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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카터가 날아온 것은 피지컬을 바짝 끌어 올리고 있던 8월 중순 무렵이었다.
훈련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다 되었을 땐데 그의 말에 따르면 돈 킹의 성화에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제프 카터는 캠프에 합류한 후 이성일과 함께 비디오실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준비해 놓은 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에 검토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제프 카터는 만날 때마다 이성일을 칭찬했다.
이성일은 시합이 확정되기 전부터 토머스 헌즈에 관한 자료란 자료는 전부 끌어 모았고, 혼자 경기 테이프를 수십 번씩 돌려보며 장단점을 분석했는데 벌써 노트로 5권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가 이성일을 칭찬한 것은 방대한 자료를 열심히 모았기 때문이 아니다.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꼼꼼하게 전략을 마련했는데 이미 치러진 경기에서 증명되었듯이 그가 준비한 전략은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했다.
이번에도 그는 이성일이 자료를 내밀자 고개를 흔들고 준비된 전략부터 보자는 말을 꺼냈다.
자료는 그다음이다.
그는 미국에서 최고의 전략가로 알려진 사람이었으니 헌즈에 관해서도 웬만한 것들은 전부 머릿속에 입력된 상태라 전략을 본 후 자료를 토대로 보충하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성일이 자신이 준비한 자료를 보여주자 꼼꼼하게 살펴보던 제프 카터의 입에서 슬며시 탄성이 흘러나왔다.
“성일, 이번에도 아주 좋은 전략을 마련해 놨구만.”
“칭찬 말고 보강을 해주세요. 전략은 마련했지만 찜찜한 구석이 너무나 많습니다. 더군다나 이 전략은 강철이가 제대로 움직여 주지 못하면 5회를 넘길 수 없을 만큼 위험합니다.”
“알고 있다네. 하지만 이것만큼 좋은 전략은 더 이상 없어.”
“카터 씨,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닙니까. 전 카터 씨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어요. 정말 보강이 필요합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여기서 몇 가지만 더 보강하면 된다. 어차피 헌즈와 싸우는 상대는 허리케인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엄청난 위험을 안고 싸워야 해. 그놈의 신장과 리치는 동급 최강이란 말이야.”
“생각하고 온 게 있습니까?”
“당연하지, 그렇지 않다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왔겠나.”
“그게 뭐죠. 빨리 말씀해 주세요.”
“자네의 전략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놈의 레프트 잽을 완벽하게 봉쇄해야 해. 여러 각도에서 나오는 플리커 잽을 봉쇄할 수만 있다면 이번 시합은 해볼 만할 거야.”
* * *
시간은 빨리 흘렀다.
출국 날짜가 다가오자 언론과 국민들은 숨겨 왔던 긴장감을 다시 터뜨리기 시작했다.
애써 모른 체했다.
언론들은 최강철의 훈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기자들을 보내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가 공원과 산에서 ‘언리미티드 러닝’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절대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었고 응원을 하기 싫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가 잘해주기를, 더 잘 싸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고 싶은 걸 참았을 뿐이다.
최강철은 출국 전날 집을 찾았다.
그날, 마침 막내 누나가 결혼 할 사람을 집으로 데려왔다.
보고 싶었던 얼굴.
사람의 인연이란 건 돌아온 자신의 달라진 삶과 다르게 운명처럼 이뤄지는 모양이었다.
누나의 삶 역시 자신으로 인해 변화가 있었으나 매형과의 인연은 변하지 않았다.
공무원이었던 막내 매형은 성격이 까칠한 편이었으나 평생 누나만을 위하며 산 사람이었다.
막내 누나의 삶이 편안했던 건 아니다.
시부모를 모시며 수십 년을 살아야 했고 쥐꼬리만 한 매형의 월급을 아끼며 두 아들을 키우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마련해 준 강남의 의류 가게는 점점 번창해서 누나의 통장에 계속해서 돈이 쌓이고 있었다.
그 정도면 된다. 그 정도만 가지고 있으면 누나의 남은 삶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큰형 내외까지 올라왔기 때문에 집 안은 식구들로 가득 찼다.
직장을 그만두고 형수와 함께 대형 음식점을 하는 큰형 내외의 얼굴은 예전과 다르게 활짝 피어 있었다.
큰형에게 11층 건물을 장만해 준 건 2년 전이었는데 시청 근처라 최강철은 건물 1층에 커다란 소고기 전문점을 차려주었다.
