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69화 (169/308)

[169]

* * *

정말 바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동안 기획하고 있던 것들을 실행에 옮기자 몸이 열두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수업에 최선을 다했으나 빠지는 시간이 늘어났고 시험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기말고사는 시합 때문에 아예 시험을 보지 않아 평균 C학점을 받았으나 연말고사에서는 평균 B플러스의 성적을 받았다.

김철중 일당의 도움과 비상한 머리가 조화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이다.

처음 서울대에 입학했을 때와 마음가짐의 변화가 컸지만 학적에 쌍권총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엔도전을 끝내고 최강철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돈 킹은 WBC 챔피언 허니건 측과 계속해서 협상을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허니건 측은 부상에서 완쾌되었으나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했으니 한 차례의 방어전을 치른 후 시합을 하자는 역제안을 해왔다.

컨디션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 후 최강철과 싸우겠다는 전략이었다.

돈 킹은 최강철의 동의를 얻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칙적인 합의다.

단순히 시합을 한다는 데만 협의를 했기 때문에 날짜나 장소, 대전료 등의 주요 세부 내용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돈 킹이 그 사실을 발표하자 전 세계 언론이 난리가 났다.

언제 어디서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웰터급 최강자간 꿈의 대결이 드디어 성사되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한 차례의 방어전을 치른 후란 전제 조건은 참으로 재밌는 말이었다.

시간을 끌어 실전 감각을 다시 원상태로 회복하고 상대에 대한 준비 기간을 완벽하게 갖겠다는 허니건의 전략은 충분히 타당했다.

전 세계 복싱 전문가들은 둘 간의 대결을 5 대 5로 분석하며 팽팽한 경기가 진행될 것이라 예측했다.

허니건은 WBC를 휩쓸고 있는 극강의 챔피언이었고 최강철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강자였으니 전문가들은 이 경기를 두고 20세기 웰터급 역사상 최고의 대결이라 불렀다.

예상대로 허니건은 4개월 후 WBC 랭킹 9위에 올라 있는 약체 산체스를 상대로 방어전을 치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오는 10위 멕시코의 미구엘과 상대하는 것보다 산체스가 훨씬 쉬울 거란 판단이었다.

약체와 시합을 해서 컨디션을 완벽하게 회복한 후 최강철을 때려잡겠다는 심산이었다.

돈 킹이 부랴부랴 뛰어다니기 시작한 것은 최강철 역시 그와 비슷한 시기에 방어전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엔도와 경기를 치른 지 4개월이 지났기에 실전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통합 타이틀 시합전에 방어전을 치를 필요가 있었다.

돈 킹이 선택한 것도 허니건 측의 선택과 다를 바가 없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굳이 강자를 상대로 방어전을 치를 필요가 없었기에 그는 랭킹 10위로 밀려난 영국의 프랭크 홀던을 시합 상대로 선정했다.

프랭크 홀던은 한때 웰터급을 풍미하며 랭킹 1위에까지 올랐으나 전성기가 지나면서 최근 들어 급격하게 랭킹이 추락한 선수였다.

최강철의 방어전이 결정되자 엔도전으로 후끈 달아올랐던 대한민국이 또다시 열풍 속으로 빠져들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다.

오직 영웅인 최강철이 링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국민들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 * *

“변호사 개업하셨다면서요?”

“먹고는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유기춘의 질문에 전 검찰총장 정용범이 쓰게 웃으며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같이 움직였는데 당한 건 자신뿐이었으니 눈앞에서 걱정하듯 물어오는 유기춘의 얼굴이 더없이 얄밉게 보였다.

그러고 보면 온갖 풍상에도 꿋꿋하게 버텨 나가는 정치인이 자신처럼 공직에서 일했던 사람보다 훨씬 파워가 크다.

이자들은 웬만한 비리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오리발을 내밀기 때문에 검찰에서는 수사하기가 극히 난해했다.

더군다나 면책특권을 가졌고 제 식구 감싸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집권당 소속이었으니 자신 혼자 독박을 쓴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유기춘을 볼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올라오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용건부터 말합시다. 급하니까.”

“일단 술부터 한잔하시죠. 우린 동지 아닙니까.”

유기춘이 정용범의 기분을 안다는 듯이 잔을 내밀며 사케를 따랐다.

병부터 다르다.

강남에 있는 고급 일식집 ‘긴자’는 음식값이 비싸기로 유명했는데, 유기춘이 시켜놓은 건 그도 잘 알고 있는 사케의 요코즈나라, ‘고시노칸바이’에서 한정적으로 생산한 것이다.

잔을 부딪치고 술을 단숨에 마신 후 연이어 두 잔을 더 비웠다.

