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86화 (186/308)

[186]

계속되는 압박.

돈 킹은 언론을 동원해서 허리케인과 헌즈의 시합이 왜 성사되지 못하는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홍보하며 밥 애런을 압박했다.

언론에서는 완전히 땡큐다.

허리케인에 대한 이야기는 그 어떤 것도 뉴스거리로 충분하기에 기자들은 돈 킹과 밥 애런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뉴스를 양산했다.

포문을 연 돈 킹은 이 시합에 대한 허리케인의 용기와 도전 의식, 불리함 속에서도 보여준 투지를 칭찬하면서 헌즈는 괜한 트집을 잡지 말고 경기에 임하라는 이야기를 수시로 떠들었다.

그는 인터뷰를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이번만큼은 마치 작정을 한 듯 거침없는 언사로 밥 애런과 헌즈를 비난했다.

반면 밥 애런은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시합은 서로 조건이 맞아야 성사되는 것인데 돈 킹 쪽과 협의가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확정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돈 킹이 늑대라면 밥 애런은 여우다.

럼블 측에서 언론 플레이를 하는 것이 자신을 압박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고 그런 행동의 배경에는 조급함이 들어 있을 거란 판단을 내린 후 계속 시간을 끌었다.

그는 돈 킹이 항복하기를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든 게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동안 조심스럽게 보도하던 언론과 여론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은 최강철의 인터뷰가 방송되고 난 후였다.

최강철은 NBC와의 인터뷰를 통해 복싱 팬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제가 헌즈 선수와 싸우고자 한 것은 복싱을 사랑하는 모든 분께 진정한 도전이 무엇인지 알려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헌즈 선수 측은 저의 그러한 용기를 한낱 치기로 여기며 오로지 돈 벌 궁리에만 빠져 있습니다. 헌즈 선수, 복서는 복서로서의 자존심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로모터인 밥 애런 씨가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세우며 계속 발목을 잡고 있다는데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는 당신이 나와의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면 깨끗하게 포기하겠습니다. 대신 당신을 박살 낸 마빈 헤글러와 싸우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비겁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최강철의 인터뷰 내용이 방송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자 복싱 팬들은 난리를 피웠다.

대단하다.

네가 나와 싸우는 걸 피하면 나는 너보다 더 강한 자와 싸우겠다는 폭탄선언이었다.

물론 헌즈가 계속 변명을 하면서 시합에 응하지 않을 경우란 단서를 달았지만 최강철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정도의 투지를 가졌기에 복싱 팬들은 그에 대한 환호와 헌즈에 대한 비난을 동시에 퍼부었다.

마빈 헤글러가 누군가.

헌즈보다 한 체급 위인 미들급의 통합 챔피언으로 ‘링의 도살자’란 별명을 얻고 있는 절대 강자였다.

그랬기에 복싱 팬들은 최강철의 인터뷰를 들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최강철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은 이유는 그의 경기 스타일이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마력을 가진 것도 있었지만 거침없는 그의 용기와 투지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인터뷰가 나간 후 복싱 팬들의 비난이 폭주하자 언론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불리한 입장에 있는 허리케인의 도전을 사소한 이유로 피하는 헌즈의 비겁함을 질타했고. 밥 애런을 향해서는 돈만 아는 장사꾼이라며 복싱의 숭고한 정신을 훼손시키지 말라는 비판을 거듭했다.

헌즈가 디트로이트에서 휴스턴으로 날아온 것은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5월 초였다.

통합 타이틀전이 1월에 치러졌으니 최강철의 도발을 향해 언제라도 싸울 수 있다고 큰소리 쳤던 게 벌써 4개월 전이었다.

그사이 헌즈는 5차 방어전을 치른 후 휴식을 취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밥 애런은 그에게 훌륭한 프로모터였다.

경기할 때마다 예상치를 웃도는 개런티를 쥐어줬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도전자들을 골라주면서 최상의 전문가들을 붙여주는 것과 동시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기 때문에 그는 이번에도 밥 애런의 결정을 인내 속에서 기다렸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렇게 대답했다.

