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78화 (178/308)

[178]

* * *

미국에서 도박은 불법이었으나 예외로 합법인 주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라스베이거스다.

급격하게 늘어난 도박 시장의 규모는 무려 800억 달러에 달했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미식축구였고 슈퍼볼이 벌어질 때는 100억 달러가 움직인다는 통계가 나왔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큰 시장이 바로 프로 복싱이었다.

특히 빅 매치가 벌어질 때마다 전 세계의 도박사들이 라스베이거스로 몰려들어 슈퍼볼 못지않은 금액이 베팅되곤 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박사는 패터슨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는 승률 80%를 자랑했고 한 해에 움직이는 돈이 1억 달러에 육박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동물적인 감각과 수많은 데이터에서 얻어낸 분석, 그리고 과감한 베팅은 미국 제일의 도박사란 칭호를 그의 이름 앞에 붙도록 만들었다.

그는 혼자 움직이지 않은 것이라 ‘타이푼’이라는 회사를 차려 여러 종목의 스포츠에 베팅을 했는데 직원 숫자가 20여 명에 달했다.

패터슨이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부사장 챨리를 부른 것은 빅 매치가 벌어지기 2일 전 늦은 저녁이었다.

“챨리, 현재 베팅률은 어떻게 되고 있나?”

“6.5 대 3.5까지 내려갔습니다.”

“상당히 내려갔군.”

“사장님이 허니건 쪽으로 천만 달러를 베팅한 것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요즘 도박사들은 자신들의 감을 믿지 않고 통계를 믿습니다. 통계가 없는 놈들은 우리와 자이언츠의 움직임을 주시하죠. 우리와 자이언츠가 동시에 허니건을 선택했으니 베팅률이 내려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자이언츠는 그들과 쌍벽을 이룬다는 도박사들의 집단이었다.

패터슨이 혼자 회사를 차린 것과 다르게 자이언츠는 유력 도박사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전문가 집단이었다.

“내일이지?”

“예, 보스. 내일 오후 3시에 문을 닫습니다.”

“그럼 말이야. 이제 쉐도우를 움직일 준비를 하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패터슨의 말에 챨리가 깜짝 놀라며 고함을 질렀다.

쉐도우는 비밀리에 운영하는 대리 베팅자들의 암호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20개 구좌에 5천만 달러를 때려 넣는다. 폐장 직전에 베팅하도록.”

“누구에게 말입니까?”

“누구긴 누구야, 허리케인이지.”

“헉, 보스. 저는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시장은 허니건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쪽 자료도 그렇게 나왔잖습니까?”

“챨리, 그건 일부러 만들어낸 허상의 자료다.”

“누가요?”

챨리가 눈을 부릅뜨고 의문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천천히 얼굴을 굳히며 패터슨의 얼굴을 향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저까지 속이신 거군요.”

“도박은 자기 자신도 속여야 승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너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도박이란 괴물을 대하는 우리의 운명이야.”

“하지만 보스, 이번 경기는 자료가 아니더라도 전문가들조차 승부를 장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가지셨는지 대충 알겠지만 5천만 달러를 베팅하는 것은 무립니다. 재고하셔야 합니다.”

“챨리, 내가 왜 라스베이거스에서 제일이 된 줄 알아?”

“이유가 있단 뜻이군요.”

“이번 경기는 허리케인이 이긴다. 내가 지켜본 그놈은 악마의 숨결을 가지고 있어. 그런 놈을 야수주제에 어떻게 이기겠나. 나는 내 직감을 믿었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니 나를 믿어라. 며칠 후면 우린 거액을 챙기게 될 것이다.”

* * *

최강철은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허니건의 거침없는 언사를 무시한 채 대응조차 하지 않고 조용하게 있다가 홀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대응하지 않기로 한 이상 끝까지 윤 관장의 지시를 따라줄 생각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신경전이다.

적의 신경을 건드려 흥분을 하도록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전략을 숨기기 위해 당해주는 것도 그중 하나다.

“어쩐 일이냐. 그렇게 방방 뜨더니.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이기고 싶어서요.”

옆구리를 꾹 찌르는 윤성호를 향해 최강철이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의 대답에 장난스럽던 윤성호의 얼굴이 금방 굳어졌다.

무슨 뜻인지 안다.

그도, 나도 그리고 옆에서 따르던 이성일도 모두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오랜 세월 이날만을 위해 달려왔다.