모든 가족에게 하고 싶었던 일을 해준 후 최강철은 더 이상 가족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부모님께 전원주택만 마련해 드리면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난다.
최강철이 찾아와 식사를 하는 동안 가족들은 의도적으로 밝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 아들과 동생이 마음 편히 밥을 먹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식사가 모두 끝나고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점점 무겁게 변했다.
“아버지, 이제 저는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 가는 겨.”
“내일 일찍 출발해야 되거든요.”
“그럼 그려라. 내일은 엄마하고 같이 공항에 갈 테니까 얼굴이나 보고 가.”
“예.”
“강철아, 힘들면… 그만해도 된다.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최강철은 그저 조용히 대답을 했다.
무슨 뜻인지 안다. 아버지의 마음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인 모든 가족의 마음이 똑같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 아버지도 아마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그럼에도 아들이 큰 부상을 입을까 봐 참고 참았던 말을 끝내 하신 거다.
그만큼 걱정되었고 무서웠을 테니.
어머니는 아예 고개조차 돌리고 그의 눈을 바라보지 않으셨다.
아들을 사지로 보내는 것처럼 어머니는 두려움으로 인해 벌벌 떨고 계셨다.
대신 나선 건 큰형이었다.
“강철아, 넌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영웅이다. 난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어. 넌 절대 비겁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울 거야. 우린 너를 믿는다.”
“고맙습니다, 형님.”
잠잠했던 언론과 국민들은 최강철이 출국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순간 전쟁터로 나가는 용사를 배웅하는 것처럼 결연한 심정으로 모였다.
공항으로 가는 동안 ‘제우스’에서 나온 경호원들이 앞뒤로 호위를 했는데 최강철 일행의 차량이 질주하는 동안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이 연신 경적을 울리며 그의 출전을 격려했다.
공항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동안 여러 번 겪은 일이었으나 이번에는 환송 규모와 인원이 훨씬 더 크고 많은 것 같았다.
그가 공항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팔을 번쩍 들어 인사를 해줬다.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텔레비전에까지 나가서 반드시 이기겠다고 공언했으니 그들에게 끝까지 자신감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배웅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의 자신감과 다르게 불안감에 젖어 있었다.
본능이다.
최강철의 인터뷰가 끝나고 난 후부터 언론에서는 그의 불리함을 애써 보도하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제 곧 적지로 떠나는 그를 향해 환한 웃음을 보여주지 못했다.
복싱 협회가 주관한 행사들이 하나씩 끝나고 엄청난 인파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이런 분위기가 싫다.
마치 자신이 죽으러 가는 것처럼 애써 웃음을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 싫었다.
비행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튜어디스들은 그를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그녀들의 얼굴에 담겨 있는 웃음은 다른 손님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밝지 않았다.
뉴욕공항에 내리자 수많은 언론이 그를 맞아들였다.
간단한 인터뷰를 마치고 마중 나온 서지영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그녀와 함께 하루를 보내며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이제 내일부터는 레드불스에서 시합 때까지 훈련을 하게 될 테니 당분간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루 동안 그녀와 함께 고급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영화도 봤다.
그리고 저녁에는 와인을 들고 이스트 강가로 향했다.
서지영은 데이트를 하는 동안 시합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현명한 것인가, 아니면 그녀의 불안감을 보여주기 싫었던 걸까.
어떤 이유든 그녀로 인해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지영 씨, 막내 누나가 매형감을 집에 데려왔어. 아마 곧 날짜를 잡을 것 같아.”
“어머, 정말?”
“응, 아주 좋은 사람이야.”
“잘됐다. 언니 결혼이 늦어져서 걱정했는데. 정말 잘됐어.”
“똥차 치워서 좋은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막내 누나가 가면 그다음은 내가 가야 되니까 지영 씨 차례가 다가와서 좋아하는 거잖아?”
“호호, 어떻게 알았어. 족집게 도사 같아.”
“그런데 지영 씨는 조금 더 기다려야 돼.”
“응?”
“난 학생이잖아.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 결혼을 하겠어. 원래 학생은 가난해서 졸업하고 돈 번 다음에 결혼하는 거야.”
“쳇, 그만하세요. 수도 없이 한 이야기를 또 하는 이유가 뭐야. 저렇게 아름다운 불빛 아래서 먼지 나도록 맞아보고 싶어!”
서지영이 주먹을 번쩍 치켜들며 눈을 부릅떴다.
벌써 여러 번 반복해서 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젠 실망조차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그녀의 주먹을 감싸 안으며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깊고 깊은 키스를 했다.
