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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철의 방어전 날짜가 잡혔다고 연락 온 것은 공교롭게도 동독과 서독을 가로막고 있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11월 9일이었다.
텔레비전으로 해외 토픽을 지켜보던 최강철은 무너진 장벽 위에서 국기를 흔들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다가 돈 킹의 전화를 받았다.
시합 날짜는 내년 2월 10일, 장소는 그의 홈 링인 뉴욕 시저 팰리스 호텔 특설 링이었다.
상대는 랭킹 8위에 올라 있는 밀튼 구에스트였는데 전적은 35승 8패. 라이트 훅을 주 무기로 쓰고 테크닉이 좋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KO승이 13번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펀치력이 약한 선수였다.
방어전 날짜가 잡히면서 대한민국 언론이 또다시 발칵 뒤집혔지만 최강철은 조용하게 시합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냈다.
결혼한 후 미국에서 지내던 윤성호가 날아왔고 김연경과 사귀기 시작하면서 꿈결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이성일이 합류했다.
이성일이 한 달 동안 용기 있게 접근해서 그녀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최강철은 아예 쳐다보지 않았다.
괜히 잘하는 놈의 청춘 사업에 끼어들어 망치는 짓은 한 번으로 족했다.
시합이 잡힌 후부터 다시 이완되었던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경기는 중간에 쉬어가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으나 최강철은 게으른 베짱이로 지내지 않았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 그것은 그가 다시 살면서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철칙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세계 챔피언은 최강철을 제외하면 13차 방어전에 성공하고 있는 유명우가 유일했다.
WBA에서 미니멈급을 새로 만들어 김봉준이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를 챔피언이라 말하지 않았다.
신생 체급이었기 때문에 결정전을 통해 챔피언에 올랐지만 선수의 숫자가 전부 합해서 20명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강철은 학년말 시험을 치른 후 미국으로 떠나기 전 스태프들과 함께 대구로 향했다.
오늘 유명우와 함께 80년대 대한민국의 복싱을 주름 잡던 장정구가 재기전을 갖기 때문이었다.
장정구는 15차 방어전을 끝으로 은퇴했다가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탕진하면서 다시 글러브를 끼었다.
상대는 움베르토 곤잘레스.
한국 킬러로 알려진 그는 이열우를 꺾고 챔피언에 올랐는데 25전 전승 20KO를 기록하고 있는 강타자였다.
방어전을 앞둔 최강철이 현지로 떠나기 전 대구실내체육관을 찾은 것은 장정구의 마지막 경기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화끈한 공격력과 투지는 대한민국 복싱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로 뛰어났다.
최강철이 대구로 뜨자 복싱계와 언론 전체가 난리가 났다.
수많은 기자가 그를 쫒았고 주최 측에서는 복싱 협회 사무장 유광호가 직접 나와 최강철 일행을 링 사이드까지 안내했다.
장정구의 재기전은 화제를 몰고 온 경기였다.
비록 전성기는 지났지만 워낙 훌륭한 테크닉을 지녔고 불같은 전투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복싱 팬들은 그의 시합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배경에는 상대인 움베르트 곤잘레스가 있었다.
누구나 이번 경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 곤잘레스는 테크닉에서 다소 거친 면을 보였으나 막강한 펀치력을 지녀 경량급으로서는 경이적이라 볼 수 있는 KO율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장정구가 이긴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성기 시절 뛰어난 테크닉과 투지를 보여주었던 장정구라면 한국 킬러라는 곤잘레스를 꺾고 챔피언을 탈환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사람들을 열광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희망은 경기 중반까지 현실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와아, 와아!”
장정구의 펀치가 곤잘레스의 얼굴을 강타할 때마다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승리를 기원했다.
하지만 시합이 종반전으로 치닫자 관중들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과거의 영광이 슬프다.
보기조차 안쓰러운 영웅의 몰락을 바라보며 관중들은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비틀거리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영웅의 모습을 보면서 관중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아, 그냥 쓰러져! 너는 할 만큼 했다. 그만해. 제발 그만해!”
