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제21장 열도 침몰
완성시켜 놓았던 피지컬이 두 달 가까운 조사를 받으면서 평상시처럼 이완되었기에 최강철은 다시 모래주머니를 다리와 팔에 찼다.
처음으로 훈련을 위해 수업을 들어가지 않았고 시험을 포기했다.
그의 등을 두드려 주던 윤문호 교수의 따뜻한 손길과 친구들, 후배들의 걱정하는 눈길을 받으며 정문을 나서는 순간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검찰의 조사가 시작되고 그 과정을 지켜보며 도사리고 있는 음모의 냄새를 맡았으나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는데 MBC 특집 방송에 나온 여인의 증언을 들은 후에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일본 측에서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행동하겠냐며 방심했던 것이 치명적인 상처로 다가왔다.
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더럽고 여전히 대한민국 곳곳에는 썩은 놈들이 천지에 깔려 있구나.
물론 그 이면에는 일본의 힘이 강력하게 작용했겠지만 같은 나라 동족을 죽이기 위해 나선 놈들의 면면이 최강철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사회 최고 지도층에 있는 자들이 이번 사태를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는 건 우리나라 사회가 철저히 썩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것이었다.
대중들의 생각과 행동은 단순하다.
대중의 사고는 언론에 의해 쉽게 조절되는데 구성원의 교육 상태와 정보 차단의 정도에 따라 그 강도를 훨씬 높일 수 있다.
군사정권은 그러한 특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그들의 손에 의해 수시로 허수아비처럼 놀아났다.
유력 정치인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웠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은 각종 죄를 뒤집어씌워 마녀사냥을 했지만 정보가 차단된 국민들은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받아들인 국민들의 반응은 확연하게 달랐다.
정치권에서는 타협을 통해 대충 사건을 마무리했으나 국민들은 분노를 풀지 않은 채 연일 진상 파악이 필요하다며 시위를 벌였다.
가장 선두에 선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외쳐왔던 자유와 독재 타도라는 구호 대신 영웅을 죽이려 했던 친일파의 행동을 규탄하며 연일 시위를 벌였다.
그동안의 시위와 차이점이 있다면 87년 민주화의 열풍 못지않게 시민들의 참여가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가장 분노하게 만든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강철이 그 대상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아무런 잘못조차 하지 않은 영웅을 훈련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올가미를 걸어 괴롭혔다는 것이 사람들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으나 정부 여당은 강력하게 대응하며 꿈쩍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순간 정부 여당은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정권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그건 정권의 괴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전 언론을 동원해서 근거 없는 루머였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보도했고 시위자들에게 진상 파악을 약속하며 시간을 끌었다.
* * *
“개새끼들, 좆 까는 소리를 하고 있어. 뭐, 친일파가 없다고? 그런 새끼들이 깡철이를 저렇게 만들어놔!”
“완투가 딱딱 들어맞잖아. 시합을 앞두고 검찰과 국세청이 동시에 나섰어. 그게 음모가 아니면 뭐겠냐. 일본 의원이라는 그 새끼 정체부터 밝혀야 해. 그 시발 놈이 언제 들어왔고 어떤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유기춘하고 전임 검찰총장 그 새끼 이름이 뭐냐? 이놈들을 먼저 조져야 돼. 만난 적이 없다고 자꾸 오리발을 내미니까 전기의자에 앉혀서 실토하게 만들어야 해. 이완용 같은 새끼들. 내가 그 새끼들을 그냥 둘 것 같아? 똥물을 떠다가 그 자식들 집에 뿌려 버릴 테다.”
“진상 파악? 웃기고 자빠졌네. 뻔하지. 저러다가 슬금슬금 북한한테 총 한번 쏘게 만들지 않겠어? 그러고 나서 또 빨갱이 타령 하겠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갱이 타령이면 껌뻑 죽거든.”
“시발, 빨갱이고 좆이고 이번에는 안 돼. 우리 깡철이가 죽을 뻔했다고. 안 그래요?!”
시위를 마치고 들어온 김영호와 류광일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소리를 지르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시위 현장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슈퍼 파라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옆쪽에도 3명의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척 봐도 안다.
그들 역시 시위 현장에서 이곳으로 왔다는 것을, 옷에 묻어 있는 최루탄 가루가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깡철이 어떡하냐?”
“뭘 어떡해. 시발, 이 시합 지기만 해봐. 이 개새끼들 다 죽여 버릴 거야.”
“신문에 보니까 다시 훈련에 돌입했다고 하던데 워낙 시간이 없잖아. 아우,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 있냐. 어떻게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웅을 죽이겠다고 덤벼들어. 이게 나라냐!”
“시합 연기도 안 된단다. 위약금이 무려 2,000만 달러래.”
“그래도 연기해야지. 이러다 지면 정말 대한민국이 뒤집혀. 그 개새끼들한테 물어내라고 하면 돼. 내일은 그걸 가지고 떠들어야겠다. 아직 가능해. 10일이나 남았으니까 정부 쪽에 위약금 물어내게 만들자고. 어쨌든 검찰 그 새끼들이 훈련 못 하게 만들었잖아. 당연히 그놈들이 물어내야 되는 거 아냐!”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래, 그렇게 하자. 내일 사람들한테 알려서 그렇게 만들어보자. 아저씨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류광일이 남아 있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 후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치자 사내들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였다.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전부 떠들면 못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시위가 급격하게 가라앉기 시작한 것은 MBC에서 최강철의 인터뷰가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나간 후부터였다.