프로모터인 밥 애런이 시합 날짜를 정하면 언제든지 응하겠다며 기자들에게 강한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상황은 자신의 생각과 전혀 딴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보고 비겁자라고?

누가 나를 향해 감히 비겁자란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복싱을 시작하면서 누군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합을 피한 적이 없었다.

피피노 쿠에바스, 슈거레이 레너드, 로베르토 듀란, 그리고 마빈 헤글러까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전설들과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며 이 자리까지 왔으니 자신은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다.

그가 휴스턴으로 날아오자 밥 애런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두 번이나 만나주지 않았다.

여우같이 비상하게 머리가 돌아가는 밥 애런은 지금 헌즈를 만날 경우 자신의 계획이 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헌즈의 분노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밥 애런이 두 번이나 자신을 피하자 그는 더 기다리지 않고 곧장 사무실이 아닌 집으로 쳐들어갔다.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밥 애런은 자신을 찾아온 헌즈의 모습을 확인한 후 긴 한숨을 흘려냈다.

그가 보고 있던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허리케인과 헌즈의 모습이 나란히 흘러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태연한 모습으로 문을 열어줬으나 이미 헌즈의 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문을 열어주고 거실로 데리고 들어와 소파에 앉히려 했지만 황소같이 거친 숨결만 흘려내며 헌즈는 밥 애런을 노려보기만 했다.

한참 동안 같이 마주 보던 밥 애런의 입술 끝이 슬그머니 올라갔다.

헌즈는 단순해서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 정도의 반항을 한 적이 없었는데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기어코 왔구만. 이렇게 할 정도로 화가 난 건가?”

“밥, 나를 피하다니 실망이오. 피한다고 해결될 거라 생각했습니까?”

“그러니까 만나지 않으려고 한 거야. 헌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놈들은 우리 페이스로 끌려 들어올 수밖에 없어. 놈들이 언론을 동원하고 있는 건 그만큼 안달이 났단 뜻이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나는 그런 거 모릅니다. 저걸 보고 말하세요. 아직도 텔레비전에서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겁자라고 말합니다. 밥, 내가 정말 비겁자요?”

“이 사람아, 그럴 리가 없잖아. 저건 돈 킹이 꾸며 낸 음모에 불과해!”

“내가 들어보니 허리케인은 경기를 성사시키지 못하면 돈 킹과의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더군요. 밥, 나는 당신이 얼마를 더 버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한마디만 하죠. 당장 허리케인과 날짜를 잡아주시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 역시 당신과의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프로모션을 찾아보겠소!”

* * *

5월의 푸르름과 가장 어울리는 곳은 젊음이 넘쳐흐르는 캠퍼스다.

캠퍼스는 5월이 되자 생동감으로 가득 찼다.

학생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고 캠퍼스에는 꽃과 나무들이 따뜻한 봄 햇살과 함께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켰다.

캠퍼스는 축제를 알리는 플랜카드로 덮여 있었다.

서울대의 축제는 대학 축제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그럼에도 각 단과 대학에서 마련한 행사 플랜카드가 여기저기에서 날 봐달라는 듯 펄럭거리고 있었다.

김철중이 다가온 것은 강의가 끝난 후 점심을 먹기 위해 걸어 나갈 때였다.

3학년 들어 경영대 학회장을 맡은 김철중은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최강철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왔다.

“선배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어요?”

“뭔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밥 먹으러 갈 거야. 같이 먹을래?”

“그럼요.”

두 사람이 걸어 나가자 중간에서 박정빈과 김현영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멀찍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뒤늦게 따라붙었는데 뭔가 내용을 아는 것 같았다.

대학 구내식당은 학생들로 언제나 만원이다.

하지만 그 시간도 한 시간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산하게 변한다.

밥을 먹고 커피를 뽑은 후 경영대 쪽으로 걸어가 잔디밭에 앉았다.

이제 학생회 일로 얼굴 보기 힘들었던 김철중의 이야기를 들어볼 시간이었다.

“이제 말해봐. 뭐야?”

“어제 총학생회장이 찾아왔습니다. 선배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으니까 꼭 한번 만나게 해달랍니다.”

“나한테 부탁할게 있다고, 그게 뭐지?”

