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60화 (160/308)

[160]

폭풍 전야.

일본도 그랬지만 한국은 그야말로 금방 폭탄이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창래는 특집 방송 건으로 인해 방송사로부터 감봉까지 당하면서 대기 발령을 받았지만 또다시 최강철의 경기를 따내면서 현업에 복귀했다.

세상 인심은 참 무섭다.

불법 투기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는 그토록 죽이지 못해서 안달을 부리던 방송사와 신문들이, 내일 벌어지는 통합 타이틀전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며 반드시 이겨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 이창래는 아직도 대기 발령 중인 김도환을 불러내 함께 술을 마셨다.

김도환은 최강철을 위해 미친놈처럼 뛰어다니며 데스크와 수시로 충돌했는데 결국 보직까지 뺏기고 쫓겨나 아직도 복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마셔라.”

“나 때문에 과음하지 마. 내일 강철이 시합 있는데 맨 정신으로 살아 있어야지.”

“강철이 시합은 7시부터야. 오늘은 실컷 마시고 죽어도 돼.”

이창래가 먼저 자신의 소주잔을 비우며 쓰게 웃었다.

그도 알고, 김도환도 안다.

오늘 있었던 공식 기자회견을 보고 난 그들의 표정은 더없이 어두웠는데 엔도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다.

“엔도, 그 새끼 얼굴이 번들거리더만. 얼마나 훈련을 했는지 피부가 마치 구릿빛처럼 보일 정도야. 그거에 비해 강철이는 조금 초췌하게 보이더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냐. 훈련도 훈련이지만 검찰 그 개새끼들이 가족들까지 괴롭혔기 때문에 강철이는 제대로 잠도 못 잤어.”

“휴우…….”

김도환의 대답에 이창래가 긴 한숨을 흘려냈다.

정말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뭐가?”

“그 새끼들이 움직인 건 확실해. 과연 그놈들 외에 또 누가 있냐는 거지.”

“씨발, 우리나라에 친일파가 한둘이냐. 겉으로는 멀쩡한 놈들도 속을 알 수가 없다고.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그 덕을 본 놈들이 우리나라 사회에는 셀 수도 없을 정도야. 아마 국회와 정부 쪽에서 상당수일 거다.”

“민족을 팔아먹는 개새끼들. 차라리 이 기회에 그 새끼들을 솎아냈으면 좋겠다.”

“쉽지는 않을 거야. 워낙 철저한 놈들이라 꼬리가 무척 짧아서 찍어내기 힘들어.”

“너도 알잖아, 우리나라 국민들 정서. 사실만 확인되면 그 새끼들 죽이는 건 일도 아냐. 문제는 기폭제가 있어야 된다는 건데…….”

“이 국장, 너 무슨 이야길 하고 싶은 거냐?”

“강철이 사건으로 인해 국민들이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어. 만약 여기서 강철이가 시합에 진다면 사회가 발칵 뒤집힐 거다. 그렇지 않아?”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이 국장, 넌 이걸 알아야 해. 매국노들 수십 명 죽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한 명의 영웅을 지키는 거다. 그래서 이 경기는 강철이가 무조건 이겨야 해. 영웅이 왜 필요한지 알아?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여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야. 지금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어. 그렇기에 더욱 강철이의 존재가 중요한 거야. 놈은 단순한 복싱 영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랑이다. 알겠어?”

“알아, 그래서 일본 놈들도 엔도를 그렇게 만들기 위해 지랄한 거잖아.”

한숨을 길게 내리쉰 이창래가 또다시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참 지랄 같은 현실이다.

영웅을 지키는 것이 더없이 중요한 일이란 걸 안다. 하지만 이미 영웅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후속 대책을 생각해 놓을 필요성이 있었다.

분명 엄청난 혼란이 올 것이다.

만약 최강철이 시합에서 진다면 그 파급 효과는 독재 정권의 마지막 잔재들까지 송두리째 부숴 버릴 만큼 엄청난 사건을 발생시킬지도 모른다.

