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 * *
윤문호 교수는 아침 일찍 학교로 나와 교수실에서 차를 마신 후 학생회관으로 향했다.
대한민국이 전부 잠이 들었다.
아니다, 잠이 들었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거리에는 차가 보이지 않았고 거의 모든 가게가 철시를 했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금 간절한 마음으로 모여 있을 것이다.
무엇일까.
그들의 가슴에 들어 있는 감정은.
아마 그들도 나와 같겠지.
차를 타고 학교로 나올 때, 교수실에서 커피를 마실 때, 그리고 떨리는 걸음으로 학생회관을 향해 걸어가는 자신처럼 그들은 오늘 벌어지는 경기에서 최강철이 승리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학생회관은 이미 성지로 변해 있었다.
최강철의 경기가 벌어질 때마다 학생회관은 학생들로 인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는데 경영대의 행사는 이제 학교 전체의 행사로 변해 버렸다.
학생들은 거기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화면을 지켜본다.
학생회관으로 들어서자 칼날처럼 차가운 바람이 사라졌고 온몸을 얼려 버릴 듯한 추위 역시 숨을 죽였다.
뜨겁다.
젊은 열기로 가득 찬 학생회관은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날려 버릴 정도로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학생들이 마련해 준 좌석을 향해 다가가자 먼저 와 있던 동료 교수들이 인사를 해왔다.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웃고 있었지만 웃는 게 아니다. 그들도 나도.
30분 정도 텔레비전을 지켜보자 화려하게 빛나던 특설 링의 빛이 모두 꺼지더니 문을 통해 최강철의 모습이 보였다.
당당한 걸음으로 링을 향해 다가가는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윤문호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부여잡았다.
학생회관을 가득 채운 학생들의 입에서 벼락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으나 그는 입을 열어 그 함성에 동조할 수 없었다.
응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저 머나 먼 타국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최강철.
그 이름 석 자.
왜 서울대에 합격했으면서 휴학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냐는 그의 질문에 최강철은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교수님. 청춘의 힘은 꿈에서 나오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부끄러웠다.
서울대라는 명예에 기대어 타인들을 얕보았던 자신의 처신과 생각이 얼마나 짧고 부끄러웠단 말인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돌아온 최강철은 그에게 언제나 복서가 아닌 학생으로 다가왔다.
비록 최근 들어 거대한 시합이 연이어 잡히는 바람에 수업에 빠진 경우도 있었으나 그는 슈퍼스타답지 않은 겸손함과 순수를 지닌 채 학생의 본분을 다했다.
어느 날 불쑥 찾아와 고아들을 돕겠다고 말했을 때 그를 칭찬해 주었다.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니 사회에 자신이 받은 사랑을 환원하고 싶다는 말에 기꺼움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가 파이트머니로 받은 돈을 전부 고아원과 장학금으로 쏟아부을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화를 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남들을 돕는 것도 분수를 지켜야 한다며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나 최강철은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을 뿐이다.
“저는 살면서 배운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죠.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욕심을 부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인 거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생각과 행동은 가르쳐야 할 범주를 넘어섰으니 자신은 스승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강철, 이겨라.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겨다오.
너는 단순한 복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영웅이지 않느냐.
영웅은 절대 져서는 안 돼!
최강철은 화려한 불빛 속에 섰다.
링은 언제나 똑같고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함성 역시 비슷했으나 링에 올라설 때의 느낌은 언제나 달랐다.
“강철아, 물 줘?”
“아뇨, 됐습니다.”
“그럼 나중에 목만 축여.”
“좀 웃어요. 너무 경직돼서 금방 쓰러질 것 같잖아요.”
“그래.”
최강철이 말하자 윤성호가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마치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긴장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건 이성일도 마찬가지였다.
놈은 라커룸부터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더니 이제는 가뭄 속의 논두렁처럼 타들어가고 있었다.
“강철아, 절대 무리하면 안 돼. 시합하다 우리 작전대로 먹히지 않아도 당황하지 말고 뒤로 물러서.”
