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50화 (150/308)

[150]

* * *

윤성호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결혼을 하더니 시합이 끝나도 일정 기간 미국에 있다가 뒤늦게 들어오는 버릇이 생겼다.

그랬기에 엔도의 경기가 벌어지는 날 집에 앉아 텔레비전을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는 건 최강철과 이성일 둘뿐이었다.

“쟤들 저거 뭐냐, 이번 경기를 혹시 타이틀전이라고 착각하는 거 아냐?”

“인기가 대단하구만. 일본 국민들이 영웅시 한다더니 맞는 모양이네.”

화면을 통해 비춰지는 요요기 체육관에는 20,000명의 관중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상당수가 일장기를 든 채 엔도가 출전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MBC의 이창래는 예상대로 발 빠르게 움직여 엔도의 경기를 생중계하며 교묘하게 자신의 이름을 팔아 시청률을 확보했다.

물론 그러라고 준 정보였기에 사실 확인을 향해 벌 떼처럼 달려드는 기자들에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떠드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돈 킹은 지금도 통합 타이틀을 성사시키기 위해 뛰어다니는 중이었으니 그 결과에 따라 자신의 거취가 결정될 것이다.

“맥주 한 잔 더 가져올까?”

“그러자, 곧 시작할 거 같으니까 빨리 갔다 와.”

“오케이.”

맥주병이 바닥을 보이자 이성일이 총알같이 일어나 냉장고로 뛰어 갔다 오면서 쥐포까지 들고 왔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놈의 순발력은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다.

이성일이 앉자 텔레비전에서 함성이 쏟아져 나오는 게 들렸다.

화면에는 인상적인 표정을 지닌 엔도가 출전하고 있었는데 일본 관중들은 그를 환영하면서 격렬하게 일장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저놈이 후지산의 호랑이라고?”

“그렇다더라.”

“호랑이는 개뿔, 고양이처럼 생겼구만.”

“남의 별명 가지고 욕하는 거 아니다. 나보고 일본 사람들이 허리케인이 아니라 봄바람이라고 부르면 좋겠어?”

“크크큭, 봄바람이라. 그거 괜찮네. 부드러운 남자처럼 느껴지잖아. 이왕 말 나온 김에 그걸로 바꿔.”

“이 자식은 꼭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진다니까!”

“우리 깡철이 화나쪄?”

눈알을 부라리는 최강철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이성일이 웃었다.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한 그의 행동에 기어코 참지 못한 최강철의 주먹이 번쩍 치켜졌다.

타이밍을 아는 놈이다.

이성일의 귀신같은 국면 전환은 볼 때마다 혀가 내둘러지도록 절묘하다.

“강철아, 라파엘 나온다. 저놈도 상당하다며?”

“응? 그렇지.”

“전적이 꽤 좋네. 45승 6패야. 그중 31KO승이니까 펀치력도 훌륭하잖아.”

“세계 랭킹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 실력 없는 거 봤어?”

주먹을 번쩍 들었던 최강철이 슬그머니 내려놓고 화면을 바라봤다.

이성일의 말대로 라파엘 피네다가 링에 올라오는 순간 화면에는 두 사람의 전적이 소개되고 있었다.

전적만 놓고 본다면 이 시합은 끝까지 가기 어려워 보였다.

라파엘 피네다도 펀치력이 뛰어났지만 엔도의 전적도 그에 못지않게 훌륭하다.

비록 경기수가 적었으나 100%의 KO율을 가지고 있다는 건 상대를 쓰러뜨리는 기술과 펀치력이 뛰어나다는 걸 의미했다.

일본 관중들의 열기는 광적이었다.

식이 끝나고 경기가 시작될 때 화면을 통해 느껴지는 열기가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그들의 엔도에 대한 응원은 열광적이었다.

이윽고 경기가 시작되자 이성일이 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잘 봐, 내 상대가 될지 모르니까.”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돈 킹 씨가 꼭 성사시키겠다고 약속했잖아?”

“일이란 건 쉽게 해결될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어. 특히 큰일들은 더욱 그래. 당장 나는 헌즈와 싸우고 싶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잖아. 허니건과의 싸움도 마찬가지야. 이것저것 걸리는 것이 많으니까 금방 이뤄지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 일본 놈과 싸워, 부담되게시리.”

