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88화 (188/308)

[188]

* * *

유진선은 ‘뉴욕의 사랑’ 마지막 촬영을 이틀 전에 끝내고 오랜만에 집에서 쉬는 중이었다.

‘뉴욕의 사랑’은 2달 전부터 방영되었는데 시청률이 무려 34%까지 나왔기에 여주인공인 유진선에게는 광고 계약이 쇄도하고 있었다.

이런 걸 바로 대박이라고 한다.

드라마 하나로 팔자를 고친 사람들을 여럿 봤는데, 그녀도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며칠 후부터는 광고 촬영 스케줄이 빽빽하게 잡혀 있기 때문에 이런 휴식도 얼마 남지 않았다.

촬영을 하느라 먹지 못했던 라면을 실컷 먹었다.

행복했다.

탤런트란 직업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우아하게 산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사자들은 수많은 고통에 시달린다.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당당하게 남자친구와 데이트 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한다.

밖에 나가 쇼핑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지만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로 인해 함부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그랬기에 오늘도 박정현을 집으로 불러 같이 시간을 보내며 휴가를 즐겼다.

오늘따라 라면을 잘 끓였다.

면발이 쫄깃했고 물의 양도 잘 맞춰서 국물 맛이 죽여줬다.

“정현아, 너 라면집이나 해라. 탤런트 그만두고 라면집 해. 내가 단골 돼줄게.”

“이것이 죽을라고. 야, 차라리 시집가라고 그러지!”

“호호, 너무 맛있어서 그래. 우리 밥 말아 먹을까?”

유진선이 국물만 남아 있는 냄비 그릇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자 박정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여신이 다 나가죽었다.

사람들은 ‘뉴욕의 사랑’을 보면서 그녀에게 여신이란 칭호를 붙여주었지만 현실에서 보는 그녀는 밥순이가 따로 없었다.

“너 그러다가 광고 못 찍어. 뚱땡이가 되어서 딱 나타나 봐라. 아마 광고 회사에서 기절할걸?”

“라면 몇 그릇 먹었다고 금방 뚱땡이 되겠어? 하긴, 이젠 조심하려고 해. 이틀 동안 줄곧 먹어댔더니 살이 쭉쭉 올라오네.”

“화장품 모델하고, 에어컨이랬지?”

“응.”

“좋겠다. 난 언제 그런 거 해본다니?”

“곧 들어올 거야. 너 예쁘잖아.”

“말이라도 고맙다. 설거지는 네가 해. 난 오징어 구울 테니까.”

“헐, 맥주 마시자고?”

“입가심해야지. 맥주 한 캔 쫘악 때리면서 봐야 영화의 사실감이 살아나는 거야.”

“오케이!”

둘이 있어도 재밌다.

남자가 둘이 있으면 십 분 지나고부터 침묵에 사로잡히지만 여자들은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진다.

설거지가 끝나고 술상을 차린 두 여자가 거실에 앉아 자세를 잡았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양들의 침묵’을 보기 위함이었다.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양들의 침묵’은 작년에 개봉했는데 촬영 때문에 계속 미루다가 이제야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비디오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켜다가 순식간에 모든 동작을 정지시켰다.

화면에서는 최강철의 모습이 보였는데 수많은 관중 앞에서 기타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저게 뭐야?”

“조용히 해봐.”

“기타 들었잖아. 저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지?”

“아휴, 조용하라니까.”

유진선의 재촉에 박정현이 잠시 입을 닫았다.

텔레비전에서는 국민들의 영웅 최강철이 서울대 축제에 출연한 소식을 전하며 노래까지 했다는 멘트를 하고 있었다.

“진선아, 정말 노래 하나 봐.”

“아… 기타도 칠 줄 아는 모양이네. 저 사람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아주 여자들 죽이려고 환장한 거 아냐? 우와, 저 기타 솜씨 봐라. 끝내주잖아!”

여기까지가 두 여자가 한 대화의 전부였다.

최강철이 기타를 치는 순간부터 두 여자의 시선은 화면에 고정된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냥 고정된 게 아니라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수많은 대학생과 하나가 되어 노래를 부르는 최강철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들은 전율에 젖어 자신들도 모르게 몸을 떨어댔다.

서울대 축제에 나선 최강철의 모습은 방송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참 별일이다.

뉴스가 이렇게 무한 반복 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최강철이 노래하는 장면을 다시 보기 위해 재방 요청 전화를 수없이 했기 때문에 방송국에서는 뉴스 때마다 그 모습을 내보냈다.

하지만 사람들을 진짜 흥분시킨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최강철과 헌즈의 시합 날짜가 잡혔다는 발표가 나온 건 서울대의 축제가 끝난 후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결전, 최강철 드디어 헌즈와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다!>

<허리케인과 킹코브라의 전쟁 확정>

언론들이 동시에 터뜨린 경기 일정이 나가자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태풍 속에 사로잡혔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지 않았다.

