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77화 (177/308)

[177]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누군가에게는 땀을, 누군가에게는 눈물을, 누군가에게는 슬픔과 기쁨을 선사해 주는 시간의 흐름은 사람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만 언제나 공정하기도 하다.

최강철은 레드불스로 넘어온 후 제프 카터와 이성일이 만든 전략을 소화하며 구슬땀을 흘렸다.

이제 일주일 후면 세계 통일을 꿈꿔왔던 자신의 목표와 마주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허니건을 ‘비스트’라 부르며 승패를 알 수 없는 팽팽한 경기가 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으나 최강철은 그에 대해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허리케인은 애송입니다. 내가 언제 경기를 끝낼 수 있냐고 물었습니까? 나는 거기에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그건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허리케인에게 달렸기 때문입니다. 내 펀치를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그에게 물어보시오.”

허니건은 별명답게 거침없는 입담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최강철은 기자들의 질문에 그저 웃음만 지었을 뿐이다.

강한 자신감은 자칫 허풍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강력한 힘을 가진 자의 입에서 나온다면 공포로 변하게 된다.

그랬기에 언론은 허니건의 연이은 선언을 여과 없이 기사로 내보내며 그의 승리를 조심스럽게 점치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도박사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최고의 배팅액과 승률을 자랑하는 도박사 패터슨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허니건의 승리를 예측했기 때문에 현재 도박 시장은 허니건의 우세로 흐르는 중이었다.

더불어 최강철의 태도도 기자들의 기사 내용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허니건의 도발에 쓴웃음을 지으며 원론적인 대답만 하는 그의 태도에서 기자들은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번 경기는 진정한 통합 타이틀전입니다. 저는 이번 시합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온 일행은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널브러졌다.

하루 종일 고된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들은 언제나 이런 자세로 휴식을 취했다.

기자 인터뷰는 한 달에 한 번만 했고 어제가 마지막 인터뷰였다.

윤성호는 집으로 들어온 후 신문을 펼쳤다.

신문에는 양 선수의 인터뷰 내용이 적나라하게 실렸는데 기자는 묘하게 허니건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다.

하긴, 그건 뉴욕타임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들이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신문을 본 윤성호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졌다.

“이 자식들 변덕이 죽 끓는 듯하는구만. 언제는 허리케인이 최고라더니 이제는 금방 쓰러질 것처럼 써놨네.”

“강철이가 인터뷰하면서 제대로 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기자들도 사람이잖습니까. 제대로 응해주지 않으면 지들 마음대로 갈긴다니까요.”

“맞아, 이 모든 게 관장님 탓이야.”

이성일이 입을 주욱 내밀며 주절거리자 최강철이 맞장구치며 윤성호를 째려봤다.

윤성호의 엉덩이가 단박에 들썩였다.

그는 최강철의 시선을 받자마자 도저히 억울해서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게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냐. 우리 전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거잖아. 특히 성일이! 모든 작전 구상은 성일이가 다 한 거라고. 안 그러니?”

“전 잘 모르겠는데요.”

“야, 이 자식아. 우리 작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면 최대한 허니건을 방심시켜야 한다고 말한 건 너잖아!”

“그건 그냥 혼자 해본 소립니다.”

“우와, 미치겠네.”

윤성호가 주먹을 번쩍 치켜들자 이성일의 엉덩이가 자동으로 후퇴했다.

적의 공격에 더없이 최적화된 회피 기동이었다.

최강철의 입이 열린 건 두 사람이 몸싸움을 벌이며 투닥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 자식 인터뷰하는 걸 보니까 아주 날 똥개 취급하더군요. 관장님, 난 더 이상 못 참아요. 공식기자회견에도 그렇게 나오면 박살 낼 거니까 말리지 마세요.”

