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87화 (187/308)

[187]

* * *

서울대 총학생회에서 마련한 행사는 대운동장에서 벌어졌다.

다른 때와 달리 총학생회 측은 이번 행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최강철의 참석을 알렸다.

누군가가 대학의 꽃은 미팅이고 축제는 그 미팅을 성사시켜 주는 멍석이라는 말을 했다.

공부벌레라고 알려진 서울대 학생들도 축제가 다가오자 짝을 찾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미팅에서 만난 타 대학의 학생들은 서울대 축제에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왔다가 돌아가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마구 걷어찰 정도로 실망한다.

그만큼 재미없는 게 서울대의 축제였다.

그럼에도 학업에서 벗어난 학생들은 축제 기간만큼은 들뜬 분위기에 젖어갔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광경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학생들과 삼삼오오 여학생들과 잔디밭에 모여 이야기하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미팅에 참석한 것은 박정빈과 김현영뿐이었다.

4인방 중 하나는 지금 학생회 일로 정신이 없었고, 유상식은 군대를 가버렸기 때문에 둘이서만 조촐한 미팅 자리를 가졌다.

오늘 최강철이 출연하는 마지막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만든 미팅이었다.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자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아름다운 여자들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심봤다.

숙대 영문학과 3학년인 그녀들은 한눈에 봐도 뻑 갈 정도로 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미팅의 기본인 호구 조사가 시작되었고 상대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드러나자 곧 화제는 축제에 관한 것으로 옮겨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김미영이었다.

“오늘 축제 마지막 날이라면서요?”

“그렇습니다.”

“서울대 축제는 정말 재미없다고 하던데 정말이에요?”

“그게… 사실입니다.”

박정빈이 옆에 앉아 있는 김현영의 눈치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거짓말해 봤자 소용없다.

그녀들을 데리고 축제에 참여할 생각이었는데 그녀들은 이미 서울대의 극비 사항을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현영이 불쑥 나섰다.

“오늘은 다를 겁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사실 저희들은 두 분을 마지막 축제 행사에 모시고 가기 위해 미팅을 한 겁니다. 오늘 가지 않으면 후회할 거예요. 그 행사에 엄청 유명한 사람이 나오거든요.”

“유명한 사람 누구? 혹시 가수나 영화배우가 나오나 보죠?”

“그 정도라면 말도 안 꺼냈죠. 훨씬 더 유명한 사람입니다.”

“아우, 궁금해요. 누군데 그래요?”

“태풍을 몰고 다니는 남자, 바로 허리케인입니다!”

“어머, 어머, 정말이에요! 정말 최강철 선수가 나온단 말이에요?”

지금까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 있던 민혜숙이 김현영의 말을 듣고 펄쩍 뛰어올랐다.

그녀는 김현영과 파트너가 된 후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에 차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김현영은 그녀가 반응을 보이자 이때다 싶었던지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떠들었다.

“그 선배님과 우린 무척 친한 사이예요. 그래서 잘 알거든요. 아마 오늘 출연해서 노래를 할지도 몰라요.”

“그분이 노래까지 한다고요? 최강철 선수가 노래 잘해요?”

“장난 아닙니다. 예전에 한번 들어봤는데 기타 솜씨도 대단해요.”

“그거… 그거 몇 시부터 해요? 우리도 거기 가는 거죠?”

김철중은 총학을 도와 행사를 준비하다가 몰려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매년 개최하는 행사였으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행사는 학생들에게 외면을 받을 정도로 고리타분해서 운동장의 20%만 겨우 찰 정도였다.

그것도 총학과 관련된 학생들이 강제적으로 동원됐는데 그만큼 이 행사는 인기가 바닥이었다.

학생들은 누군가에게 설교 듣는 걸 질색으로 여긴다.

그랬기에 총장부터 잘나가는 선배들까지 줄줄이 나와 젊은이가 가져야 할 꿈이 어떻고, 서울대생으로서의 명예 어쩌고 하는 연설을 듣기 위해 이곳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대박이 터졌다.

행사는 오후 5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학생들은 4시가 조금 넘자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그 숫자가 무지막지할 정도였다.

대운동장이 모두 찬 것은 5시가 되기도 전이었다.

누가 봤다면 다른 대학들처럼 인기 가수들을 대거 출연시켜 즐겁게 노는 행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오늘 총학이 마련한 행사에도 노래와 춤이 있지만 그건 동아리에서 마련한 것이지 돈을 들여 가수들을 초청한 것은 아니었다.