어떤 이유든 대한민국 국민들은 최강철이 헌즈와 싸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최강철의 용기 있는 선택을 들은 후 대놓고 반대하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 시합이 성사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밥 애런이 시합을 미룬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입으로는 욕을 하면서 비난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가 링에서 쓰러지는 장면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한 달 전부터 급격하게 경기가 추진된다는 소문이 돌더니 기어코 시합이 결정돼 버리자 국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한숨을 흘려내기 바빴다.

계속 거론돼 온 것이지만 불리해도 너무 불리했다.

최강철이 타이틀을 반납하는 것 자체도 싫었고 비록 체중을 올려 싸운다 해도 헌즈의 괴물 같은 피지컬을 감안한다면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않았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경기 일자를 확인하면서 낙심을 금치 못했다.

경기가 잡힌 날짜는 지금부터 정확히 5개월 뒤인 11월 7일이었고, 경기 장소는 밥 애런과 헌즈의 홈 링인 라스베이거스 시저 팰리스 특설 링이었다.

파이트머니는 최강철과 헌즈가 역대 최대액인 2천만 달러를 받는다.

천문학적인 돈이었으나 복싱 팬들은 그들의 파이트머니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오직 그들의 관심은 최강철이 체격의 열세를 딛고 일어서 헌즈를 꺾을 수 있느냐는 것뿐이었다.

경기가 결정되면서 세계 각국의 글로벌 기업들이 전부 달라붙었다.

그들은 이번 경기를 후원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는데 최종적으로 50개 기업이 자신들의 로고를 경기장에 달 수 있었다.

경기 중계를 위한 방송국의 경쟁도 치열했다.

이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3 대 방송국이 전부 달라붙었는데 승자는 ABC였다.

최강철은 경기 날짜가 정해지자 미련 없이 통합 타이틀 챔피언 벨트를 반납했다.

헌즈가 챔피언 벨트를 차지하고 있는 WBA 측에서 벨트의 반납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헌즈와의 대결을 위해서는 최강철을 슈퍼 웰터급 랭킹에 올려야 되는데 챔피언 벨트 반납은 그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경기 일정이 잡혔다는 뉴스가 나간 후 불과 이틀 만에 최강철이 챔피언 벨트들 반납했다는 소식에 한국 국민들은 마지막 희망조차 사라지자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이제 물릴 수도 없다.

챔피언 벨트까지 반납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최강철이 헌즈와의 대결에서 이겨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 * *

성호체육관 3층에 모여 앉은 최강철과 윤성호, 이성일의 표정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오늘 모인 것은 늘 해온 것처럼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스케줄을 조율하고 식단을 상의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5개월이 남았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최강철은 시합을 앞두고 체중 조절에 실패한 적이 없으나 평상시의 체중에서 3㎏를 빼야 했기 때문에 칼로리를 정확하게 계산해서 정해진 식단에 의해 식사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슈퍼 웰터급의 체중은 웰터급에 비해 한계 체중이 4㎏이나 많다.

다시 말해서 최강철은 현재의 체중을 유지하며 경기에 나서야 된다는 뜻이다.

복싱에서 4㎏의 차이는 평상시 몸무게가 최소 8㎏ 이상 차이가 난다.

그건 불과 한 체급이었지만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골격과 키, 리치 등 신체 구조가 월등하다는 걸 의미한다.

전 세계의 전문가와 복싱 팬들이 이번 경기에서 최강철의 절대적인 약세를 점치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키와 리치는 물론이고 훈련을 통한 자연스러운 감량조차 허락되지 않으니 불리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절대 강자 킹코브라 헌즈였다.

“식단은 이미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준비해 놨으니까 그대로 먹으면 된다. 전문가들이 그러는데 그렇게 먹으면 훈련을 강하게 해도 체중이 빠지지 않을 거래.”

“이거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통통하게 오르겠는데요?”

“걱정하지 마. 그렇게 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굴려줄 테니까.”

“겁나게 왜 이러세요.”

윤성호가 내민 식단표를 보면서 최강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먹었던 식단과 비교해 보니 진수성찬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사람이 살이 빠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풋보다 아웃풋이 많아야 살이 빠진다.

전문가들이 마련한 식단은 충분한 칼로리를 공급해서 훈련으로 소모되는 칼로리를 보충하는 것이었다.

“훈련은 이틀 후부터 시행할 생각이다. 그러니 한동안 못 뵐 테니까 부모님한테 인사나 하고 와. 미국은 늘 하던 것처럼 경기 2달 남겨놓고 넘어갈 생각이다.”

“하루 더 여유를 주세요.”