정용범이 입을 연 것은 유기춘이 싱싱한 회를 간장에 찍어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그년이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어제 밤에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변호사가 문제홍이라고 하더군요.”

“문제홍이라고요? 정말입니까!”

유기춘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문제홍은 눈앞에 있는 정용범보다 사시 2기 선배로 검찰총장을 연임했으며 지금은 법무법인 ‘정의’의 수석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거물이기 때문이었다.

“도망 다니던 년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이상한데 문제홍을 선임했어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 계집의 계좌를 추적해 봤더니 며칠 전 갑자기 상당 금액의 현금이 입금되었더군요. 누군가 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정용범의 대답에 유기춘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대학에서 법을 전공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법을 잘 알았고 약자에게 법이란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알기에 무고죄로 그녀를 고발하는 데 동의했다.

화류계에서 일했던 그녀로서는 변호사를 선임할 비용도 없을 것이고 그녀를 맡을 변호사 자체도 구하기 힘들 것이란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눈치가 빠끔한 변호사들이 그녀를 위해 변호할 리는 만무했으니 무고죄로 그녀를 고발하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도피를 해버렸다.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시간을 보내며 상황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냄비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식어버리는 한국 국민의 특성상 자신들의 죄를 증명할 방법이 없는 한 쉽게 가라앉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 최강철이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면서 국민들의 시위는 거짓말처럼 멈췄다.

일부 언론과 대학생들이 떠들고 있으나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수그러들 테니 이제 이 일은 마무리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불쑥 나타나서 경찰에 자진 출두 했다는 소식이 이틀 전에 들려왔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불안감보다 분노가 치솟았다.

이 개 같은 년이.

몸이나 파는 주제에 겁 없이 나서는 바람에 곤욕을 치를 걸 생각하면 찢어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뒤에 누가 있다는 말을 듣자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야당 놈들이 나선 것일까, 아니면 누가?

“의원님, 어쩌면 좋겠습니까?”

“총장님 생각부터 말해보세요.”

“다른 놈이라면 몰라도 문제홍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문제홍은 자신이 없으면 붙을 사람이 아니에요. 더군다나 검찰 쪽에서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라 영향력도 커요. 뒤에서 움직이는 손이 있다면 큰코다칠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조건 불리합니다. 이슈로 올라오면 다치는 건 우리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고발을 취소합시다. 고발을 취소하면 일이 깨끗하게 끝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언론이 들고 일어나지 않겠어요? 놈들은 우리가 뭔가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요.”

“어차피 싹을 지워야 합니다. 의원님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중에서 일본말을 알아들은 건 윤미영뿐이었으니까요. 나머지는 그저 우리를 본 것뿐이죠. 전화를 했던 황자연은 아무것도 아니란 뜻입니다.”

“죽이자는 말이요?”

“황자연이 도주하는 바람에 그냥 내버려 뒀지만 그년은 우리에게 고름과 같은 존재입니다. 의원님이 가지고 계신 비선 조직을 이용해서 그녀를 처리해 주십시오. 고발은 취소하고 그 계집만 처리하면 이 일은 깨끗하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나한테 책임을 지란 말이군. 당신은 이미 한 번 졌으니까?”

“아니면 같이 죽든가요. 의원님은 자리에 계속 계시지만 저는 총수 자리에서 내려왔으니 이번에는 나서주시는 게 도리죠. 일이 늦어 사라졌던 계집이 나타난다면 일이 골치 아프게 변합니다. 아시죠?”

“음…….”

윤미영은 자신으로 인해 세상이 발칵 뒤집히자 요정 ‘월영’을 그만두고 한참 동안 몸을 숨겼다.

불안했기 때문이다.

방송국에 전화를 한 것은 황자연이었으나 그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던 건 그녀였기 때문에 일이 벌어지자 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는데 같이 지내던 친구에게 전화하자 낯선 사내들이 여러 번 찾아왔다고 한다.

그랬기에 전국을 돌며 여행을 하다가 3달 만에 서울로 돌아와 월셋집을 옮겼다.

월세는 거주자만 신고하지 않으면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에 찾아내기 힘든 장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새로 집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낯선 사람이 찾아와 황자연의 행방을 물었다.

그는 자신이 황자연을 돕기 위해 온 사람이라며 최강철과 함께 일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모른다며 완강하게 버텼다.

그러자 그가 주머니 속에서 최강철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활짝 웃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상당한 친분이 느껴졌다.

고민 끝에 황자연이 숨어 있는 절을 알려줬다.

그의 얼굴에서 나타난 진심을 믿었다.

고생하고 있는 언니의 불행이 자신으로 인해 더 커지기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 * *

윤미영은 며칠 전부터 강남에 있는 룸살롱 ‘화원’으로 출근했다.