* * *

미국의 3대 방송 중 하나인 NBC는 입찰을 통해 세기의 빅 매치 통합 타이틀전의 중계권을 따내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이런 빅 매치의 중계권을 따냈다는 것은 단순한 방송국의 인지도 향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금액의 수익 확보가 동반되기 때문에 회사 측은 축제 분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벌써 메인이벤트의 광고는 평소보다 5배 비싼 가격으로 3달 전 이미 전부 판매가 끝난 상태였고 두 선수에 관한 특집 방송을 만들 때마다 광고가 물밀듯 밀려들었기 때문에 광고 담당 이사의 입이 귀에 걸릴 정도였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이 있다.

기회를 잡았을 때 최대한 노력해서 많은 성과를 이뤄야 한다는 뜻이다.

그건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적용되는 진리였기에 NBC는 지금까지 3차례의 특집 방송을 마련해서 광고 수익을 챙겼다.

프로그램의 특성은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에는 두 선수의 경기 영상 하이라이트를 방송했지만, 두 번째는 선수들의 주 무기들을 조명했고, 세 번째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선수들을 분석하며 양 선수의 장단점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특집 방송을 마련한 NBC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예고 방송을 때리며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세기의 빅 매치, 승자는 과연 누구인가?

오늘의 주제는 바로 전문가들을 출연시켜 승자를 예측하는 것이었다.

출연자는 북미 복싱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전문가들이었는데 한 명은 핸드릭슨이었고 맞은편에 앉은 자였다.

핸드릭슨은 복싱 전문지 ‘링’의 고문으로 주요 타이틀전의 관전평을 도맡아 쓸 정도였고 지미 렉스는 레너드가 속했던 ‘피닉스 클럽’의 기술 자문으로 근무하며 7명의 세계 챔피언 전략 전술을 담당했던 사람이었다.

앵커인 해리스 홀던의 진행 능력은 NBC가 보유한 아나운서 중 최고다.

그가 주요 특집 방송의 앵커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는 건 그만큼 프로그램을 이끌어 나가는 능력과 출연자들을 교묘하게 자극시켜 시청자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진행은 최근 벌어진 양 선수의 하이라이트 영상부터 시작되었다.

오프닝부터 강력한 임팩트를 심어주는 건 프로그램이 갖는 기본적인 패턴이었다.

“시청자 여러분. 오늘은 5일 후 허리케인과 허니건 선수가 벌이는 세기의 빅 매치, 그 승리를 예측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오늘 출연하신 전문가 두 분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계신데요. 먼저 허니건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는 핸드릭슨 씨에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핸드릭슨 씨 허니건의 승리를 예측하고 계신데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허리케인이 뛰어난 복서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는 화려한 복싱을 구사하며 현재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허니건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허니건은 특유의 더티 복싱 때문에 실력보다 훨씬 저평가된 대표적인 선수입니다.”

핸드릭슨이 잠시 말을 끊고 앵커와 맞은편에 앉은 제미 렉스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런 후 곧바로 가지고 온 자료를 펼쳤다.

“그럼 지금부터 허니건의 승리를 예측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화면에서 보는 것처럼 허니건 선수가 가장 무서운 점은 상대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능력이 어떤 선수보다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특히 상대를 몰아넣고 퍼붓는 양 훅을 보십시오. 상단에서 내리꽂히기도 하지만 위로 돌고래처럼 솟구쳐 오르기도 합니다. 각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죠…….”

수염을 길게 기른 핸드릭슨은 자신이 준비한 자료 화면을 짚어가며 하나씩 설명해 나갔다.

허니건의 장점을 짚어나가는 그의 눈은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잔뜩 담겨 있었다.

그의 설명은 거의 10분 동안 이어졌고 설명을 듣고 있던 앵커 해리스 홀던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핸드릭슨의 설명이 끝났을 때 그의 시선은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말 예리한 분석이었습니다. 핸드릭슨 씨의 설명을 들어보니 허니건 선수가 왜 엄청난 전적을 가지고 있는지 알겠군요. 핸드릭슨 씨, 만약 허니건 선수가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통합 타이틀을 계속 지켰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은 선수입니다. 그 당시 부상만 아니었다면 승승장구를 계속하며 복싱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챔피언으로 기록되었을 겁니다. 정말 아쉬운 건 레너드와의 한판 승부를 앞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슈가레이 레너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당시 레너드는 무관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니건에게 도전해야 하는 입장이었어요. 어쩌면 레너드에게는 행운이었을 겁니다. 그만큼 허니건은 강력한 챔피언이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지미 렉스 씨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지미 렉스 씨는 허리케인의 승리를 장담했는데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핸드릭슨 씨의 설명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핸드릭슨 씨가 간과한 것이 너무 많군요.”