“왜?”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 * *

이창래는 요새 정신없이 움직였다.

실무에서 떠난 지 오래였지만 최강철과 헌즈의 대결이 확정되면서 할 일이 태산처럼 밀려들었다.

미국 현지의 반응부터 WBA의 움직임과 전문가들의 예상까지 시시각각 발생하는 변화를 체크하느라 몸이 열두 개라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것뿐인가, 이 역사적인 대결을 KBS 쪽에 양보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미리 협약한 것에 의하면 당연히 KBS에서 방송할 차례였지만 윗선에서는 절대 이 경기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국민들의 관심이 너무 뜨겁다 보니 방송을 하는 것도 온통 조심투성이였다.

이번 경기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생각은 다른 경기와 근본부터 달랐다.

다른 경기 때는 최강철의 승리를 장담하며 뜨거운 관심과 성원을 보냈지만 헌즈전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생각은 온통 걱정투성이였다.

방송사의 딜레마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객관적인 전력을 평가해서 사실대로 말하자니 국민들의 반응이 걱정되었고 그렇다고 승리를 예측하는 것도 어려웠다.

국민들의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대놓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국민들은 헌즈의 경력을 줄줄 꿰고 있을 정도였기에 이 경기의 불리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승리를 예측할 경우 방송사의 무지함을 성토할 게 분명했다.

이리저리 걱정투성이다.

그랬기에 그는 요즘 들어 밥을 먹고 사무실에 들어와도 편하게 신문조차 보지 못했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 것은 비서가 커피를 놓고 나갔을 때였다.

어떤 새끼가 이 시간에 전화를 하고 지랄이야, 눈치도 없이.

그런 생각이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겨우 저녁을 먹고 잠시 쉬려는 판에 전화벨이 울리자 짜증부터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 짜증스러움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음성으로 인해 단박에 날아가 버렸다.

소파에 기대 있던 그의 몸이 벌떡 일어났다.

음성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최강철이기 때문이었다.

“강철아, 네가 어쩐 일이야?”

-형님, 훈련 들어가기 전에 한번 뵙고 싶은데요.

“나를? 왜, 무슨 할 말이 있어?”

-예.

“뭔데 그래. 네가 만나자고 하면 겁부터 난다. 그래, 너 훈련 들어가면 만나기 어려울 테니 내일 밥이나 먹자. 어디서 만날까?”

-밥은 됐고요. 오늘 방송국에서 만나시죠.

“네가 방송국에 온다고!”

-어렵겠지만 오늘 특별 인터뷰를 하게 해주세요. 제가 국민들한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의외의 말에 이창래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특별 인터뷰라니?

갑작스러운 말에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부리나케 입을 열었다.

최강철은 직접 쫓아가도 하늘의 별 따는 것처럼 인터뷰하기가 어려운 사람인데 방송국까지 와서 인터뷰를 한다고 하자 몸이 긴장되어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무슨… 내용인데?”

-그건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좋다, 무조건 준비해 놓을 테니까 와라. 몇 시면 되겠냐?”

-저는 한 시간 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최강철이 도착한 후 이야기를 들은 이창래는 MBC 9시 뉴스 생방송 시간에 인터뷰를 준비했다.

워낙 중요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전 국민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이창래는 미친 사람처럼 움직였다.

보도본부 쪽에 최강철의 인터뷰 내용을 이야기해 주자 중요한 손님을 만나 저녁을 먹던 보도본부장이 총알같이 튀어왔고 사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방송하라는 오더를 내리며 거품을 물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보도본부장은 이창래의 두 손을 꼭 쥔 채 벌벌 떨었다.

“이 국장, 정말 고마워. 내가 이 신세 잊지 않을게.”

고맙기도 할 것이다.

9시 뉴스도 경쟁이 치열했다.

양쪽 방송사의 주력 프로그램이었고 동시간대에 국내외의 주요한 뉴스들을 전달하고 있었으니 다른 프로그램과 다르게 직접적인 시청률 비교가 바로바로 나오기 때문에 보도본부장은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요즘은 KBS 쪽에서 선전을 펼치고 있어 어떤 날은 시청률이 역전되는 일까지 생겨 스트레스를 달고 살았다.

보도본부장의 진두지휘 아래 부랴부랴 질문 내용이 만들어졌고 편성 순서가 조정되었다.

인터뷰는 헤드라인 뉴스 다음으로 준비되었는데 그사이 보도본부에서는 9시 뉴스에 최강철이 출연한다는 사실을 30분 간격으로 홍보했다.

뉴스가 시작되는 사인이 올라가자 아나운서들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새어 나왔다.

오랫동안 뉴스를 진행한 아나운서들이었으나 오늘은 긴장감으로 인해 손이 축축하게 젖을 판이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다. 6월 3일 MBC 9시 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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