“난 벌써 내년이면 4학년이라고. 쉽게 말하면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아줘.”
* * *
최강철은 레드불스의 문을 아예 걸어 잠그고 제프 카터와 이성일이 마련한 전략을 소화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그 훈련을 위해 레드불스의 선수들이 여럿 동원되었고 헌즈와 비슷한 체격을 가진 선수들을 구해서 데려오느라 피터는 발에 땀이 나도록 움직였다.
시간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일분이 지나기를 기다리면 어느새 한 시간이 다가왔고 그것이 합쳐져 하루가 넘어간다.
지금 현재의 몸무게는 정확하게 70㎏.
전문가들이 마련한 식단은 효과를 발휘하면서 그의 체중을 평상시에서 줄어들지 않도록 해주었다.
최강철은 훈련에 들어가면서 언론과의 인터뷰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훈련을 방해받지 않겠다는 의도였고 전략이 새어 나가는 걸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즈는 달랐다.
그는 예전처럼 수시로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허리케인은 관을 준비해야 할 겁니다. 난 그가 3회를 버티지 못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가 허리케인과 더불어 폭격기란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쓸모도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내 스트레이트는 폭격기를 때려잡는 스커드 미사일이거든. 내 얼굴에 펀치를 맞힌다고? 하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난쟁이가 거인의 얼굴을 때린다는 말과 뭐가 다르겠어. 그런 꼬맹이가 날 어떻게 때려. 이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란 말이오. 이건 그냥 거인이 난쟁이를 짓밟는 것에 불과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의 말은 심리전을 펼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자신감에서 나온 게 분명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피지컬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맞는 말이다.
리치의 차이가 무려 30㎝가 났으니 전문가들도 그의 인터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경기를 주관하는 ABC 방송국은 세기의 빅 이벤트를 맞이해서 수시로 특집 방송을 마련했다.
그들이 마지막 특집 방송을 마련한 것은 시합을 5일 앞두었을 때였다.
NBC 특집 방송에 출연해 허리케인의 승리를 장담했던 지미 렉스와 스포츠 저널의 복싱 전문가 호프만을 게스트로 모셔놓고 마지막 승부 예측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의 진행은 대동소이했다.
비슷한 포맷으로 시간을 때우며 진행했는데 이번에도 양쪽으로 나뉘어 두 선수의 장단점을 분석한 후 승자를 예측하는 방식이었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결론이다.
프로그램 앞쪽에 방송된 두 선수의 하이라이트는 양념이었고 선수들의 특징과 기술들은 애피타이저에 불과했다.
사회를 진행하던 하워드의 질문이 던져 것은 프로그램이 정점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호프만 씨, 지금까지 두 선수의 장단점을 분석해 봤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가 이길지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뭐, 저야 다른 언론에도 수차례 이야기한 바 있지만 당연히 헌즈가 이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플리커 잽과 공포스러운 라이트 스트레이트는 허리케인을 압살하기 충분하거든요. 허리케인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든 것이 헌즈를 상대로는 통하지 않을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리치의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입니다. 접근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허리케인도 쿠에바스와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앞에서도 보여줬지만 쿠에바스는 허리케인 못지않은 강력한 인파이터였어요.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인파이팅을 펼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다가 KO패를 당했습니다. 그가 인파이팅을 펼치고 싶지 않아서 그리된 게 아닙니다. 아예 접근할 수 있는 모든 방향을 차단당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거죠.”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서까지 설명했던 쿠에바스와 헌즈의 경기는 그의 말대로 그렇게 일방적으로 끝났다.
쿠에바스의 피지컬은 최강철과 거의 흡사했기에 그런 예측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허니건과의 승부에서 허리케인의 승리를 예측했던 지미 렉스 씨의 예상을 들어보겠습니다. 지미 렉스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저도 호프만 씨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마음속으로 허리케인을 응원하고 있지만 이번 경기는 피지컬 면에서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거란 판단이 드는군요.”
“그렇다면 지미 씨의 판단도 헌즈가 이긴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확률은 적지만 허리케인이 이길 수 있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죠?”
“허리케인의 야성을 믿기 때문입니다. 허리케인은 마크 브릴랜드, 듀란, 허니건 등의 강자들과 싸우며 언제나 열세라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는 그런 열세를 딛고 압도적인 경기력을 펼치며 판을 뒤집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번에도 그가 그런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허리케인이 헌즈의 플리커 잽과 공포스러운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무력화시킨다면 이 경기는 허리케인이 잡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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