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45화 (145/308)

[145]

* * *

윤성호의 신혼 여행지는 어이없게도 뉴욕이었다.

아이가 혼자 있었기 때문에 황인혜가 불안해하는 것을 배려한 윤성호의 결정이었다.

“어디로 가면 어때, 두 사람이 좋으면 그만이지. 안 그러냐, 강철아?”

“그럼 당연하지. 관장님, 그래도 가급적 집으로는 들어가지 마세요. 명색이 신혼여행이니까 호텔 주변 관광지 돌아다니면서 사진 많이 찍으세요.”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강철과 이성일은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같은 비행기로 서지영과 클로이, 수잔까지 떠났는데 투자와 관련 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최강철이 만류했으나 서지영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같이 있고 싶지만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는데 대표인 자신이 없으면 직원들이 흔들린다는 게 그녀의 말이었다.

짧은 만남과 아쉬운 이별이었으나 두 사람의 얼굴에는 슬픔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곧 다시 만날 테니 이 이별은 서로의 사랑에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일은 두 사람의 결혼을 기뻐하기도 했지만 부러움을 숨기지 않고 연신 놀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관장님 알죠?”

“뭘?”

“열심히 하십시오.”

“뭘 열심히 해. 너 이상한 소리 하면 죽는다!”

“허어, 방금 결혼한 새신랑이 지금 하객한테 주먹을 든다 이거죠. 강철아, 너 이런 경우 봤냐?”

“아니, 태어나서 처음 봤다. 이러는 건 아니지. 축하해 주는 사람한테 주먹을 들면 안 되는 겁니다.”

“됐다. 이놈들아.”

주먹을 불끈 들었던 윤성호가 한숨을 길게 흘리며 항복을 표시하자 옆에 있던 황인혜의 눈꼬리가 바짝 올라갔다.

“너희들 너무한 거 아냐? 왜 우리 신랑 자꾸 괴롭혀!”

“호오, 이제 부부가 쌍으로 덤비시네. 우리가 뭘, 우린 그저 열심히 하라고 한 것밖에 없어요.”

“생각이 불순하니까 그렇지.”

“누나, 신혼여행 갔을 때 신부가 가장 많이 봐야 하는 게 뭔 줄 아세요?”

“그게… 뭔데?”

“힌트, 그걸 보면 막 천국에 온 것처럼 행복해져. 그리고 없는 힘이 막 솟구쳐 올라. 그리고 그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야. 자, 이제 맞춰봐요.”

“…모르겠는데?”

“우와, 이상하네. 강철아, 너는 알지?”

“새 신부가 그걸 모른다는 게 이상하지. 남자인 나도 아는데. 우리 인혜 누나가 뭘 잘 모르는구나.”

“빨리, 말해. 답답하게 하지 말고. 그게 뭐야……?”

“으음, 그건 말이죠. 정답은 천장이야. 새 신부는 다른 거 볼 필요 없어. 무조건 천장을 제일 많이 봐야 해. 그렇지 강철아?”

“당연하지.”

“누나, 신혼여행가서 다른 데 가지 말고 들입다 천장이나 보고 오세요. 알았죠?”

“이리 와. 도망가면 죽어!”

말을 끝내자마자 슬금슬금 도망치는 이성일을 따라 황인혜가 주먹을 불끈 들고 쫒아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윤성호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고 서지영과 친구들이 배꼽을 잡으며 폭소를 터뜨렸다.

즐거운 시간이다. 자신과 함께해 온 사람들과 이런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으니 지금 이 시간이 나는 참 좋다.

최강철은 학교로 돌아온 후 수많은 사람과 만나며 인연을 쌓아갔다.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학업에 대한 생각은 바뀌었으나 사람을 얻겠다던 당초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 대상은 학생들에게 국한되지 않았고 동문 선배들과 기자들, 그리고 다른 분야의 스포츠 스타들, 심지어 연예인들까지 확산되었다.

