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제20장 신풍
엔도는 5차 방어전을 끝으로 동양 타이틀을 반납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로 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한 번을 싸워도 강자들과 싸우고 싶었고 그래야만이 커다란 세계로 나갈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타이칸 프로모션의 아키야마는 그의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는데, 그 역시 엔도가 동양에서 활동하기에는 그 역량이 너무 출중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칸 프로모션은 일본 최대의 규모를 자랑했고 챔피언을 17명이나 탄생시켰던 명문이다.
웰터급은 동양인들에게는 피지컬 면에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강자들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현존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는 한국의 최강철이 있었으나 그건 특별한 경우였고 동양 타이틀에 도전했던 자들은 그의 주먹에 5라운드를 버티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실력들을 지니고 있었다.
18전 18KO승.
어쩌면 엔도는 최강철의 판박이나 다름없다.
비록 최강철처럼 아마추어를 거치지는 않았으나 엔도의 복싱은 야수 그 자체를 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력했다.
링에 서는 순간 그의 눈에서는 거침없는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의 살기를 받은 선수들은 경기가 시작 전부터 위축이 되었고 일방적으로 몰리다가 엔도의 폭발적인 공격에 전부 쓰러졌다.
처음 데뷔했을 때부터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펀치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한 방 맞을 때마다 상대는 대미지를 입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경기가 지속될수록 엔도의 기량은 급격한 성장을 거듭해서 현재에 이르러서는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어떤 강자들과 붙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완성 단계에 있었다.
그 증거가 저번 시합에서 벌어졌던 가르시아와의 대결이었다.
WBC 랭킹 7위에 있던 가르시아와의 대결에서 엔도는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으며 불과 4라운드만에 승리를 거뒀다.
엔도에게는 주 무기가 없다.
어떤 펀치도 소화했고 모든 기술이 위력적이었으며 방어 기술이 뛰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다운을 당한 적이 없었다.
엔도가 일본의 영웅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타이칸 프로모션의 적극적인 홍보와 일본 복싱계의 전폭적인 지원 때문이었다.
일본 경제는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경제 침체로 인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이 폭발 직전까지 가 있는 상황이었기에 새로운 영웅의 탄생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정부도 하는 짓이 비슷하다.
일본에는 세계 챔피언이 한 명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강력하게 떠오른 엔도의 약진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최강철의 존재가 가장 큰 이유다.
한국의 최강철이 세계 최고의 복서로 성장하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걸 보며 일본 국민들은 부러움과 동시에 질시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일본 국민들의 가슴속에 들어있는 한국에 대한 감정은 오로지 하나.
바로 멸시다.
36년이나 자신들의 지배를 받았고 미국의 힘에 의해 해방이 되어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일본인들은 한국을 여전히 속으로 하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전쟁에서 졌지만 단시간 만에 세계를 주름잡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해서 여전히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강대국의 지위를 확보한 일본인들의 자긍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자신들을 따라올 수 없다는 자신감.
그 자신감이 있는 한 한국은 언제까지나 그들의 속국일 수밖에 없었다.
* * *
“엔도의 컨디션은?”
“최상입니다. 그는 승리를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오하라의 대답에 아끼야마의 입에서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번 대전을 위해 라파엘 피네다에게 백만 달러란 거금을 주었으니 반드시 이겨줘야 한다.
아니다, 그것 때문이 아니다.
엔도가 반드시 이 경기를 잡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보다 훨씬 크다.
랭킹 1위에 올라 최강철을 때려잡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경기를 이겨야 했다.
엔도가 이 경기를 이기고 최강철과 대결할 수 있다면 그는 천문학적인 돈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국민들 반응은?”
“폭발적입니다. 이미 전 좌석 매진이 되었고 3대 방송사가 동시에 중계방송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습니다.”
“VIP들 초청은 끝났나?”
“150장 전부 발송되었는데 참석하겠다는 답변이 90%가 넘었습니다. 특히 배우, 가수, 탤런트 등 연예계 쪽의 참석률은 100%입니다.”
아키야마는 이 경기의 홍보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구사했는데 VIP용으로 150장의 초청장을 마련했고 그중 절반을 연예계 쪽에 뿌렸다.
어느 경기나 마찬가지겠지만 연예인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그 경기의 흥행을 대폭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미국의 프로모션들도 마찬가지 방법을 썼는데 그만큼 연예인들의 등장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잘되었구만. 그놈들이 있어야 화면발이 살아. 홍보는 계속 때리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이미 이 시합에 대한 특별 방송을 내보내면서 최강철과의 대전 가능성을 떠들고 있습니다. 그게 불을 지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한국인에게 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잖습니까.”