“그게 뭐죠?”

“핸드릭슨 씨는 최강철 선수가 단순히 화려한 경기를 하기 때문에 복싱 팬들의 사랑을 받는 거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닌가요?”

“제가 지금까지 지켜본 허리케인은 단순하게 화려한 경기를 하는 선수가 아닙니다. 허리케인이 이런 인기를 끌고 있는 건 그가 가지고 있는 투지가 그 어떤 선수보다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사입니다. 그런 선수를 도망이나 다닐 거라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오류의 시작입니다.”

“상세하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핸드릭슨 씨가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허니건 선수는 허리케인의 아웃복싱을 잡기 위해 ‘팬케이크’ 압박 전술을 들고 나올 겁니다. 듀란에게 고전했던 것을 봤을 테니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제 예상은 허니건 측에서 더 진화된 전략을 준비했을 거라는 겁니다. 하지만 허리케인 역시 그에 대한 준비를 했을 거예요. 듀란이 팬케이크 스텝으로 압박을 펼쳤지만 결국 허리케인에게 쓰러졌던 것을 우린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허리케인이 어떻게 듀란의 팬케이크를 무력화시켰는지, 허니건의 펀치가 왜 허리케인을 잡을 수 없는지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핸드릭슨 못지않게 지미 렉스의 설명은 길었다.

그 역시 최강철에 관한 자료를 상세하게 준비했는데 펀치 기술과 콤비네이션의 패턴, 스텝의 특징과 전술들이 담겨 있었다.

해리스 홀던은 길었던 지미 렉스의 설명을 들으며 이전과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분석은 분석에 그치는 것이고 경기 결과는 절대 분석한 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복싱 경기는 상대성이 너무 강할 뿐만 아니라 그날의 컨디션과 전략의 상충에서 오는 의외의 결과가 수없이 발생하는 특성을 가진다.

해리스 홀던이 두 사람이 분석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누구의 분석이 맞든 이 두 사람 중 하나는 5일 후 무조건 병신으로 전락한다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지미 렉스의 설명이 끝나자 출연진들의 감정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지미 렉스 씨의 분석 잘 들었습니다. 설명 과정에서 핸드릭슨 씨의 분석과 상당히 다른 점이 많았는데요. 핸드릭슨 씨, 그에 대해서 반론하실 게 있나요?”

“당연히 있습니다. 저는 그의 분석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지미 렉스 씨는 허니건 선수를 너무 저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니건의 위력은 지미 렉스 씨의 분석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따라서 그의 분석은 엉터립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요. 당신은 허리케인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분석 과정에서 허니건의 양 훅에 허리케인이 당할 거란 확신을 했는데 그게 맞는 겁니까? 왜 허리케인의 펀치가 당대 제일이란 건 간과하는 겁니까!”

“펀치 스피드가 빠르다고 상대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건 무슨 궤변입니까. 허니건은 자신보다 훨씬 스피드가 빠른 선수들도 계속 쓰러뜨려 왔어요. 내 말이 틀렸다는 게 그런 이유라면 정말 어이가 없군요. 그런 능력으로 이 자리에는 왜 나온 겁니까!”

“뭐라고요? 말조심하세요. 허리케인은…….”

헤리스 홀던은 중간에서 끼어든 지미 렉스를 말리지 않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즐거운 일이다. 속에서는 웃음이 솟아 나왔지만 애써 참았다.

방글방글 웃고 있는 PD의 얼굴이 눈으로 들어왔으나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상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격렬하게 싸워주는 건 그와 스태프진들이 기대했던 일이었으니 오늘 방송은 대박이 터질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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