“시작한다.”

공이 울리는 걸 보면서 최강철이 말을 끊었다.

그건 이성일도 마찬가지였는데 그의 눈은 화면 속으로 빨려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수많은 선수의 경기 스타일을 분석해 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이성일은 습관적으로 엔도와 라파엘의 콤비 블로우와 움직일 때의 특성, 잽에 이은 공격의 다양성에 대한 패턴들을 집중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흥미를 가지고 봤던 경기가 점점 치열하게 전개되자 저절로 손에 땀이 쥐어졌다.

두 선수의 난타전은 1회부터 쉴 새 없이 터지고 있었다.

바로 엔도 때문이었다.

미우라는 엔도의 스타일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엔도는 상대를 잠시도 그냥 두지 않았다.

무차별적인 인파이팅. 라파엘이 뒤로 빠져나가기 위해 애를 썼으나 엔도는 집요하게 접근하며 쉴 새 없이 펀치를 날려댔다.

일본 관중들을 자리에서 전부 일어나게 만든 건 5회전이었다.

라파엘의 약세를 본 엔도의 공격은 무서우리만치 집요했고 강력했다.

결국 라파엘이 엔도의 라이트 훅을 맞고 다운을 당했을 때 요요기 경기장이 일장기로 뒤덮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라파엘은 로프에 기대어 공격을 견디다가 끝내 등을 돌리며 경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뭔가 이상하다.

엔도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하지만 라파엘의 몸은 더 없이 무거워 보였는데 듀란이 헌즈에게 당할 때의 모습과 유사했다.

화면에서 엔도가 두 팔을 번쩍 들고 포효하는 모습을 보면서 최강철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놈은 화면을 향해 주먹을 내보이며 뭔가를 떠들고 있었다.

기분 나쁜 웃음.

마치 자신을 부르는 느낌이었기에 최강철은 맥주잔을 들고 화면 속의 엔도를 노려봤다.

이거… 재밌는 놈일세.

* * *

기자들이 발칵 뒤집힌 것은 엔도의 시합이 끝나고 난 후였다.

예상했던 것처럼 엔도는 시합이 끝난 후 화면에 주먹을 내보이며 최강철과 싸우자는 도발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MBC 중계 팀에 의해 그대로 알려지자 대한민국 국민들은 난리가 났다.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고양이 새끼가 덤비는 건 그냥 두고 볼 수 없으니 주둥이를 박살 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한 놈이니 통합 타이틀을 앞둔 상황에서 아예 상종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이 모르는 게 있었다.

엔도가 랭킹 1위에 오를 것이고 통합 타이틀전이 확정되지 않으면 최강철이 그를 상대로 의무 방어전을 치러야 한다는 걸 말이다.

그 사실은 MBC 측에서도 미리 알지 못했기에 국민들에게 정보를 줄 수 없었다.

최강철은 이창래를 만나면서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흘리지 않았다.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자신은 언제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생각하지만 확정되지 않은 일은 굳이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그게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을 경우 엔도가 경기에서 졌다면 입을 연 자신은 물론이고 이창래와 MBC 모두가 병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엔도가 경기에서 이긴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최강철 선수, 일본의 후지산 호랑이 엔도가 최강철 선수와 싸우고 싶다는 도발을 해왔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챔피언은 상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절차와 협의라는 것이 있으니 그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절차와 협의가 원만하게 진행된다면 싸울 수 있다는 뜻인가요?”

“언론에도 나왔다시피 저의 프로모터인 돈 킹 씨는 현재 WBA 챔피언 허니건과의 통합 타이틀전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게임이 성사된다면 어렵겠지만 성사되지 않았을 경우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번 경기를 승리로 이끌면서 훨씬 좋은 조건을 얻었으니까요.”

“허리케인께서는 어제 벌어진 엔도의 경기를 보셨나요?”

“봤습니다.”