워낙 예쁘고 몸매가 뛰어났기 때문에 ‘화원’의 마담은 그녀가 일을 하겠다고 하자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환영을 했다.

다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고급 룸살롱은 화려한 네온사인을 달아놓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바로 ‘화원’처럼 빌딩의 입구 한쪽에 작은 명패를 걸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고급 룸살롱은 대부분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는데 사회에서 방귀깨나 뀌는 놈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따분하구만. 안에 있는 애들은 연락이 없지?”

“예, 실장님.”

“잘 살피라고 해. 실패하면 회장님한테 면목이 서지 않는다.”

“이런 일에는 도가 튼 애들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놈들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고 다시 전해”

“알겠습니다.”

황대용이 정철호의 지시를 받고 즉시 무전기로 입을 가져다 댔다.

그는 해병대 특수수색대 중사 출신으로 정철호에게 훈련을 받았는데 현재 ‘제우스’ 보안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현재 시각 11시 40분.

그녀가 출근한 지 벌써 3시간이 훌쩍 넘었기 때문에 따분함이 몰려왔으나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은닉한 채 상황 변화를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화원’ 안쪽에서는 두 명의 요원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손님으로 위장해서 윤미영과 함께하는 중이었다.

그녀를 보호하라는 지시는 최강철에게 직접 내려온 것이었다.

첫 임무다. 그랬기에 더없이 긴장이 되었다.

‘제우스’는 사람 죽이는 기술만 아는 그들에게 꿈의 직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군에서 받던 월급보다 무려 3배의 월급을 받았으니 최강철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할 판이었다.

검은 차량이 대로를 달려와 갓길에 선 것은 황대용이 따분한지 하품을 할 때였다.

차에서 한명의 사내가 내렸다.

둘은 차에 남았고 하나만 내려서 ‘화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연락해.”

“예, 실장님.”

황대용이 급하게 사내가 들어가는 것을 알리자 반대쪽에서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미영이 일을 끝내고 나온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20분이 지났을 때였다.

안쪽의 요원들은 술에 취한 것처럼 그녀의 뒤에서 떠들썩한 모습으로 따르는 중이었다.

들어왔던 놈이 이상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핸드백만 달랑 멘 채 거리로 나와 택시를 잡았는데 사내들이 탄 검은 차량이 급히 따르는 게 보였다.

“가자!”

“오늘 오랜만에 몸 좀 풀겠는데요. 실장님이 보기에 저놈들이 뭐 하는 놈들인 것 같습니까?”

“뭐 하는 놈들이겠어. 기껏 킬러 흉내를 내는 잡범들이겠지.”

놈들은 둘이 아니라 넷이었다.

미리 두 놈은 집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택시가 떠나자마자 윤미영을 덮쳤다.

그사이에 얼굴을 가렸다.

정체가 노출되는 걸 이 어둠 속에서도 막고 싶었던 모양이다.

뒤늦게 차에서 내린 놈들이 가세하며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 순간 차에서 내린 정철호의 입에서 묵직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자스트 모먼!”

뚜벅뚜벅.

담배를 빼어 문 채 접근하는 그의 뒤로 황대용이 천천히 따랐다.

놈들은 낯선 자들이 나타나자 한 놈에게 윤미영을 맡긴 채 셋이 등을 돌리고 있었다.

“니들이 참견할 일 아니니까 가던 길 그냥 가라. 살고 싶으면 말이야.”

맨 앞에 선 가죽점퍼가 등 쪽에서 칼을 꺼내며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전등에 비친 칼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왔다.

날카롭게 벼려졌다는 뜻이다.

“하아, 이 새끼들 그냥 갈 거면 우리가 뭐 하러 왔겠냐. 네가 대빵이야?”

“우리를 따라왔단 말이지.”

가죽점퍼의 입에서 이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놈은 상대가 둘밖에 안 된다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실력을 믿었기 때문인지 아직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철호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에 가졌던 망상에 불과했다.

담배를 허공으로 던진 정철호의 몸이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연속으로 터진 돌려차기.

그냥 돌려차기가 아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것처럼 무서운 파공성이 터지며 앞으로 나섰던 놈들이 짚단처럼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정철호는 두 놈이 쓰러지는 것조차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가죽점퍼를 향해 불쑥 다가섰다.

이번에는 발길질이 아니라 주먹이었다.

실전 전투 기술.

가죽점퍼가 날카롭게 휘둘렀던 칼이 그의 손에 걸려 정지되는 순간 정철호의 손칼이 놈의 옆구리를 그대로 갈겼다.

단 한 방이다.

놈이 걸레처럼 정철호의 어깨에 걸친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움직인 수도 하나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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