아무것도 없이 불알 두 쪽만 찬 채 미국으로 넘어온 지 벌써 7년의 세월이 지났고 이제 그 마지막 일전을 남기고 있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새삼 최강철이 복싱을 하겠다고 찾아왔던 때가 기억났다.

그때 윤성호는 그가 허수아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바짝 마른 몸.

너무 말라서 건드리면 금방 쓰러질 것처럼 형편없는 육체를 가진 놈이었다.

최강철이 웰터급 세계 챔피언에 오르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어이가 없어 제대로 웃지도 못했다.

최강의 포식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웰터급은 복싱을 주름잡는 황금 체급이었고 동양인이 넘볼 수 없는 벽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놈의 트레이너가 되어 아마추어 복싱을 평정하면서도 그런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으로 넘어와 승승장구를 하면서 결국 이 자리까지 서게 되었으니 그의 지금 심정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불가능은 현실이 되었고 그와 최강철은 세계 최강을 위해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믿어지는가, 이 현실이.

자신의 얼굴이 굳어진 것은 최강철만큼 승리에 대한 그의 갈망이 컸기 때문이었다.

“강철아, 설마 지금 나한테 농담하고 있는 건 아니지?”

“농담으로 들렸어요?”

“아니… 네 대답이 너무 솔직해서 놀랐을 뿐이야.”

“그러고 보면 우리 참 열심히 달려왔네요.”

“그래, 열심히 했다. 특히 네가.”

“나만 한 게 아닙니다. 우리 전부 같이한 거죠.”

“고맙다. 그렇게 말해줘서.”

“걱정되십니까?”

“또 묻는구나. 당연히 걱정된다. 이겨도 져도 그럴 것 같아. 강철아,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되겠니?”

“아뇨,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 * *

‘뉴욕의 사랑’ 팀은 서둘러 촬영을 마쳤다.

감독인 서영훈은 오늘 촬영 일정을 최소로 잡았는데 오후 4시가 되자 즉시 카메라를 접어버렸다.

무슨 일 때문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배우들은 물론이고 스태프들까지 부랴부랴 촬영장을 떠났다.

드디어 내일 최강철의 경기가 벌어지기 때문에 서영훈은 오늘 하루 내내 붕 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연출은 물론이고 카메라 기사, 음향 담당, 심지어 배우들까지 뭔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허둥거렸다.

유진선이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을 때 이미 단짝인 박정현은 밴의 뒤쪽에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조연으로 출연하는 박정현은 그녀와 고등학교부터 알고 지낸 단짝이었고 소속사도 같아 한차로 촬영장에 왔다.

“커튼 좀 쳐. 속옷 보이잖아!”

“보이면 어때, 봐줄 남자도 없는데.”

“봐줄 남자 있으면 보여줄래?”

“최강철 같은 남자라면 백번도 넘게 보여줄 의향이 있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박정현이 다가오며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연예인답게 그녀는 번개처럼 옷을 갈아입었는데 청바지 지퍼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올렸다.

정말 남자가 봤다면 입맛을 쩍쩍 다실 정도로 뇌쇄적인 모습이었다.

비록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그녀 역시 돋보이는 미모와 몸매를 지녔고 얼굴 반을 차지할 정도로 큰 보조개를 가지고 있어 남자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유진선은 그녀의 농담에 가자미눈으로 만들어 째려봤다.

그녀는 유진선이 최강철의 광팬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장난을 수시로 하곤 했는데 점점 그 강도가 진해지고 있었다.

“진선아, 정말 그 남자 만나지 않기로 했어. 사실대로 말해봐. 정말 궁금해 죽겠단 말이야.”

“절대 말 안 해줘. 나 혼자 간직하고 있을 거야.”

“얼씨구. 야. 그게 무슨 보물이냐? 혼자 가지고 있게. 비행기 같이 타고 간 걸 가지고 너무 비싸게 구는 거 아냐?”

이번에는 박정현이 눈을 흘겼다.

유진선이 미국에서 돌아온 순간부터 수없이 물었으나 그녀는 비행기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했다.

물론 모든 것을 닫은 건 아니었다.

그녀가 입을 닫은 건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와 그녀에게 있었던 비밀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이 알고 싶었다.

그녀가 느꼈던 그 감정과 남자의 반응, 그리고 둘 만이 있었을지 모를 약속에 관한 것 말이다.