김철중은 앰프의 위치를 옮기다가 무대 뒤편으로 다가오는 최강철을 확인하고 급하게 달려왔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이게 뭔 일이냐?”

“아마 선배님이 출연한다는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내 얼굴 보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단 말이야? 철중아, 네가 봤을 때 내가 영화배우처럼 잘생겨 보이니?”

“그럴 리가요. 하지만 선배님은 대한민국의 영웅 아닙니까. 더군다나 오늘 선배님이 노래까지 한다고 소문이 돌아서 학생들이 난리가 아니에요.”

“인마, 내가 언제 노랠 부른다고 그랬어? 이놈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저도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소문이 돈 건 사실입니다.”

당황한 얼굴로 묻자 김철중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자신도 소문의 진원지가 어딘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 학생들에게 전파되었고 눈에 보이는 것처럼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아마 이 중 상당수가 서울대 학생들의 초청을 받은 다른 학교 학생들일 것이다.

그들은 최강철을 실물로 본 적이 없으니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왔을 게 뻔했다.

최강철은 대운동장을 꽉 채운 학생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흘려냈다.

엄청나게 많다.

이보다 더 많은 관중 앞에서 시합을 여러 번 했지만 그건 복싱 경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단순하게 얼굴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원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많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방송국 카메라 기사들이 주섬주섬 무대를 향해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강철은 그 모습과 대운동장을 가득 채운 학생들을 번갈아 바라보다 결심을 한 듯 김철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철중아, 기타 있어?”

“예?”

“기타 있냐고?”

“있습니다. 앰프 달린 기타가 여러 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거 하나 줘봐.”

“선배님… 하실 겁니까?”

“그럼 어떡해. 이 자식아, 네가 사고를 쳐놨으니 수습을 해야 되잖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최강철은 처음부터 연단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연단에 앉은 총장과 각 단과대의 학장들, 그리고 기라성 같은 대선배들과 같은 자리에 앉는다는 건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행사가 시작되자 학생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연설들이 시작되었다.

지루하긴 지루하다.

행사의 1부 순서는 총장과 몇 명의 학장들, 선배들의 인사말이 계속 이어졌는데 그 시간이 거의 1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

대운동장을 가득 메운 학생들이 온몸을 뒤틀기 시작한 것은 연설이 30분을 넘어섰을 때부터였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똑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면 금방 싫증이 나는데, 더군다나 이 자리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다른 학교 학생들이었으니 그 답답함이 오죽했겠는가.

겨우 1부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2부 행사가 시작되자 지루함에서 벗어난 학생들의 눈이 초롱초롱 밝아졌다.

2부에서는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서 4중주 기타 합주를 연주했고 노래 동아리에서 나와 몇 곡의 대중가요와 팝송을 불렀다.

민속반의 탈춤과 농악대 연주가 끝난 후 서울대 출신 인기 가수 이정석이 무대로 나오자 학생들의 입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이정석은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가 부른 ‘너의 영혼’은 가요 프로그램에서 4주째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빅 히트를 쳤다.

그의 노래가 진행되자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학생들의 눈이 무대로 집중되었다.

이정석의 목소리는 더없이 달콤했고 감미로워 여학생들은 물론이고 남학생들의 감성까지 자극했다.

그의 노래가 끝났을 때 커다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서울대 축제에서는 극히 보기 힘든 인기 가수의 노래를 들었으니 학생들은 그 감동을 아낌없이 표현해 주었다.

사회를 보던 김철중이 마이크를 잡은 것은 이정석이 인사를 하고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을 때였다.

“학우 여러분, 그리고 저희 서울대를 찾아주신 타 학교 학생 여러분, 이제 마지막 순서만 남았습니다.”

김철중의 말 한마디에 가장 뒷줄에 앉아 있던 학생들부터 함성을 지르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간절했던 기다림.

마치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뒤쪽에서부터 시작된 물결은 파도가 되어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학생들까지 일어나게 만드는 괴력을 발휘했다.

김철중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제가 아직 소개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분이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이제 제가 소개시켜 드릴 분은 서울대의 자랑이자, 대한민국의 영웅이며, 저의 우상이기도 합니다.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허리케인, 최강철 선숩니다!”

최강철은 무대 뒤에서 기타를 들고 기다리다가 김철중의 소개를 듣고 눈살을 가볍게 찡그렸다.