사람의 인연은 나무에서 가지가 뻗어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을 알게 되고 그런 행동이 반복되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연의 끈을 만드는 것에는 기준이 있다.

자신과 같은 생각, 같은 이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인연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으나 성격은 천차만별이고 지닌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갖게 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권력의 부역자들이 바로 그렇다.

한번 쓰레기통에 빠진 자들은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권력의 달콤한 맛을 본 자들은 그 달콤함에 취해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평생을 그리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역사는 새로운 사람들만이 써 나갈 수 있다.

* * *

최강철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이성일과 함께 사당동에 있는 감자탕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감자탕집은 먹자골목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저녁 시간이 훨씬 지났기 때문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최강철의 눈이 사방을 좇아 두리번거렸다.

“야, 일단 앉아. 이 자식아, 사팔뜨기 되겠다.”

“응, 그런데 이 집 맛은 있냐?”

“그럼 죽여줘.”

“여기서 밥 먹으려고 저녁까지 굶었어. 맛없으면 난 허락 안 할 거니까 알아서 해.”

“컥, 웃겨. 내가 여자 친구 사귀는 걸 왜 너한테 허락을 받아야 해. 이놈은 완전히 지 맘대로야. 그리고 감자탕 맛하고 그 사람하고 무슨 상관인데 싸가지 없이 그런 말을 하냐? 사람만 보라고, 사람을!”

“크크… 이 자식, 완전히 몸 달았네. 그런데 정말 말은 붙여봤어?”

“그렇다니까.”

“데이트 날짜도 잡았고?”

“그게… 거의.”

“뭐야, 아까는 잡았다고 했잖아!”

“잡을 거라고 그랬지, 내가 언제 잡았다고 그랬어. 걱정하지 마, 곧 잡을 거야.”

“좋다, 그런데 어디 있어? 혹시 오늘 안 나온 거 아냐?”

“그럴 리가 없는데. 어디 있을 거야. 워낙 착해서 저녁이면 꼭 나오거든.”

“기다려 보지, 뭐. 주문이나 해.”

이성일이 주문하는 동안 최강철은 가게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했다.

손님들이 있는 테이블은 4개뿐이었으나 가게의 평수는 50평을 훌쩍 넘었다.

비록 저녁 시간이 지났다고 하나 감자탕집이 이 정도밖에 손님이 없다는 건 결코 장사가 잘된다고 볼 수 없었다.

그 원인은 감자탕이 팔팔 끓으면서 나타났다.

뭔가 부족하다. 몇 숟갈밖에 뜨지 않았지만 혓바닥을 끌어당기는 감자탕 특유의 힘이 부족했다.

“성일아, 넌 이게 맛있냐?”

“응.”

“알겠다. 그래, 그 여자 이름이 뭐라디?”

“아직 이름은…….”

“뭐야, 이 새끼야. 너 말을 붙여본 거 맞아!”

“그래서 나중에 보라고 했잖아. 네가 하도 서두르는 바람에… 이 자식은 왜 따라와서 청춘 사업을 방해하는지 모르겠네.”

“소주 시켜라, 속 탄다.”

입맛을 쩝쩝 다시는 이성일을 바라보며 최강철이 소주를 가리켰다.

그가 이토록 서둘러 감자탕집을 찾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성일이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 것에 대한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과연 그 사람이 맞는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정말 그녀가… 맞다면… 보고 싶었다. 아직 어리고 예쁠 그녀를 말이다.

이성일이 따라주는 소주를 받아 들어 단숨에 마시고 맛이 없는 감자탕을 떠먹으며 눈을 부라렸다.

정보가 정확치 않다.

이놈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라면서 바보같이 어떤 정보도 획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계속해서 이성일을 구박했다.

자신의 다급한 마음과 달리 상황이 여의치 않자 느긋해 보이는 놈의 얼굴이 밉상투성이로 보였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성일의 눈이 번쩍 빛나는 걸 확인한 순간 최강철의 시선이 급하게 돌아갔다.

으…….

그녀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녀의 모습을.

그녀의 이름은 김연경이다.