* * *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잠실 야구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점심 무렵부터였다.

서울시는 야구 협회의 양해를 얻어 프로 야구 경기를 취소했는데 잠실 야구장에 대형 와이드 비젼을 설치해서 시민들이 최강철을 응원할 수 있도록 이벤트를 마련했다.

처음에는 이벤트를 준비하면서 난상 토론이 벌어졌다.

서울시 실무자들은 최강철이 졌을 경우 모인 사람들이 폭동을 벌일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고, 또 다른 관련자들은 괜히 이벤트를 준비했다가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 경우 시의 예산만 낭비한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시장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인해 이벤트가 강행되었는데 놀랍게도 시민들은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삼삼오오 손을 잡고 몰려들었다.

시민들의 손에 들려 있는 태극기.

아마도 그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온 것은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엔도의 경기 장면이 자극제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관중들은 엔도가 세계적인 강자로 약진했던 라파엘과의 경기에서 일장기를 잔뜩 들고 나왔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그 모습을 봤다.

태극기를 몸에 두른 어른들과 아이들의 얼굴에서 전부 비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불리한 경기라는 걸 알기에 그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과장님, 잠깐 나와보시죠. 이거 생각보다 엄청난데요.”

“왜 그래?”

“지금 시민들이 물밀듯 밀려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스탠드가 부족할 것 같습니다.”

“가보세!”

이벤트를 주관한 서울시의 관계자가 급히 보고하자 지원을 위해 나왔던 총무과장이 커피를 마시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경기가 시작되려면 5시간이나 남았기 때문에 야구장 관리자와 함께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고 있던 그는 관계자가 사색이 된 상태로 들어와 보고를 하자 뛰는 걸음으로 야구장이 한눈에 보이는 VIP석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입을 떡 벌렸다.

그가 들어올 때는 화면이 잘 보이는 쪽에만 사람들이 몰려 있었지만 지금은 스탠드의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장관이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디서 저런 태극기들을 가지고 나왔을까.

각양각색의 태극기가 야구장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서 오한이 돋아났다.

방송국의 운영은 광고 수익으로 발생한다.

텔레비전에서 세기적인 빅 매치를 중계할 때 본경기가 벌어지는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방송을 시작하는 건 광고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MBC의 특집 권투도 마찬가지였다.

최강철의 경기는 오후 7시에 시작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그들은 오후 5시부터 방송을 내보냈다.

그동안 최강철과 엔도가 벌여왔던 경기들의 하이라이트가 나갔고 전문가들이 두 선수에 대한 객관적인 전력 비교를 하면서 틈틈이 광고를 때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때와 달랐다.

MBC는 광고를 최소화하면서 잠실 야구장의 모습과 서울 시내의 모습을 취재해 오늘 경기를 대하는 시민들의 반응을 계속 보여주고 있는 중이었다.

윤문호 교수와 아들들은 텔레비전에 모여 앉아 있다가 잠실 야구장을 하얗게 물들인 태극기의 물결이 화면을 통해 나오자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저런 이벤트를 하면 한다고 이야기를 해줘야 될 거 아냐. 도대체 아무도 모르게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당장 서울시청에 전화해야겠다. 와아, 미치겠네. 우리도 저기에 갔어야 해, 응원은 같이해야 재미가 있는데 이런 기회를 놓치다니 아까워죽겠네.”

큰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과 막내까지 맞장구를 치자 남자 넷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으로 과일을 깎아 온 문 여사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게 저거였나. 관리실에서 합동 응원 어쩌구 하면서 참가할 사람들은 잠실 야구장으로 오라고 했었는데…….”

“아이고, 엄마!”

“그런 게 있었으면 우리한테 가르쳐 줬어야죠. 엄마, 이건 그냥 복싱이 아니라고요.”

“그럼 뭐니?”

“전쟁이야, 전쟁. 일본 놈하고 싸우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죽어라 응원해 줘야 된다고요!”