쩝, 저 자식 뭐라는 거야!

천천히 걸어 무대로 나가자 대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학생들의 입에서 거대한 함성과 연호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걸어 나오다가 깜짝 놀랐다.

이정석이 노래를 끝내고 들어와 자신이 서 있는 걸 보더니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모든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걸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허리케인, 허리케인, 허리케인!”

무대로 나와 인사를 한 후 한동안 조용히 서 있었다.

이런 함성 속에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운동장을 가득 채웠던 함성과 연호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자 최강철은 마이크를 잡고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최강철입니다. 여러분의 환영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것처럼 곧 토머스 헌즈라는 당대의 영웅과 시합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싸울 생각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주십시오.”

또다시 일어서는 함성.

최강철이 던진 인사만으로도 학생들은 두 주먹을 불끈 치켜들며 최강철의 이름을 다시 연호했다.

그런 행동을 최강철은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제가 헌즈 선수에게 도전한 것은 대한민국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오랜 독재와 죽음을 무릅쓰며 사투를 벌였고 지금 이 순간도 사회정의와 대한민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미국에 있었던 탓에 여러분과 같이 싸우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존경합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도전 의지와 투지만 있다면 대한민국은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 잘살 수 있게 될 겁니다. 저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멋진 대한민국을 위해서 말입니다.”

최강철이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인사를 하자 구름같이 몰려 있던 학생들이 전부 펄쩍펄쩍 뛰었다.

감동을 받은 사람은 저도 모르게 열이 오르며 흥분에 사로잡히는데 그것을 보내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여운의 강도가 달라진다.

뇌관에 불을 붙였다.

최강철은 이곳에 몰려 있는 학생들의 감성에 불을 붙여 화끈하게 타오르도록 만들어 버렸다.

장관이다.

거의 2만에 달하는 학생이 전부 일어나 동시에 함성을 지르자 마치 폭탄이 터진 것처럼 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나 이제 스탠드조차 설수 있는 곳이 없을 정도였으나 뒤늦게 참여하기 위해 달려오는 학생들의 숫자는 아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한동안 뒤로 물러서 있던 최강철이 기타를 높이 치켜든 것은 조금씩 함성 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할 때였다.

“저를 이곳에 참석해 달라고 했던 후배가 사기를 쳤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제 후배는 총학에서 일하는데 어이없게도 오늘 사회를 보고 있네요. 저 친구가 아마 여러분이 들었던 소문의 진원지 일 겁니다. 제가 오늘 노래를 부른다는 소문 말입니다.”

최강철이 자신을 가리키자 김철중이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승리의 브이 자를 마구 그어댔다.

놈은 수많은 학생 앞에서 최강철이 자신을 호명해 준 게 더없이 영광스러운 모양이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인사만 드리고 가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분이 오셨으니 도저히 그냥 들어가기 어렵겠네요. 저는 노래를 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허락해 주시면 한 곡 부르겠습니다, 여러분 제 노래를 듣고 싶으신가요?”

“예!”

모든 학생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최강철이 노래를 하지 않고 그냥 들어가면 데모라도 할 기세였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쓴웃음을 지으며 기타를 고쳐 멨다.

“감사합니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고 한 곡 부르겠습니다. 제가 부를 노래는 저와 여러분이 같이 불러야 하는 노랩니다. 이 노래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강철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르페지오로부터 시작된 전주는 강력한 포크로 이어졌는데 학생들이 수없이 불렀던 익숙한 것이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비장하면서도 장엄함이 물씬 풍겨 나온 노래가 단박에 학생들이 가슴을 저격했다.

이 노래는 대한민국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알았고 수많은 사연을 가졌기에 그 의미가 너무나 특별했다.

노래는 최강철이 먼저 시작했으니 곧 거대한 합창으로 변해 대운동장을 휘돌았다.

노래가 주는 감성과 최강철이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는 감동이 학생들을 전율에 사로잡히도록 만들고 있었다.

절정으로 치닫자 조심스럽게 부르던 학생들의 목구멍이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노래는 절규가 되었고 눈물이 되었으며 의지가 되었다.

그래, 바로 그거다.

너희들은 지금처럼 영원히 변치 않는 푸른 소나무가 되기를 바란다.

기득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희망과 웃음을 주는 멋진 소나무.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부러지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남아 세상을 푸르게 빛내는 올곧은 소나무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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