“예.”
“시합 끝나면 내가 낚시 가르쳐 줄까?”
“또 그 소립니까? 나는 낚시하고는 상극이라고 말했잖아요.”
“아 참, 그렇지. 그럼 골프 배워볼래?”
나름대로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한 말이겠지만 윤성호의 정신은 반쯤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수많은 격전을 치렀지만 이 경기를 맞이하는 그의 긴장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이 자식은 왜 안 나와!”
최강철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빙그레 미소를 짓자 윤성호가 소리를 빽 질렀다.
어떤 말이라도 해야 한다.
지금은 무슨 말이라도 해서 최강철의 긴장감을 조금이라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삑사리다.
이미 허니건은 문을 통과해서 실내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강철은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링으로 오르는 허니건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모습이 나타나는 순간 미소는 지워졌고 뜨거운 투지만이 그의 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짙게 가라앉은 눈.
허니건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독수리처럼 날카로웠고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번들거렸다.
허니건이 그의 시선을 확인한 후 인상을 쓰며 주먹을 들었으나 최강철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허니건, 지금부터는 아니야.
이제부터 네 자신감을 철저하게 짓밟아줄게.
지루한 행사가 연이어 벌어졌고 국가 의례를 끝으로 모든 행사가 끝나자 장내 아나운서가 그 옛날 목숨을 걸고 싸우던 검투사를 소개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끌어 올렸다.
“신사 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양 선수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청 코너, 키 178㎝, 몸무게 66.8㎏. 24전 24KO승. 현 WBA, IBF 챔피언. 무패를 기록하고 있는 동양의 갈색 폭격기, 허리케인 최강철!”
소개를 시작할 때부터 뜨거웠던 관중들의 반응은 최강철의 이름이 불리자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링 사이드 VIP 좌석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펄쩍 뛰었는데 그 모습이 고스란히 화면에 잡혔다.
그 여자들의 정체가 바로 미국을 대표하는 영화배우 샤론 킴과 빌보드 차트 연속 12주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가수 그레이스였기 때문이다.
뒤이어 허니건의 소개가 이어졌다.
“홍 코너, 키 180㎝, 몸무게 66.9㎏. 33전 32승 1패, 25KO승. 현 WBC챔피언, 카리브해의 악마, 상대를 잡아먹는 절대 맹수 로이드 허니건!”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였을까.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찢어질 것처럼 소개의 말미에서 솟구쳐 올랐다.
최강철을 소개할 때보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컸고 멘트도 더 강력했다.
“저 씨발 놈이 뭘 잘 못 처먹었나. 왜 선수 소개 하는데 차별을 두는 거야. 죽을라고!”
그냥 있을 이성일이 아니었다.
놈은 사회자를 보면서 눈을 부라렸지만 사회자의 시선은 링의 중앙으로 나와 인사하는 허니건 쪽을 향하고 있었다.
허공에 대고 이단 옆차기를 한 것과 비슷했기에 놈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달래줄 시간이 없었다.
선수 소개가 끝나고 곧장 심판이 양 선수를 링의 중앙으로 불러 모았던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강철아, 작살을 내자. 지금까지 까불었던 거 여기서 전부 되돌려 주는 거야. 아자, 아자. 가자!”
“강철아, 절대 대주면 안 된다. 저 새끼한테 대주면 절대 안 돼!”
이성일과 윤성호가 번갈아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긴장하고 있더니 시합이 시작되는 순간이 되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걸 보면 경험이란 놈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최강철은 링의 중앙으로 나간 순간부터 허니건을 무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시합에서는 몇몇 경기 빼고 다른 곳을 보거나 고개를 숙인 채 심판의 주의 사항을 들었지만 이번만큼은 기세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듯 허니건을 압박했다.
허니건도 물러서지 않았다.
경기 전에 펼쳤던 신경전의 종지부를 찍겠다는 듯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콧김을 쏟아내며 이마를 최강철을 향해 바짝 들이밀었다.
