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58화 (158/308)

[158]

* * *

“그놈들 들어왔다면서?”

“예, 그렇습니다.”

“시합을 코앞에 두고 들어오다니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군.”

“최대한 몸을 만들기 위해 그런 결정을 한 게 아니겠습니까. 놈에게는 하루가 무척 중요했을 테니까요.”

요시다가 웃으며 말을 하자 그의 앞에 앉아 있던 사내가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요시다는 한국에서 유기춘과 검찰총장을 만났던 일본의 3선 의원이었고 마주 앉은 사내는 내각정보국의 수장인 히로시였다.

“이제 3일 남았어. 히로시 상이 마무리를 잘해줘야 해.”

“이미 준비는 해놨습니다만 그렇게까지 해야 되겠습니까? 놈은 제대로 훈련조차 못하고 넘어왔어요. 그냥 둬도 무너질 텐데요.”

“그 자식은 불사조 같은 놈이야. 이왕 시작한 이상 마지막까지 발버둥치지 못하도록 끝장을 내야 돼. 어르신께서는 이 일의 중요성을 무척이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셔.”

“음… 하지만 이미 한국 측에서는 우리가 벌여놓은 일로 인해 난리가 나 있어요. 오죽하면 ‘국화와 칼’ 멤버들이 연락까지 끊었겠습니까.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에요.”

“그 새끼들은 똥개들이야. 상황이 호전되면 금방 다시 대가리를 들이밀며 사랑해 달라고 꼬리를 흔들 놈들이니까 걱정하지 마.”

요시다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한국에 있는 ‘국화와 칼’ 멤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나타나는 말과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히로시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정보국의 수장답게 표정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더 움직였다가 문제가 생긴다면 한일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겁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최근까지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조치해야지. 만약 문제가 생겨도 절대 우리 쪽으로 화살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이야.”

“그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요원들은 그쪽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문제는 상황이란 것이지요. 복싱 때문에 한일 관계를 경색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복싱이 뭐가 중요하냐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일은 일본의 혼을 되살리는 일이기에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지금 일본 경제가 휘청이고 있으나 일본의 혼이 다시 살아나면 금방 회복할 수 있어. 더불어 일본의 자존심이 회복되면 우린 완벽하게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될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 한국의 적대감 따위는 문제가 아니야!”

* * *

일본에 도착했을 때 현지의 반응은 상상 이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불과 시합을 3일 앞두었기 때문인지 일본 언론은 온통 엔도의 통합 타이틀 도전 소식을 특종으로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미국의 도박사들이 엔도의 승리를 6 대 4로 점쳤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엔도는 라파엘과의 시합이 끝나고 난 후 곧바로 훈련에 돌입해서 그 어느 때보다 착실하게 시합을 준비했지만 최강철은 검찰 조사를 받느라 거의 훈련을 하지 못했으니 도박사들이 그렇게 판단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 국민들은 그 당연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도박사들의 판단에만 환호를 보냈다.

일행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재일 동포 회장인 서성필이 찾아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일본 언론에서는 최강철에 대한 기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일본 국민들은 최강철이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참으로 지독하다.

대중을 속이기 위해 지랄하는 건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바가 없다.

시합을 불과 3일 앞두고 일본으로 날아온 건 윤성호와 이성일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번 일로 봤을 때 일본이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른다며 최대한 늦게 가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호텔에 도착한 후 최강철이 방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자 지체 없이 다가온 이성일이 그의 손에서 물을 낚아챘다.

“왜 그래.”

“방에 있는 거 아무것도 건들지 마.”

“너,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 아냐?”

“한번 당해보니까 알겠더라. 이 새끼들은 더한 짓도 할 놈들이야. 기다려, 내가 나가서 물 사올 테니까.”

“성일이 말이 맞다. 3일만 버티면 돼. 여기서 더 더러운 일을 당하면 시합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어. 강철아, 오죽하면 우리가 이러겠냐. 그러니까 힘들더라도 조금 참아. 성일아, 뭐 해. 얼른 다녀와!”

“가서 물하고 이것저것 사올 테니 강철이 아무것도 먹이지 마세요.”

“알았다.”