인터뷰를 한 최강철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지만 그가 한 말은 국민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저로 인해 많은 시간이 헛되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합니다. 저는 검찰 조사가 끝난 후부터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체력이 회복된 상태이며 남은 기간 동안 기술적인 부분들을 점검해서 시합에 응할 생각입니다. 비록 시간이 없지만 최선을 다하면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제가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연일 계속되는 시위를 보면서 제대로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의 괴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국민 여러분과 저, 그리고 우리나라의 행복을 위해 드리는 말씀이라는 걸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시합에 제대로 임할 수 있도록 시위를 멈춰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방송을 통해 인터뷰가 나간 다음 날.
시위를 주도하고 있던 서울대가 제일 먼저 출정을 멈추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정부의 잘못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최강철의 시합이 무사히 승리로 끝나기를 기원하기에 당분간 시위를 중단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최강철이 소속되어 있는 서울대가 먼저 시위를 중단하자 다른 대학들도 차츰 시위를 멈추었고 그로부터 3일이 지나자 서울 시내 전체가 완벽한 정적 속에 사로잡혔다.
시합을 불과 5일 앞두고 발생한 일이었다.
피지컬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기술적인 부분들을 점검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른 시합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절대적인 시간 부족으로 인해 엔도에 대한 전략을 수립하지 못했다는 것과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강행군을 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보름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건 헛된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저번 주에 날아온 돈 킹은 하루를 머물면서 최강철을 설득했다.
“이봐, 허리케인. 위약금 2,000만 달러는 내가 감당하겠네. 그러니 우리 이번 시합을 뒤로 연기하세. 나는 돈보다 자네가 더 중요해. 훌륭한 챔피언이 다른 자들에 의해 벨트를 뺏긴다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그 역시 현재의 상황이 더없이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내민 제안이었다.
의외였다.
2,000만 달러란 거금을 선뜻 손해 보겠다는 돈 킹의 성의가 더없이 고마웠다.
그러나 최강철은 그의 제안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돈 킹 씨,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시합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챔피언이고 어떤 상황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의 투지는 여전히 뜨거우며 내 육체는 적을 맞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만약 내 상황이 불리함으로 작용한다 해도 저는 싸우는 걸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허리케인이고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표정은 담담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 하나하나마다 굳은 결의와 신념이 담겨 있었기에 거액의 손실을 감수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날아왔던 돈 킹은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이런 놈이다, 허리케인은.
훈련을 제대로 못 하고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몰렸으나 최강철은 단 한순간도 진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복싱은 노력한 대로 결과가 나오는 경기다. 물론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지만 승패에 가장 커다란 변수로 작용하는 것은 선수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냐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경기에서 최강철이 질 가능성은 그 어떤 때보다 농후했다.
그럼에도 돈 킹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최강철의 손을 잡아주고 비행기를 탔다.
져도 좋다.
이런 놈이라면, 이렇게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놈이라면 진다 해도 복싱팬들의 뇌리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 *
“가자, 강철아.”
“예.”
캠프의 분위기는 밝지 않았다.
성호체육관의 관원들이 전부 몰려나와 떠나는 최강철과 스태프들을 배웅했으나 그들의 분위기는 침울함을 숨기지 못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제대로 준비조차 하지 못하고 떠나는 챔피언.
이곳에 온 관원들을 현존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는 최강철을 존경해서 성호체육관을 선택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떠나는 스태프들을 보는 시선에 안타까움이 잔뜩 배어 있었다.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들이 아는 최강철은 그 누구보다 강했고 그 어떤 선수보다 뜨거운 투지를 가진 사람이었으니 시합에서 이길 것이라는 희망을 절대 놓지 않았다.
체육관 정문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자 수많은 기자가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어댔고 동네 사람들까지 몰려나와 골목길을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최강철 선수, 꼭 이겨주세요!”
골목 어귀에 서 있던 여중생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들렸다.
그녀는 최강철에게 주기 위해서 꽃다발을 들고 있었는데 워낙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기 때문인지 그냥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중이었다.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여중생이 미친 듯이 달려와 그에게 꽃을 전해주었다.
“이름이 뭐니?”
“혜연이에요, 혜연이.”
“그래, 혜연아. 고맙다. 꼭 이기고 돌아올게.”
“그래주세요. 오빠, 꼭 이기셔야 해요.”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왔지만 최강철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웃었다.
나를 이렇게 응원해 주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동경 요요기 경기장을 피로 물들일 것이다.
누구의 피라도 상관없다.
그것이 비록 나의 피라도 괜찮다. 내가 피를 흘린다는 것은 절대 그냥 쓰러지지 않을 거라는 나의 뜨거운 의지이며 승리를 원하는 팬들에 대한 나만의 결의일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공항을 떠나 비행기를 탔다.
서울에서 일본 동경까지의 거리는 불과 2시간.
이제 겨우 2시간 후면 그토록 지독하고 괴로웠던 시간을 만들어준 일본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분위기가 말할 수 없이 어두운 건 비행기 안에서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알 수 있었다.
스튜어디스는 물론이고 승객들까지 최강철을 향해 밝게 웃지 못했다.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들은 최강철의 승리를 기원하면서도 사인이나 사진을 같이 찍어달라는 부탁조차 하지 않았다.
창을 통해 보이는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모호하게 다가왔다.
푸르다.
눈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이 온통 푸르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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