 헌즈 선수가 왜 최고의 위치에 머무르고 있는지 알겠군요. 그렇다면 켄트 씨, 허리케인은 어떻습니까?”
“음… 허리케인은 저도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지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뛰어난 샤프 슈터(Sharp Shooter: 레프트 잽이 능숙한 복서)이자 빅 펀처(Big Puncher)입니다. 웬만한 선수들 정도는 레프트 잽 하나만 가지고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잽을 보유하고 있죠. 더군다나 그의 펀치는 블래스팅 블로(Blasting Blow)이며 전광석화와 같은 스피드까지 지녔습니다. 동급으로 봤을 때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선수들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하지만 전문가들이 믿어지지 않는 능력을 가진 허리케인이 고전할 거라 예상하는 건 결국 리치 차이 때문입니다. 더 하나 덧붙인다면 체중 조절에 관한 것이지요. 웰터급에서 보여준 허리케인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이 슈퍼 웰터급에서도 이어질지 걱정되거든요.”
“그건 왜 그렇죠?”
“복싱에서 체중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허리케인은 25전 동안 한계 체중을 67㎏으로 맞춰서 싸워왔어요. 이런 체중으로 싸우는 것과 71㎏으로 싸우는 건 웨이트 차이에서 오는 체력 소비가 달라요.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오늘 경기가 걱정되는 겁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닉 켄트 씨는 이 경기의 승패를 어떻게 보십니까?”
“허리케인의 공격력과 방어력은 당대 최고 수준입니다. 저는 그의 방어력이 헌즈 선수의 공격력을 감당할 수 있느냐가 이 경기의 승패를 결정지을 거라 생각합니다. 만약 허리케인이 헌즈 선수의 주 무기들을 받아넘길 수만 있다면 흥미진진한 승부로 이어질 겁니다.”
최강철은 밴딩을 하고 있는 이성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놈 봐라.
25전을 싸워왔지만 밴딩을 하는 이성일의 손이 떨리는 건 처음 봤다.
놈은 얼마나 긴장했는지 밴딩을 하는 손이 사시나무 떨리는 것처럼 떨고 있었는데 입술이 부르튼 건 벌써 오래전의 일이었다.
“성일아, 너 왜 그래?”
“응, 내가 뭘?”
“왜 그렇게 떨어, 인마. 네 손이 진동 안마기냐?”
“아휴, 말 시키지 마. 네가 자꾸 말 시키니까 밴딩이 잘 안 되잖아.”
“이 자식아, 거기 꼬였다.”
최강철이 왼손을 들어 밴드가 잘못된 곳을 지적하자 옆에 있던 윤성호가 성큼성큼 다가와 이성일의 밴드를 가로챘다.
“야, 넌 잠깐 쉬어. 나머지는 내가 할게.”
윤성호가 밴드를 뺏은 후 빠르게 감기 시작하자 이성일이 뒤로 물러나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평소 같았다면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았을 테지만 그의 얼굴은 불안과 초조에 젖어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밴딩이 끝난 후 최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의 감각을 확인하다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뭐 할 말 있어?”
“강철아…….”
“왜 그래?”
“씨발, 아니다.”
“너 답답하게 만들래? 조금 있으면 시합에 나가는 놈한테 궁금증 만들어놓는 트레이너가 어디 있어. 빨리 말 안 해!”
“나, 겁난다. 네가 다칠까 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작전이 통하지 않으면… 그래서 도저히 어렵다고 생각되면 일어나지 마. 이걸 말하고 싶었다.”
“야, 이 자식아!”
“제발, 내 말대로 해줘. 응?”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성일을 향해 최강철이 눈을 부릅떴다.
놈의 심정을 안다.
헌즈의 경기를 돌려보며 그가 터뜨린 주먹에 당해 펀치 드렁크가 된 선수들을 수없이 눈으로 확인했겠지.
그중에는 이기고 싶다는 마음에 다시 일어났다가 실신해 버린 선수들도 여럿 있었다.
이 새끼는 전생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신에게 부모 노릇을 하려고 한다.
입맛을 다시고 옆으로 눈을 돌리자 윤성호가 모른 체하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사람들이 정말.
시합 나가는 선수한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모든 오픈게임이 끝나고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자 김영국과 정민철은 안절부절못했다.
지금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국민도 그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링 위에는 WBA와 WBC 회장을 비롯해서 이 게임을 주최한 돈 킹과 밥 애런이 차례대로 들어섰고 장내 아나운서에 의해 주요 인사들의 소개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방송을 시작한 지 1시간 반이나 흐르고 있었지만 그 시간들이 눈 깜짝할 시간에 지나가 버린 것 같았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강철이 이창래를 도와 MBC 측에 중계방송을 독식하도록 했을 때는 그토록 미웠으나 지금은 아예 그런 적이 있었던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고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지금 링에서는 WBA 회장인 카를로스 씨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분은 작년에 새로 선임되었죠?”
“예, 맞습니다. 멕시코 출신으로 나이가 65세입니다. 저분이 있었기에 이 경기가 성사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사실 최강철 선수의 슈퍼 웰터급 도전은 조금 자격에 문제가 있었어요. 타이틀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슈퍼 웰터급에서의 전적이 있어야 되는데 카를로스 회장은 최강철 선수의 웰터급 전적을 인정해서 랭킹에 올려주었죠.”
“아, 이제 모든 인사의 소개가 끝났습니다. 곧 양 선수의 입장이 있을 것 같습니다. 화면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최강철 선수의 모습이 보입니다! 정 위원님, 최강철 선수의 컨디션이 어떤 것 같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받으면서 정민철이 잠시 주춤했지만 노련하게 입을 열었다.
“얼굴에 홍조가 깃들어 있는 걸 보니 풋워크를 충실히 한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최강철 선수는 5개월 동안 지독한 훈련을 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몸 상태는 좋아 보이는군요.”
“다행이군요. 오늘 최강철 선수가 선전해 줄 것을 기원합니다. 이번에는 헌즈 선수의 모습이 보입니다. 헌즈 선수도 출전 채비를 모두 갖춘 걸로 보이죠?”
“역시 크군요.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이에요.”
“아, 말씀드리는 순간 최강철 선수가 라커룸을 나섭니다. 장내 아나운서가 최강철 선수의 출전을 알리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최강철 선수 라커룸을 나서서 당당한 걸음으로 경기장을 향해 걸어 나옵니다. 국민 여러분, 최강철 선수가 출전하고 있습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최강철 선수 반드시 이겨주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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