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 * *
돈이란 무엇인가.
돈이 돈을 벌고 그 돈이 또 돈을 벌어들이는 기괴한 현상을 보면서 최강철은 한숨을 길게 흘려냈다.
6개월 전 2억 달러였던 자산은 불과 그사이에 또다시 불어나 3억 달러에 육박하고 있었다.
블랙 먼데이의 여파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미국의 주식 시장은 무섭게 치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현재의 주가 지수는 3,000을 찍고 계속 오르는 중이었으니 오히려 블랙 먼데이 이전보다 훨씬 더 오른 상태였다.
당장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자산이 벌써 3억 달러에 달했는데 그가 산 주식들은 전부 주식 시장을 견인하며 2, 3배씩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의 자본은 이것뿐이 아니다.
델 컴퓨터의 보유 주식은 유예 기간이 풀리는 2년 후면 현재 가치로도 1억 달러에 달하는 현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델 컴퓨터는 지금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보유 주식을 처분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강철 씨, 3,000만 달러는 어디서 빼는 게 좋겠어?”
“버크셔 해서웨이는 홀드하고 나머지 주식에서 적당히 만들어 투자해.”
“알았어. 그럼 동일 퍼센트로 균등하게 매각할게. 그런데 우리 쪽은 어쩌지?”
“뭘?”
“내가 운영하는 선물 쪽 투자가 벌써 2,000만 달러가 되었어, 너무 덩치가 커져서 조금 불안하기도 한데…….”
“지영 씨, 그 돈은 내가 지영 씨한테 맡긴 거니까 계속 운영해도 좋아. 하지만 절대 무리하지 마. 옵션에 투자하다가 잘못 걸리면 마이다스 CKC가 무너질 수도 있어. 옵션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니까 적정하게 분배하면서 잘해줘.”
“고마워. 절대 무리하지 않을게.”
서지영이 활짝 웃으며 최강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식과 선물 쪽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것은 선물과 옵션 쪽이었다.
주식 쪽은 최강철이 홀드 앤 바이 전략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선물 쪽은 별도의 자금을 운용하면서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1년 만에 원래의 자금을 배로 불려놨으니 그 성취감에 일이 고된 줄도 몰랐다.
“지영 씨가 해줄 일이 있어.”
“내가 해줄 일?”
“그래, 나는 마이다스 CKC, 한국 지부를 만들고 싶어. 그에 대한 준비를 해줘.”
“한국에는… 왜?”
“우리 뿌리가 거기잖아. 그러니 이제 한국에도 투자해야지.”
* * *
최강철이 방어전을 끝내고 돌아오자 대한민국 전체가 그를 뜨겁게 받아들였다.
그냥 승리가 아니라 일방적인 승리였기에 국민들의 반응은 거의 한 달이 지나 귀국했음에도 여전히 뜨거웠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돌아왔을 때 서울대에서는 학칙까지 바꿔서 국가의 명예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학생은 경기를 위해 수업에 빠져도 출석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예외 조항을 만들어놓았다.
그것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고 실천에 옮긴 사람이 바로 윤문호 교수였다.
최강철이 그런 윤문호 교수를 찾은 것은 개학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교수님, 안녕하셨어요?”
“아이고, 허리케인. 우리의 영웅. 어서 오게.”
“그러지 마세요. 부끄럽습니다.”
“허허… 이 사람아, 링에서는 그렇게 호랑이처럼 날뛰더니 그게 무슨 말인가. 천하의 허리케인이 부끄럼도 다 알아?”
“교수님 커피 주십시오. 교수님이 타주시는 쓴 커피가 생각나서 왔습니다.”
“거기 앉아. 금방 타줄 테니까.”
윤문호 교수가 최강철을 소파에 앉히고 부지런히 움직여서 커피를 가져왔다.
능숙하다.
학과장실을 찾는 교수나 학생에게는 직접 커피를 타줬기 때문인지 그의 움직임은 여유가 있으면서 매우 빨랐다.
그는 아버지가 아들이 밥 먹는 걸 지켜보는 눈빛으로 최강철이 커피 마시는 걸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너무나 따뜻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부르려고 했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저번 주에 스포츠데일리에서 기자가 찾아왔어. 자네 성적을 가지고 시비를 걸더군.”
“아, 예…….”
윤문호 교수의 말에 최강철의 얼굴에서 쓴웃음이 떠올랐다.