모든 사람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얼굴 전체에서 피를 흘리며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는 장정구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고통을 동시에 주고 있었다.
또 하나 배운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에서 나는 연민보다 위대한 감동을 느꼈다.
경기를 끝난 후 체육관을 빠져 나오는 최강철을 향해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최강철 선수, 이번 경기 어떻게 보셨습니까?”
“장정구 선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록 경기에서 지기는 했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을 다해 싸웠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장정구 선수를 존경합니다.”
“상대인 움베르토 곤잘레스 선수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죠.”
“곤잘레스 선수는 플라이급에서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펀치력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는 챔피언으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선수입니다.”
“세간에서는 이번 경기를 미스 매치라고 평가하는데 최강철 선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복싱에서 미스 매치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결과만 있을 뿐이죠.”
“이틀 후에 미국으로 떠나는데요. 이번 방어전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각오 한 말씀 해주시죠.”
“저는 허리케인입니다. 국민 여러분께 허리케인다운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 후로 많은 질문이 쏟아졌으나 최강철은 미소를 지으며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의외의 인물을 만난 것은 차를 타기 위해 주차장으로 걸어갈 때였다.
“강철아!”
“성길이 형, 형도 여기 있었어요?”
“그래, 장정구 선배가 같은 체육관 소속이라 응원 왔어. 뒤늦게 네가 온 걸 알고 달려오는 길이다.”
“반갑습니다.”
최강철이 문성길의 몸을 끌어안았다.
정말로 반가웠다.
그를 본 건 아시안게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벌써 7년이나 되었는데 그때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네 경기 전부 지켜봤다. 정말 대단한 경기들이었다.”
“쑥스럽게 왜 이러세요. 형도 잘하고 있잖아요. 이번에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다면서요. 나와 시합날짜가 비슷하던데 훈련 열심히 하고 있는 거죠?”
“그럼. 죽어라 하고 있다. 너는 어때?”
“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합 끝나고 한번 만나자. 내가 소주 한잔 살게.”
“그러죠. 형이 사는 술 꼭 먹고 싶었습니다.”
“강철아, 난 이만 가봐야겠다. 장정구 선배가 많이 다친 것 같아.”
“그러세요. 형, 시합 잘하십시오.”
“나보다는 네가 잘 해야지. 너는 대한민국의 영웅이잖아. 반드시 이겨야 한다!”
뒤돌아 뛰어가는 문성길의 모습을 보면서 최강철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멀었다.
인연을 맺었던 사람에게 먼저 연락조차 하지 못했으니 어쩌면 자신은 남들의 부추김으로 인해 스스로 자만심에 취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 * *
쾅, 쾅, 쾅!
최강철은 뒤로 물러서는 밀튼 구에스트의 안면에 폭발적인 연타를 퍼부었다.
3라운드.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 최강철은 지금까지 줄곧 구에스트를 압박하며 경기를 이끌어왔다.
구에스트는 필사적으로 도망갔으나 최강철의 빠른 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눈에 담겨 있는 것은 두려움.
불과 3라운드 중반이었음에도 그의 숨은 턱까지 차오른 것처럼 보였고 최강철의 펀치가 나올 때마다 움찔거리며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사일 같은 라이트 훅에 격중당한 구에스트의 몸이 로프로 밀려 나가는 걸 확인한 최강철의 신형이 귀신같이 접근하며 전매특허인 콤비네이션 펀치를 꺼내 들었다.
초당 3회에 달하는 엄청난 펀치가 무차별적으로 작렬했다.
가드를 잔뜩 올린 채 방어를 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가딩이 풀리면서 턱이 흔들리는 순간 구에스트의 눈에서 눈동자가 사라졌다. 대미지로 인해 혼백이 날아가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레프리가 다가와 밀튼 구에스트의 상태를 확인한 후 카운터조차 하지 않은 채 곧바로 경기를 중단시키며 링 닥터를 미친 듯이 불러댔다.