“우리 전략이 완벽하게 맞아들고 있어. 이제 멍석을 깔아놨으니 엔도만 잘해주면 된다.”
“라파엘은 불과 1주일 전에 동경으로 들어왔습니다. 놈의 컨디션은 정상이 아닐 테니 이번 시합은 무조건 엔도가 이깁니다.”
“속단하지 마라. 그 자식은 랭킹 2위에 올라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놈이야. 엔도도 이번만큼은 신경 바짝 써야 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엔도는 이 경기를 위해 5개월이나 지옥 훈련을 해왔습니다. 그는 우리 국민들에게 자부심과 희망을 동시에 심어줄 수 있을 겁니다.”
* * *
호프집에 마주 앉은 김영호와 류광일은 상사의 뒷다마를 까면서 거품을 물었다.
무역 회사의 특성은 실적이 생명이었다.
얼마나 매출액을 올리느냐에 따라 상사원의 목숨은 왔다 갔다 했는데 일본의 경제가 갑자기 곤두박질을 치면서 그들의 실적 역시 바닥을 쳤다.
환장하는 건 부장들이 그런 특수한 상황을 뻔히 알면서 그들을 쥐 잡듯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들 역시 윗대가리들 회의에 들어가면 떡이 되어 나오겠지만 그래도 인신 공격까지 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확 때려치울까. 서 부장 그 개새끼 면상 보는 거 아주 지겹다, 지겨워.”
“아서라, 제수씨 기절할라.”
“좋은 대학 나왔다는 게 자랑이야? 무슨 일 얘기하다가 뻑 하면 어느 대학 나왔느냐고 묻느냐고. 씨발 놈이, 그렇게 잘났으면 고시 봐서 공무원이나 될 것이니 무역 회사는 뭐 하러 왔대?”
“그 인간 나한테는 책상 정리 안 한다고 지랄하더라. 일하다 보면 어질러질 수 있지, 그거 가지고 지랄하는 건 또 뭐야. 회사가 국민학교냐? 뭔 청소 타령을 맨날 해!”
“아우 씨, 그나저나 큰일 났네. 일본이 왜 갑자기 저 지랄을 떨어서 이 난리를 피운다냐.”
“너무 잘나갔지. 일본 경제가 그동안 무섭게 성장했잖아. 벌써 급속 성장을 해온 게 40년이 넘어. 그러니 이제 고비가 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부동산이 미친 듯이 곤두박질친다며?”
“그렇다는구만. 이미 동경 집값이 반 토막이 났다더라.”
“그거 우리나라에도 불똥이 튀는 거 아닐까?”
류광일이 갑자기 걱정이 든 듯 묻자 김영호가 피식 웃었다.
3개월 전에 겨우 21평 아파트를 장만한 류광일의 걱정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이제 겨우 시작이야. 고꾸라질 게 있어야 고꾸라지지. 넌 경제를 전공했다는 놈이 그걸 말이라고 해?”
“마누라가 지금 좋아죽으려고 한다. 융자가 꽤 많지만 내 명의로 된 집은 처음이잖아. 그동안 전세를 전전하느라 생고생을 했는데 집값 떨어져 봐라. 난 바로 사망이야.”
“절대 그럴 일 없어. 내가 봤을 때 우리나라 집값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넌 집 잘 샀어.”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김영호의 위로에 류광일이 맥주잔을 들어 입안으로 털어 넣다가 스르륵 멈췄다.
그의 시선은 벽 상단에 올려 있던 텔레비전에 가 있었는데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예고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김 대리, 저게 뭐냐?”
“뭔데?”
뒤늦게 김영호의 눈이 텔레비전으로 향했다가 류광일과 비슷한 표정으로 멈췄다.
화면에서는 엔도와 라파엘 피네다의 경기를 생중계 방송 한다는 예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자막에 말도 안 되는 설명이 따라붙어 있었다.
-후지산의 호랑이, 엔도. 최강철과의 대결을 꿈꾸다!
복싱광인 두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텔레비전으로 뛰어갔다. 거기에 비슷한 행동을 한 놈들이 따라붙으며 금방 텔레비전 주위에는 10여 명가량이 모여들었다.
화면에서는 이전에 있었던 엔도의 시합 장면을 보여주는 중이었다.
저, 미친놈들.
어떤 시합인지 모르겠으나 상당수의 일본 관중들이 일장기를 들고 엔도를 응원하는 게 보였다.