스포츠 데일리의 신치현은 자신이 시합을 위해 수업을 빠졌을 거란 예상을 하고 취재하다가 결국은 반대로 기사를 쓰면서 시합 포기 운운하는 기사를 썼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자네의 시험지를 전부 보여줬어. 그놈의 자식, 얼마나 꼬장 대면서 사람 성질을 긁어대던지 화가 머리끝까지 나더구먼.”
“고생하셨습니다.”
“이봐, 강철 군. 자네 뭔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뭘 말씀입니까?”
“이 사람아, 성적이 적당해야 이해를 하지. 이번에도 자네가 수석이야. 그러니 기자까지 쫓아온 거 아닌가. 복싱 선수가 어쩌면 그럴 수 있어!”
“그럼 제가 경영대 수석을 했다는 건 이해가 되십니까. 그때도 저는 복싱 선수였어요.”
“예끼, 이 사람아. 그러니까 내가 환장하겠다는 거 아냐.”
“저는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둘 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적이 좋게 나온 것은 그 결과일 뿐입니다.”
“나는 이해하네. 하지만 계속 이렇게 결과가 나오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걸세.”
“그럼 시험을 대충 볼까요?”
“허 참, 누가 그러래. 그냥 걱정이 된다는 거지.”
“교수님이 잘 막아주십시오. 이번처럼 성적 가지고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으면 계속 시험지를 공개하셔도 됩니다.”
“알겠네, 그런데 자네 얼굴 보니까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구만. 뭔가, 말해봐!”
교수들은 고지식해서 눈치가 없다고 하는데 윤문호 교수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최강철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을 확인하면서 넌지시 말을 꺼냈는데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이곳에 온 목적을 천천히 꺼냈다.
“교수님, 미국에 마이다스 CKC란 회사가 있습니다. 그 회사가 한국에 지부를 세우려고 하는데 교수님이 회사를 맡아 운영할 사람을 한 명 추천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이다스 CKC, 그게 뭐 하는 회사지?”
“투자 전문 회삽니다.”
“규모는?”
“현금 동원력이 1억 달러 정도 됩니다.”
“허억, 1억 달러!”
최강철의 대답에 윤문호 교수의 눈이 남산만 하게 커졌다.
1억 달러면 한국 돈으로 900억이다.
단순한 투자 회사라고 생각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자 윤문호 교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규모를 최강철이 대폭 축소해서 이야기한 걸 안다면 그는 아마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대단한 규모를 지닌 회사구만.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의 투자 규모야. 그걸 알아야 적당한 사람을 추천할 수 있지 않겠나?”
“제가 알기로 최초 2,000만 달러에서 시작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점점 그 규모를 늘려 나간다고 하더군요.”
“나는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아. 마이다스 CKC가 그렇게 큰 금액을 한국에 투자하려는 이유가 뭐지?”
“그 회사의 오너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음…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군. 좋아, 내가 적당한 사람으로 물색해 보겠네.”
“그쪽에서는 될 수 있으면 젊고 정직한 사람을 원하네요. 그런 사람으로 알아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알았네.”
* * *
이창래는 보름 전 MBC의 스포츠국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연속으로 최강철의 방어전 중계권을 따내면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영예를 안았다.
부장과 국장은 대우 면에서 100가지도 넘는다는 게 직원들의 평가였다.
일단 국장에 오르면 차가 나오고 비서가 지원되는데, 부장에 비해 회사에서 주어지는 혜택이 무궁무진했다.
처음에 국장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는 그렇게 낯설더니 보름이 지나자 안방처럼 편해지기 시작했다.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창래의 품격은 몰라 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전화벨이 길게 울린 것은 정기 부장 회의를 끝내고 의자에 앉아 신문을 여유 있게 읽을 때였다.
“여보세요?”
-승진하셨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최강철입니다.
“아이고, 강철이. 전화를 다 주고 어쩐 일이야!”
국장답게 근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이창래가 펄쩍 뛰어오르며 부장 시절의 목소리로 고함을 쏟아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최강철의 전화는 그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기 충분했다.
-지금 사무실 앞에 있는데 잠시 들어가도 되나요?
“회사 앞? 그럼 들어와야지 왜 거기 있어. 들어와, 이 사람아. 가만, 내가 마중 나갈 테니까 정문 쪽으로 오라고.”
-그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창래가 대충 옷을 챙겨 입고 부리나케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시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뛰어나갔기 때문에 비서가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정말 나 보러 온 거야?”
“그럼 제가 방송국에 왜 왔겠어요. 국장님 보러 왔죠.”
“들어가세, 들어가.”
이창래가 마치 마당쇠처럼 앞장서면서 최강철을 모시고 들어가자 방송국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딜 가든 마찬가지다.