“축제 마지막 날 총학생회에서 주관하는 전체 행사가 있습니다. 그때 총장님 인사도 있고 선배님들과의 대화 시간, 각 동아리에서 마련한 공연도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뭐?”

“선배님도 아시겠지만 전체 행사에는 사람들이 오지 않아요. 총학에서 신경 쓰고 매년 마련하는 행사지만 재미가 없어선지 텅텅 비거든요. 그래서 총학생회장이 선배님께서 참석해 주기를 부탁할 모양입니다.”

“나보고 얼굴마담 해달라는 얘기냐?”

“그런 거죠. 더불어 옛날 동아리에서 노래한 게 소문이 났나 봐요. 가능하면 기타 연주도 부탁드릴 생각인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네. 싫다!”

“지금 생각이 복잡하다는 건 알지만 오랜만에 학생들을 위해서 참석해 주세요. 서울대생들은 축제 때만 되면 창피해서 얼굴 들고 다니지를 못해요. 다른 학교 학생들이 맨날 놀린단 말입니다. 행사라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 학술 세미나 같은 거라서 여자 친구들을 데리고 올 생각조차 못 해요. 그러니까 선배님,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서라도 한번 나서주시죠?”

“어째 너 행동이 이상하다? 총학생회장이란 놈은 아직 코빼기도 안 보였는데 왜 네가 더 난리냐?”

“사실… 그 아이디어를 낸 게 저거든요.”

최강철이 슬그머니 째려보자 김철중의 고개가 땅바닥을 향해 팍 내리꽂혔다.

더불어 옆에 있던 놈들도 비슷한 행동으로 그와 생각이 같다는 걸 나타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행사에 왕림하여 불쌍한 총학과 학우들을 구해주시길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총학생회장의 정식 부탁을 받은 최강철은 고개를 끄덕인 후 참석하겠다는 말을 해주었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부들부들 떨던 총학생회장은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열두 번이나 더 숙인 후 자리를 떠나갔다.

축제에 참석하겠다고 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2년 내내 자신을 따라다니며 봉사를 했던 김철중에 대한 배려였고 또 하나는 대학 3학년이 되도록 제대로 된 추억 하나 만들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비록 수업을 빼먹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막상 되돌아보면 대부분의 청춘이 하는 짓을 그는 하나도 해보지 못했다.

학교생활의 반은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다녔고 나머지 반은 복싱을 위해 시간을 보냈으니 그는 학생들의 낭만을 경험한 적이 없다.

더불어 이 시간이 어쩌면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시간일지 모른다.

현재 미국에서는 돈 킹과 밥 애런의 실무 협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조만간 경기가 잡힐 가능성이 컸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돈 킹과 밥 애런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고 직접 나선 것이 상황을 풀어나가는 묘수로 작용했다.

밥 애런은 더 많은 돈을 원했고 돈 킹은 그것을 핑계로 시합을 원하지 않았으니 두 사람은 시늉만 하면서 시간만 끌고 있었기에 먼저 NBC 측에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인터뷰가 나간 후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헌즈가 먼저 견디지 못했고 그 뒤를 밥 애런이 따랐다.

어제 온 돈 킹의 전화 내용은 밥 애런과 커다란 사안은 대부분 협의했고 주관 방송국 선정과 경기장 섭외 등에 관한 것들만 남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가장 민감한 사안들은 전부 해결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실무 협상까지 끝나면 날짜가 정해진다.

그리고 그는 그 날짜가 정해지는 대로 또다시 훈련에 돌입할 생각이었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스멀거리며 조여 왔다.

두려움이나 긴장감 때문이 아니라 간절하게 원하던 것을 이루게 되었다는 흥분 때문이었다.

‘디트로이트의 코브라’, ‘히트맨’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토머스 헌즈.

그와의 대결은 복싱을 시작하면서 계속 가져왔던 꿈이었다.

기다려, 헌즈.

링에서 당신과 만날 날을 나는 간절히 기다려 왔어.

사람들은 체급이 차이나는 것 때문에 내가 불리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으나 절대 그렇지 않을 거야.

방심하지 말고 열심히 훈련해서 나와.

나를 실망시키지 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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