“너무 나가네 우리 아들. 권투가 다 마찬가지지 뭘 그렇게 흥분을 하고 그래.”

“하여간, 엄마하고는 말이 안 통해. 아무리 권투를 안 좋아해도 어쩌면 그럴 수 있어. 제발, 엄마도 최강철 선수 좀 응원해요.”

“호호… 과일이나 먹어. 엄마도 오늘은 열심히 응원할 거야. 최강철 선수가 이기면 너희 아빠가 엄마, 옷 사준다고 했거든!”

* * *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야말로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방송이 시작된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MBC 측에서는 아직도 일본 현지를 연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사정이 있었다.

계약하는 과정에서 중계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MBC 측은 국민들의 열망을 알면서도 약속된 시간까지 방송을 끌고 나가는 중이었다.

방송국 전화기는 사람들의 전화로 인해 불똥이 튀고 있었다.

성미 급한 사람들이 언제부터 중계하냐며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오고 있었는데 전부 목소리가 흥분된 상태로 쌍욕이 난무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창래가 담당 피디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남았어?”

“5분 남았습니다.”

“시간 더럽게 안 가는구만. 이러다 잘못하면 국민들한테 MBC가 공적이 되겠다. 야, 시끄러우니까 전화기 전부 내려놔.”

“국장님, 연결 스탠바이 들어갑니다.”

담당 피디가 지시를 받은 후 전화기를 전부 내려놓게 만들다가 중계 담당자가 신호를 보내오자 급히 보고를 했다.

이창래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좋아. 가보자고!”

이창래가 손가락을 모아 스타트 신호를 보내자 화면이 바뀌며 이종엽과 윤근모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여기는 일본의 동경 요요기 경기장입니다. 오늘 드디어 최강철 선수와 엔도, 엔도 선수와 최강철 선수의 경기가 벌어집니다. 지금 현장은 광적인 일본 관중들로 인해 저희들이 제대로 중계방송을 하기 어려울 만큼 시끄러운 상탭니다. 요요기 경기장에는 2만 명의 일본 관중으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윤 위원님, 일본 관중들이 전부 일장기를 손에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만큼 엔도 선수의 승리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겠죠?”

“그렇습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엔도 선수의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입니다. 최강철 선수가 제대로 훈련하지 못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일본 국민들은 엔도가 타이틀을 획득할 것이라 자신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엔도의 공식 기자회견 인터뷰도 한몫을 했습니다. 엔도 선수는 대일본의 투혼을 이번 경기에서 확실하게 보여주겠다며 일본 국민들을 흥분시켰습니다. 일종의 신경전이지만 그로 인해 일본 국민들의 환호를 이끌어냈으니 엔도 선수의 행동은 성공한 것으로 보이네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인터뷰의 내용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시합이니까요. 제가 조금 불안한 것은 최강철 선수의 훈련량이 극도로 적다는 것인데 이런 불리함을 최강철 선수가 잘 극복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국민 여러분 보이십니까. 일장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최강철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온 교포들이 태극기를 열렬하게 흔들고 있습니다. 비록 적은 숫자지만 최강철 선수가 이 모습을 꼭 봐주기 바랍니다.”

“보세요, 교포들의 응원이 일본 관중들의 함성을 뚫고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 교포들은 일본에서 살지만 최강철 선수가 이겨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아마 최강철 선수도 저분들의 응원 소리를 들을 겁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캐스터와 해설자는 현장 분위기를 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창래가 숨을 길게 내리쉬었다.

미친 광경이다.

한국도 미쳤고, 일본도 미쳤다.

캐스터가 재일 교포들을 말했지만 화면을 통해 보인 요요기 경기장의 모습은 일본 관중들이 들고 있는 일장기만 보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전율에 젖어 있는 일본 관중들의 함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화면에서 뒤늦게 나타난 인물을 클로즈업하는 것이 보였다.

“억!”

이창래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일본 총리가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며 입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미친 새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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