윤성호의 다짐을 들은 이성일은 호텔을 빠져나와 전철을 타고 한 정거장을 지난 후에야 내려 거리를 쏘다니며 물과 먹을거리들을 샀다.

호텔과 가까운 곳에서 사는 것조차 꺼려졌기 때문이다.

당할 만큼 당했다.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어떤 짓을 벌여도 똑같이 당하지 않을 테다.

일본에 와서 이성일의 새로운 면을 보는 것 같았다.

놈은 재일 교포들의 저녁 초대는 물론이고 일본 기자들을 원천 차단 했고, 심지어는 일본 측이 제시한 체육관의 샤워 시설도 이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직접 사 온 물만 마시게 했고 아침에 미리 준비한 것으로만 식사를 하게 했는데 멀리까지 가서 사온 것들이었다.

더군다나 훈련을 끝내고 돌아가면 미리 날아와 있던 돈 킹에게 부탁해서 호텔까지 매일 바꿔가며 잠을 자게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성일은 아예 방을 잡지 않고 최강철의 방으로 들어와 함께 잠을 잤는데 자신의 느낌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올라와라. 거기서 청승 떨지 말고.”

“괜찮아.”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눕는 이성일을 향해 소리를 치자 놈이 기다렸다는 듯 거절을 해왔다.

그랬기에 최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놈의 등짝을 발로 툭툭 찼다.

“거긴 불편해, 인마. 올라와. 오랜만에 같이 끌어안고 자보자.”

“미친놈. 난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잠이나 자.”

“성일아, 이제 하루밖에 안 남았어. 너 그러다가 신경쇠약에 걸려, 인마. 설마 일본 놈들이 나를 죽이기야 하겠냐?”

“죽이지는 않겠지만 병신은 만들 수 있어. 저번에 한 짓을 보라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인데 지들 나라에서는 오죽하겠냐? 시발, 이럴 줄 알았으면 일본에서 시합하는 게 아닌데 그랬다. 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이 자식아, 돈도 많은 놈이 왜 그런 결정을 한 거냐?”

“같은 시합에 500만 달러나 더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돈이 많아도 공짜 돈은 맛있는 법이거든. 특히 일본 애들 돈은 더욱더 그렇지.”

“지랄한다.”

“나도 사실 네가 하도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괜히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너 하는 짓을 보면 걔들이 닌자를 보내서 나를 암살할 것처럼 느껴져.”

“닌자… 그렇지, 닌자. 가만 생각해 보니까 내가 두려웠던 게 닌자였던 모양이다.”

이성일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안함의 정체가 진짜 닌자 때문이라는 확신을 가진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박수까지 쳐댔다.

하여간 엉뚱한 건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놈이다.

“야, 내일 아침밥은 어쩔 거냐?”

“새벽에 나가서 토스트 사 올 생각이다. 여기서 두 블록 정도 더 나가면 맛집들이 많아. 계란 듬뿍 담긴 걸로 사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휴우, 너 때문에 이게 뭔 짓인지 모르겠다. 난 된장찌개 먹고 싶어.”

“하루만 더 견뎌. 한국 가면 실컷 사줄게.”

“성일아, 너도 내가 복싱을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지영 씨가 복싱 그만두면 안 되냐고 계속 말린다. 너하고 똑같은 이유야. 돈은 있을 만큼 있는데 뭐 하러 계속 복싱을 하냐면서 자꾸 울어.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야.”

“네 생각은 어떤데?”

“인마, 내가 먼저 물었잖아!”

“복싱을 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그렇지. 복싱은 네가 하는 거고 나는 네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 생각에 동의할 거거든. 어때 상당히 현학적이고 멋진 대답이지?”

* * *

엔도의 별명은 후지산의 호랑이다.

생긴 것 자체도 호랑이처럼 두 눈이 번쩍거렸고 그의 경기 스타일이 맹렬했기에 일본 팬들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4년 전 혜성처럼 나타나 승승장구를 해오던 그는 11전 만에 당시 동양에서 적수가 없다던 곤죠를 KO로 잡고 동양 타이틀을 따냈다.

그 후로도 그의 승리는 폭풍처럼 이어졌다.

일본 팬들이 그를 본격적으로 떠받치기 시작한 것은 곤죠를 일방적으로 때려잡고 동양 챔피언에 올랐을 때부터였다.