“엔도는 어제 상당히 충격적인 승리를 끌어냈습니다. 엔도의 시합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인상적인 경기였습니다. 그의 레프트 잽에 이은 연타 공격은 빠르고 강하더군요. 매우 수준 높은 경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승리로 엔도는 19전 19KO승을 기록했습니다. 일본 언론에서는 엔도의 펀치력이 최강철 선수보다 강하다면서 만약 싸우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대서특필 중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죠.”

“저를 상대했던 선수들은 늘 자신의 펀치력이 더 강하다고 말해왔으나 제 주먹에 당해서 전부 쓰러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군요.”

“최강철 선수의 말씀을 들으니 든든합니다. 마지막으로 향후 일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학생이니까 학교 수업을 열심히 들으면서 프로모션의 추진 상황을 지켜볼 예정입니다. 아시겠지만 시합이 끝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분간 편안하게 쉴 생각입니다.”

* * *

일본이 발칵 뒤집어졌다.

엔도가 승리하면서 기대가 고조되었던 일본 국민들의 머리에 동경일보의 미우라가 기름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미우라는 최강철과의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지 않은 채 가지고 있다가 엔도가 시합에서 승리한 다음 날에서야 특종으로 터뜨렸다.

<언제든지 오라. 후지산의 호랑이. 나는 언제든지 싸울 수 있다!>

자극적인 제목.

기사의 내용에는 최강철의 말이 그대로 적혀 있었는데 어간에서 느껴지는 의미가 상당히 거슬렸다.

미우라는 교묘한 어법을 통해 엔도 정도는 자신의 상대로 약하다는 듯이 최강철의 말을 전했는데 그것이 일본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비록 경기에 승리했음에도 일본 국민들은 최강철과의 시합을 반신반의했다.

헌즈와의 대결, 그리고 통합 타이틀전 등 최강철의 앞에는 굵직한 계획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기 때문에 당장 엔도와의 시합이 추진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문에서 엔도가 이번 시합을 승리로 이끌면서 랭킹 1위에 올라 의무 방어전 상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일본 국민들의 반응은 금방 뜨겁게 달아올랐다.

상황이 받쳐준다면 싸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번 시합에서 엔도가 보여준 실력과 펀치력이 최강철에 비해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게 증명되었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의 심장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극적인 기사를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냄새나는 조센징.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고 있구만. 엔도가 그놈을 때려눕히는 걸 꼭 보고 싶다!”

“최강철은 운이 좋아 챔피언에 올랐을 뿐이야. 듀란 정도는 엔도가 충분히 이길 수 있었어. 다 늙은 호랑이 잡은 건 별게 아냐.”

“엔도가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면 최강철보다 훨씬 더 잘나갔을 거야. 스타일이 비슷해도 펀치력은 엔도가 더 좋아.”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최강철과 엔도의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시합이 꼭 성사되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엔도가 최강철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주장들이었다.

아전인수다.

어쩌면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이었고 바람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일본 국민들이 엔도를 사랑하는 감정이 특별했고 최강철을 이기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결정적으로 그런 감정에 기름을 부은 것은 NHK에서 마련한 특집 방송을 통해 복싱 전문가인 이시카와와 스기야마의 경기 예상평이었다.

“최강철이 강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엔도의 펀치력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테크닉과 펀치력, 그리고 경기 운영 면에서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엔도는 강한 선수입니다. 더군다나 복싱은 예외성이 강한 경기기 때문에 둘이 붙으면 엔도의 승산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경기에서 최강철은 대미지를 입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비록 다운은 당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맷집이 강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최강철 선수는 뛰어난 방어력을 가지고 있어 펀치를 잘 허용하지 않지만 엔도의 강력한 펀치가 제대로만 들어간다면 KO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텔레비전에 나온 복싱 전문가들까지 엔도의 승리 가능성을 연이어 점치자 시간이 갈수록 일본 열도가 들끓었다.

웰터급 세계 최강자를 꺾었을 때의 전율.

일본 국민들은 그 전율을 맛보고 싶었다.

경기 침체로 인해 가라앉아 버린 일본의 도전 정신을 다시 일깨우고 엔도의 승리를 기점으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열망이 담겨 있었다.

또 하나는 속국으로 여기는 한국의 영웅을 무참하게 무찔러 역사는 변하지 않으며 일본의 혼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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