경기 종료 3라운드 1분 27초.
시작과 동시에 폭격기처럼 일방적으로 구에스트를 두들겨 정신을 잃게 만든 최강철의 인파이팅에 관중들은 전율에 젖어 함성을 멈추지 못했다.
듀란처럼 막강한 도전자는 아니었으나 랭킹 8위에 올라 있는 선수가 마치 허수아비처럼 쓰러지는 모습은 충격을 넘어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최강철은 경기를 끝낸 후 두 팔을 번쩍 들고 당당하게 링을 거닐었다.
맹수가 배불리 먹은 후 초원을 거니는 것처럼 그의 전신에서는 여유로움이 올올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봤는가, 이것이 현존 최강 허리케인의 위용이다.
시합을 끝낸 후 며칠 동안 기자들의 등쌀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럴 때마다 곤혹스럽다. 매번 비슷한 질문들을 해 오기 때문에 똑같은 답을 반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3일이 지나면서부터 기자들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본격적으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남은 기간 동안 회사 일을 체크한 후 서지영과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딱 한 번만 더 인터뷰를 해달라는 토머스의 간절한 부탁으로 인해 최강철은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잡아야 했다.
스포츠라인의 토머스는 최강철에게 있어 특별한 인연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토머스는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일본 기자와 함께 왔는데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허리케인,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경일보의 미우라 기자입니다. 심층적인 인터뷰를 하고 싶었지만 만나기 힘들어서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토머스를 통하게 되었습니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아닙니다. 이미 토머스에게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런 일은 비일비재로 발생하는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미우라가 깍듯하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수그렸다.
역시 일본인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숙여졌던 고개가 들려졌을 때 그의 눈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저는 허리케인의 팬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것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습니다. 제가 이번에 온 것은 다음 달에 벌어지는 엔도의 시합 때문입니다.”
“엔도요?”
“그렇습니다. 엔도는 다음 달에 라파엘 피네다와 시합을 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요?”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엔도는 현재 18전 18KO승을 기록하며 WBC와 WBA 양대 기구 랭킹 3위에 올라 있습니다. 만약 라파엘 피네다와의 시합에서 이기면 랭킹 1위가 될 겁니다.”
“나는 미우라 기자가 왜 엔도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최강철이 이야기의 본질이 뭐냐는 듯 쳐다보자 미우라의 얼굴에서 쓴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는 엔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최강철의 태도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허리케인, 당신의 다음 상대가 엔도가 될 가능성이 크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만약 당신의 다음 시합이 통합 타이틀전으로 치러지지 않는다면 엔도를 상대로 의무 방어전을 치러야 된다는 것이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미우라 기자님, 너무 일찍 오신 것 같군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일을 가지고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닌가요?”
“엔도는 후지산의 호랑이로 불리며 일본 국민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선수입니다. 지켜보시면 알겠지만 그는 라파엘 피네다를 반드시 꺾을 겁니다. 엔도의 기량은 허리케인에 필적할 정도로 대단하거든요. 혹시 엔도의 경기를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의 경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보시죠. 시합이 결정되기 전 그의 경기를 본다면 꽤나 흥미로울 겁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미우라의 시선에서 슬쩍 기분 나쁜 음모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렇기에 최강철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자, 그럼 본론을 말씀하시죠. 지금까지 엔도의 말씀만 하셨는데 저에 대해서 물어볼 말은 없습니까?”
“저는 허리케인의 생각이 궁금해서 왔습니다. 만약 엔도가 랭킹 1위에 오르면 그와의 경기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묻는 건 챔피언은 1회에 한해서 의무 방어전을 연기시킬 권한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이해해 주십시오.”
“이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답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후지산의 호랑이라… 말씀을 듣고 나니 갑자기 그가 정말 호랑이를 닮았는지 궁금해지는군요. 미우라 기자님의 걱정이 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통합 타이틀전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저는 그와의 대결을 피하지 않을 테니까요.”
“정말입니까?”
“저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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