엔도는 일본 팬들의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이후 6번의 경기를 KO승으로 마무리 지으며 전승 KO승이라는 기록을 이어나갔다.

어쩌면 그의 인기는 최강철로 인해 파생된 것일 수도 있었다.

동양인 최초로 통합 타이틀을 따낸 최강철이 세계 복싱 팬들에게 영웅으로 불리는 상황을 바라보며, 일본인들은 부러움과 더불어 자신들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영웅이 있다는 자부심을 만들어내고 싶어 했다.

엔도는 그런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세계 챔피언이 아니었음에도 일본인들이 자신에게 보여주고 있는 광적인 응원은 최강철이란 한국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란 걸 말이다.

그랬기에 이 경기를 더욱 이기고 싶었다.

비록 그가 현존 최강이라 불릴 만큼 막강한 타격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자신 역시 18전을 싸우면서 상대에게 공포감을 심어준 존재로 성장해 왔다.

막상 세계 랭커들과 싸워보자 별게 아니라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전에 싸웠던 라파엘은 웰터급에서 강자라고 소문난 선수였으나 그의 공격력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채 불과 5라운드 만에 등을 돌렸다.

최선을 다해 준비해 왔다.

무려 5개월 동안 최강철 타도를 외치며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뎌왔기에 시합이 눈앞으로 다가온 지금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너는 나에게 쓰러진다.

불법 땅 투기로 인해 거의 훈련을 하지 못했다고 들었으니 그런 상태에서는 절대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팡, 팡, 파앙, 팡, 팡, 팡!

엔도의 주먹이 번개처럼 샌드백을 두드렸다.

빠르다. 그리고 강력하다.

주변에는 수많은 기자가 마지막 훈련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찍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으나 엔도의 눈은 오직 샌드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 전체에서 구슬땀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도저히 마무리 훈련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혹독한 훈련이었으나 엔도는 전혀 지친 표정을 짓지 않고 마지막 펀치를 샌드백에 꽂으며 서서히 몸을 돌렸다.

“엔도 선수, 정말 믿음직스럽습니다. 이틀 후면 드디어 시합인데요.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시합 당일은 더없이 화창하다는 일기 예보를 봤습니다. 허리케인은 비를 동반해야 위력을 발휘하는데 불행하게도 화창한 날씨가 이어진다니 그가 걱정되는군요. 물론 날씨가 좋지 않았어도 별일 없겠지만 말입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국민 여러분께서는 이틀 후 시합에서 진정한 일본의 혼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 * *

내각정보국의 특수요원 쇼타는 최강철이 묵고 있는 호텔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벌써 이틀째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놈들에게서는 어떤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이 작전을 위해 동원된 요원 수만 해도 10명이 넘었으나 그동안 했던 공작들 중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놈들이 계속해서 호텔을 옮겼고 먹는 것조차 멀리까지 가서 직접 구매했기 때문에 작전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차라리 죽이는 게 편하다.

지금까지 작전을 펴면서 이렇게 고리타분하고 지치는 작전은 처음이었다.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면 쉽게 끝을 내고 돌아가 지금쯤 사랑하는 애인과 함께 침대에서 뒹굴었을 텐데 불행하게도 위에서 내려온 지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쇼타는 손에 쥐어져 있는 신경 둔화제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길게 흘려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아미노에탈아미드의 성분을 다른 화합물과 적절하게 조합시켜 만든 신경 둔화제로 그 효과는 3일이 지속된다.

눈에 뜨일 만큼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복싱 선수가 복용한다면 경기에 지장이 있을 만큼 반사 신경을 저하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사소한 작전에 동원되었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성공시키지 못하자 점점 초조함이 몰려들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하루뿐이었다.

윗선에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물이나 음식에 투입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전부 실패한 이상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내일이면 공식 계체량 행사와 기자회견이 열린다.

공식 행사인 만큼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 것이니 그때를 이용해서 자신이 직접 최강철의 몸에 찔러 넣을 생각이었다.

비록 다소 위험하겠지만 그 정도는 일도 아니다.

수없이 많은 작전을 시행하면서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겨왔으니 독침 한 방 쏘는 게 무어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는가.

그랬기에 그는 화려하게 빛나는 호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내일이면 끝난다. 내일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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