방송국에는 난다 긴다 하는 스타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스타들은 쳐다보지 않았는데 최강철이 나타나자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마시던 사람들까지 뛰어왔다.
사람들의 숲을 뚫고 엘리베이터를 탄 후 국장실로 들어서자 최강철의 얼굴을 확인한 여비서가 얼마나 놀랐는지 커피를 마시다가 뿜어내는 게 보였다.
“이런 쯧쯧쯧… 자네 때문에 요즘 난리야. 좀 적당히 생기지 그랬어. 여자들이 자네만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어쩌면 좋아.”
“국장님 제가 잘생겼나요?”
“그럼 그게 잘생긴 거 아니면 뭐가 잘생긴 거야?”
“우리 관장님하고 성일이는 자기들이 더 잘생겼다던데요. 솔직히 말해서 제가 썩 잘생긴 건 아니죠.”
“허어, 그걸 겸손이라고 하는 말이야?”
“하하… 사실이잖습니까. 제가 복싱을 잘해서 그렇지 영화배우들한테 비하면 명함이나 내밀 수 있겠어요.”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것보다 자네처럼 생긴 게 훨씬 멋있는 거야. 여자들이 자네를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는 거 몰라?”
“됐습니다. 이제 그만하세요.”
마침 여비서가 차를 타서 가져오자 급히 최강철이 말을 돌렸다.
밴댕이도 낯짝이 있다고 여자 앞에서까지 외모를 가지고 대화를 나눌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국장님, 제가 오늘 국장님을 찾은 건 부탁을 드릴 게 있어서입니다.”
“부탁, 뭔데?”
“엔도 아시죠. 후지산의 호랑이라는?”
“알지, 그놈 요새 일본 사람들한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잖아. 3일 후에 랭킹전을 동경에서 벌인다고 들었는데 그놈이 왜?”
“제가 엔도의 시합 테이프가 필요합니다.”
“허억!”
간단한 한마디에 이창래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국장의 위치에 올라가기까지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늘은 건 눈치밖에 없다.
그랬기에 최강철의 단순한 한마디에 이창래는 단박에 상황을 눈치채고 경악성을 숨기지 않았다.
이 한마디의 의미에는 수많은 것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금방 표정을 숨기고 자신의 궁금증을 물어 왔다.
“통합 챔피언전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
“지금 돈 킹 씨가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율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 방송 쪽하고 선이 닿으시죠? 그 친구가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최근 경기 테이프 3개 정도만 구해주세요.”
“알았네. 구해주지.”
“국장님이 되셨으니 밥 사주실거죠?”
“그걸 말이라고 하나. 언제 사줄까? 말만 해.”
“지금 밥 먹을 때 다 됐잖습니까. 시간 괜찮으시면 말 나온 김에 오늘 사주세요.”
“오케이, 알았어.”
“우리 둘이 먹으면 심심하니까 정치부나 경제부 기자들 몇 사람 더 나오라고 하시죠.”
“왜?”
“세상 돌아가는 거 들어보고 싶어서요.”
“그러지, 뭐. 그런데 난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10분이면 될 거야.”
“여기서 기다릴까요?”
“그래. 금방 돌아올 테니 여기 있어.”
이창래가 최강철을 내버려 두고 미친놈처럼 뛰어나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 정도 떡밥이라면 그의 다음 행동이 어떨지 뻔히 짐작이 되었다.
최강철의 예상대로 이창래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9층으로 내려가서 스포츠국의 사무실을 박차고 들어가며 고함을 질러댔다.
“비상, 비상!”
“국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고함 소리에 놀란 부장들이 달려오자 이창래가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당장 일본 쪽으로 중계진 보내! 우리는 엔도 경기를 생방송으로 때린다.”
“엔도, 그 자식 경기를 우리가 왜 생방송으로 내보낸단 말입니까?”
“엔도가 최강철의 다음 상대가 될 가능성이 커. 서둘러야 된다. 저쪽에서 달려들면 곤란해져.”
“커억!”
이창래의 말을 들은 부장들의 얼굴도 순식간에 허옇게 질렸다.
그들은 이런 정보를 가지고 온 이창래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란 와중에도 의문을 숨기지 못했다.
최강철은 방어전을 치른 지 불과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다음 상대를 엔도로 찍는다는 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창래의 얼굴은 확신에 차 있었다.
“의심하지 마, 진짜니까. 그리고 김 부장은 NHK 쪽에 부탁해서 엔도 시합 테이프 전부 구해놔.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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