귀를 기울이자 예고를 때리는 앵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후지산의 호랑이 엔도, 그는 과연 랭킹 1위에 오를 것인가. 전 일본 국민의 영웅, 엔도의 일전이 펼쳐진다. 내일 오후 7시 후지산의 호랑이 엔도는 최강철과의 대결을 꿈꾸며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인다. 시청자 여러분 엔도는 과연 누굴까요. 그가 정말로 최강철 선수와 싸울 수 있는 강자인지 MBC 특집 권투를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고 방송이 끝나자 자리로 돌아온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김영호였는데 답답한 듯 맥주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켠 후였다.
“방송국 저 새끼들, 미친 거 아니냐?”
“그러게 말이다. 깡철이 방어전 끝난 지 이제 겨우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네.”
“그런데 이상하잖아. 방송국 놈들이 단순하게 시청률 올리려고 저런 소리를 했을까? 깡철이가 누구냐, 대한민국 전체가 사랑하는 놈을 상대로 뻥을 쳤다가 나중에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뒈질 텐데?”
“음, 그럼 신빙성이 있다는 건가?”
“햐… 미치겠네. 내가 복싱지 보니까 깡철이 프로모터 돈 킹이 통합 타이틀 추진 때문에 미친 듯이 뛰어다닌다고 나오던데 저게 뭔지 모르겠구만.”
“방송국에 진짜냐고 전화해 볼까?”
“넌 진짜 성질 급한 건 죽여줘. 야, 우리가 전화 안 해도 돼.”
“왜?”
“내일이면 무조건 나오게 되어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냥 있는 거 봤냐. 아마 지금쯤 방송국 전화통이 불나고 있을 거다.”
“흐흐… 그렇긴 하지.”
자신이 생각해도 웃겼던지 류광일이 실실 웃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성질 급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곧 웃음을 멈추고 김영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이, 복싱 매니아. 저기 나온 엔도가 어떤 놈이냐?”
“작년부터 일본 놈들한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놈이야. 동양 타이틀을 5차까지 방어하고 타이틀을 팽개쳤는데 일본에서는 그놈을 챔피언감으로 꼽고 있어. 타이틀에 도전했다가 나가떨어진 놈들 중에는 우리나라 놈도 둘이나 있다. 워낙 테크닉과 펀치가 좋아서 최강철와 붙어도 이길 수 있다고 큰소리치더구만. 전적이 18전 18KO승이야.”
“우와, 전적이 빵빵하네. 그런 새끼를 왜 내가 몰랐지?”
“텔레비전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복싱지에는 여러 번 나왔다. 저놈이 괴물이라며 차기 세계 챔피언감이라고 인터뷰한 것도 나왔는데 아키야마라고 엔도의 프로모터였어.”
김영호가 자신 있게 말을 했다.
그는 매달 나오는 복싱지를 정기적으로 구입해서 밑줄까지 치면서 볼 정도로 복싱이라면 환장을 했기 때문에 웬만한 전문가들보다 정보가 더 밝았다.
“봤냐, 시합하는 거?”
“아니, 그놈 시합을 어디서 봐? 우리나라 놈도 아닌데.”
“정말 그 정도로 잘하는 놈인지 갑자기 막 궁금해지네. 저 새끼가 진짜 이번 시합에서 이겨서 깡철이한테 도전하면 재밌겠다.”
“뭐가 재밌어?”
“생각해 봐. 우리 깡철이가 일본 놈을 박살 내면 얼마나 속이 시원하겠냐. 만약 그 시합이 결정되면 우리나라에서 해야 돼. 이번엔 꼭 가서 깡철이 시합 봤으면 원이 없겠어.”
“야, 깡철이는 통합 챔피언 먹어야지 저런 놈이랑 왜 시합을 해. 난 저 새끼와 시합하는 거 반대야. 세계가 좁다고 뛰어다니는 우리 깡철이하고 저런 놈이 같은 링에 오르는 것 자체가 난 싫어.”
“그런가?”
“당연하지. 어디서 감히 깡철이한테 도전을 해. 죽을라고!”
“그래도 내일 중계해 준다는데 보자. 혹시 또 모르잖아. 그 자식이 정말 도전하면 이번 경기 놓친 거 후회할 거다.”
“누가 안 본데. 심심하니까 보긴 볼 거야.”
“같이 볼 거지?”
“아, 이 악마 같은 놈. 내일은 일찍 집에 들어가야 한다고…….”
“맨날 가는 집, 하루 늦으면 어때. 그러지 말고 같이 보자. 내가 맥주 살게.”
“거참 이상한 놈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가정 파탄을 만드네. 어쩔 수 없지. 우린 권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 할 짓은 해야지. 크크크… 안 그러냐?”
“하아, 이 음흉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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