입에서 역겨운 냄새가 쏟아져 나왔다.
눈은 번들거렸고 온몸은 뭘 처발랐는지 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최강철의 입이 열린 것은 허니건의 이마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찍어왔을 때였다.
“그러다 눈깔 찢어지겠다, 이 새끼야. 주둥이 좀 다물어. 냄새나니까!”
“뭐라고, 이 동양 새끼가!”
“함부로 날뛰지 말고 심판 말씀이나 잘 들어, 경기 시작하기도 전에 뒈지지 말고.”
최강철의 도발에 허니건이 참지 못하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심판이 주의 사항을 말하다 말고 급하게 허니건의 몸통을 부여잡아 코너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최강철은 꼼짝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링의 중앙에서 한동안 허니건을 노려보다가 심판이 코너를 가리켰을 때야 천천히 자신의 코너를 향해 돌아갔다.
이제 운명의 시간이다.
내가 세계 최강이란 것을 증명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때앵!
코너로 돌아와 마우스피스를 입에 문 최강철이 공 소리와 함께 링의 중앙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맞은편에서는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허니건이 미친 들소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 * *
“아이고, 살 떨려!”
장내아나운서가 선수를 소개하는 순간 김영호가 자신이 들고 있던 소주병을 아예 나발 불었다.
이 경기를 기다리면서 소주를 한 병이나 비웠던 그는 단숨에 다섯 모금을 들이마신 후에야 입에서 소주병을 떼어냈다.
“야, 천천히 마셔. 그러다 시합도 못 보고 뻗어.”
“지는, 넌 벌써 두 병이나 마셨잖아!”
“흐흐… 강철이 전적 좀 봐라. 정말 환상적이잖냐. 이러다 세계 기록도 경신하겠다.”
“아직 멀었어. 세계 기록은 라머 크라크가 가지고 있는데 44연속 KO승이야.”
“그래?”
“허니건 소개한다. 저 새끼 전적도 만만치 않아.”
“저놈은 정말 물소처럼 생겼단 말이야. 그런데 왜 별명이 비스트야, 카리브해의 악마는 또 뭐고. 장내 아나운서 저 새끼 강철이 소개할 때보다 목소리가 더 크잖아. 저 씨발 놈이 차별 대우 하는 건가?”
“야, 이제 조용히 해. 곧 시작한다고. 옆 사람들이 째려보잖아!”
류광일이 소리를 지르자 김영호가 그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새벽부터 나와 잠실야구장 스탠드 로얄석을 차지하고 있던 그들의 주변에는 사람들로 꽉 차서 움직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푸른색 바탕에 최강철의 모습이 새겨진 청색 깃발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잠실경기장은 온통 푸른 물결이었다.
추위로 인해 예전보다 관중들은 줄어들었으나 그럼에도 잠실야구장의 스탠드는 구름처럼 많은 관중들이 몰려든 상태였다.
이윽고 대형 화면을 통해 두 선수가 링의 중앙에 마주 서자 관중들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강철이 눈 봐라. 무시무시하네. 인터뷰 때와는 전혀 달라.”
“눈으로 죽인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겠다. 마치 번갯불이 튀는 것 같아. 강철이가 아주 작심한 모양이네.”
“어… 어!”
두 선수가 눈싸움을 하다가 허니건이 갑자기 주먹을 치켜드는 순간 김영호의 입이 떠억 벌어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꺼운 파카를 입어서 눈사람처럼 보이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다가 균형을 잃었기 때문에 류광일이 부축하지 않았다면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 미친놈, 얻다대고 벌써부터 주먹질이야? 짐승이라더니 매너가 개판이잖아.”
“와아, 강철이 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어. 우리 강철이. 씨발, 너무 멋있다.”
“아우, 살 떨려. 영호야, 드디어 시작한다.”
“씨발, 소주를 너무 마셨나. 하필이면 이때 오줌이 마렵냐.”
“그냥 싸, 이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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