유진선과 최강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너무나 듣고 싶었지만 그녀의 입은 자물쇠처럼 닫아건 채 열리지 않았다.

“진선아, 내일 최강철 선수 시합을 하잖아. 11시부터라며?”

“응.”

“내가 어제 밤에 꿈을 꿨는데 아무래도 이번 시합은 불안해. 전문가들도 최강철 선수가 불리하다고 그러더라.”

“아냐, 그럴 리 없어. 이번에도 그 사람이 이겨. 반드시 이길 거야!”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우리 돌아가신 할머니가 꿈에 나타나서 그러잖아. 아무래도 힘들 것 같대.”

“너 그 말 정말이야?”

“응.”

“거짓말 하지 마. 자꾸 그러면 정말 불안해지잖아.”

“할머니가 그러셨어. 네가 그때 있었던 일을 말하면 이길 거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너한테 꼭 그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했는데 그래도 말 안 할 거니?”

“이게, 정말 죽을라고!”

유진선이 도끼눈을 뜨면서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거짓말이란 걸 안다. 박정현이 매번 물었음에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협박까지 하는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주먹을 치켜뜬 그녀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듣고 싶어 하니까 할머니가 나타난 모양이야. 설마 그러기야 하겠니. 너무 신경 쓰지 마. 개꿈이겠지, 뭐.”

“아무 일도 없었어.”

“뭐가?”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고. 전화번호도 묻지 않았고 서로 잘 가라며 악수하고 헤어졌을 뿐이야.”

“그런데 왜 지금까지 뭔가 있는 것처럼 숨긴 거니?”

“고백을 하기는 했어. 내가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말했거든.”

“정말이야! 그랬더니?”

“나를 바라보는 그 사람 눈이 너무나 편안했어. 지금도 그 눈길을 잊을 수가 없을 만큼. 나한테 고맙다고 말하더라. 그런 마음을 보여줘서 너무 고맙다며 활짝 웃었어. 그래서 말을 하지 않았던 거야. 나만 혼자 그 시선과 목소리를 간직하고 싶어서.”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짝사랑이란 건 원래 그런 거잖아. 그렇게 될 줄 뻔히 알면서 혼자 아파하고 설레는 것. 그렇지 않아?”

“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뭐가 그리 소중해. 정말 사랑하면 뺏어야 되는 거잖아. 그래야 행복해지는 거야!”

“나는 그 남자를 여전히 좋아해.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거기서 확실히 알았어. 그래서 나는 지금 너무 편안해. 그 사람 모습을 보면 여전히 떨리지만 이젠 아프지 않아.”

“진선아, 너 이상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이젠 다 말했으니까 할머니가 그 사람이 이기도록 도와줄 거야. 그렇지?”

최강철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몸을 충분히 풀었기 때문에 열기가 몸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돈 킹과 톰슨은 라커룸에 들어온 후 그저 어깨만 두드려 주었을 뿐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윤성호와 이성일도 마찬가지였다.

라커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긴장감이 끈끈한 아교처럼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환호 소리가 마치 환청처럼 들려왔으나 최강철은 눈을 뜨지 않았다.

조금 후면 진행 요원이 달려오겠지만 아직도 시간은 남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리듬을 타는 것처럼 목을 움직였다.

나는 긴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이 경기가 어떤 경기보다 중요했고 강한 상대라 해도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눈을 뜨자 화면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라커룸에는 두 대의 카메라가 자신을 찍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고스란히 방송되고 있었다.

뒤이어 번들거리는 몸을 한 채 몸을 풀고 있는 허니건의 모습이 나타났다.

방송국에서는 두 선수의 모습을 보여주며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이윽고 경기 진행 요원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출전을 알렸다.

출전은 그가 먼저다.

비록 통합 타이틀전이었지만 사전 협의하에 그가 먼저 출전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문을 나섰다.

검은색 가운의 앞과 뒤에는 수많은 기업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는데 전부 후원 업체들의 문양들이었다.

전부 돈이다.

이 한 벌의 가운에 무려 300만 달러가 들어 있었으니 세상에서 가장 비싼 옷일 것이다.

대기실 복도를 걸어 특설 링으로 들어서는 문이 열리자 그를 향해 거대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그들을 향해 팔을 번쩍 치켜 올리며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누가 나를 향해 약자란 표현을 썼단 말인가.

나는 약자가 아니라 포식자다.

어떤 괴물이 와도 부숴 버리는 강력한 챔피언이 바로 나란 말이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