이성일의 영혼이었으며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슬픈 여자였다.

착했다. 더없이 착해서 이성일과 결혼한 후 없는 살림 속에서도 악착같이 버티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을 찾아와 왜 우릴 괴롭히냐며 소릴 질렀을 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는 그녀에게 커다란 짐이었던 사람이다.

“강철아, 저 여자다.”

“알아.”

“네가 어떻게 알아, 인마!”

“네 눈이 번쩍거렸잖아. 미친놈처럼.”

“흐흐… 그랬냐?”

“가봐.”

“응?”

“가보라고.”

“지금? 저 사람 지금 왔는데 뭘 가봐. 조금 이따가…….”

“넌 이 새끼야, 왜 사람을 자꾸 답답하게 만들어. 빨리 가서 말해.”

“야, 청춘 사업은 때가 있는 법이야. 일단 소주 몇 잔 더 마시고 하자.”

“아니, 지금 가서 데려와, 여기로. 네가 안 가면 내가 갈 거야.”

최강철이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이성일을 노려봤다.

거부할 수 없는 시선. 평소와 다른 그의 태도에 이성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가 이상하다.

그럼에도 이성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강철은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놈이었으니 여기서 뻗대면 진짜 직접 데리러 갈 수도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성일은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카운터에 있는 김연경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와 함께 최강철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다가온 그녀를 향해 최강철은 일어나 모자를 벗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최강철이라고 합니다.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복싱 세계 챔피언입니다.”

“허억!”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다가왔던 그녀의 표정이 최강철을 보는 순간 기절할 것처럼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옆에 있던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은 모자를 벗은 최강철의 모습을 보자마자 귀신을 본 것처럼 자라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만큼 놀랐다는 뜻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최강철이 웃으며 손짓을 해서 자리에 앉으라는 표시를 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중요한 일이 있으니 그냥 식사를 해주세요. 오늘만 저를 모른 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중한 최강철의 인사를 받고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직접 본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최강철이 정중하게 부탁을 하자 그들은 아예 대화조차 중단해 버렸다.

영웅의 부탁은 들어줘야 한다는 의지가 그들의 행동에서 올올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조용해지자 최강철이 그때서야 김연경을 바라보았다.

“잠깐 앉으시겠어요?”

“…예.”

“어디 다녀오셨나 봐요?”

“시장에 다녀왔어요. 식당 재료를 준비하느라…….”

“우리 성일이가 그쪽을 좋아하는 거 알아요? 아 참, 이놈이 이성일입니다.”

“강철아!”

“가만있어 봐. 이놈이 오늘은 꼭 데이트 신청해 보겠다고 했는데 제가 너무 답답해서요. 그대로 두면 오늘도 그냥 갈 것 같거든요.”

“아…….”

최강철의 말에 김연경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왜 모르겠는가.

이성일은 벌써 두 달째 거의 개근하다시피 감자탕집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가 오지 않으면 궁금해질 정도였다.

밥을 먹으며 그가 자신을 흘긋거리는 걸 느꼈으나 모른 체했다.

어느 순간이 되면 말을 붙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남자는 두 달이 다 가도록 말을 붙이지 않아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며칠 전 쭈뼛거리던 그가 기어코 용기를 내어 다가오는 걸 보면서 쿵쾅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기다렸으나 그는 엉뚱한 것만 물어보더니 내빼듯 식당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랬기에 자신이 착각한 거 아닌가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불쑥 최강철이 나타나 사실을 확인해주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직 이놈은 그쪽 이름도 모르더군요. 이름을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저는 김연경이라고 해요.”

“연경 씨, 우리 성일이가 2개월째 당신을 보고 있었어요. 아시죠?”

“…네.”

“오늘 꼭 데이트 신청한다던데 신청하면 받아주실 건가요?”

“그걸 왜 최강철 선수가 말씀하시죠? 해도 이분이 해야 되는 거잖아요.”

최강철의 질문에 김연경이 이성일을 바라보았다.

이성일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얼굴을 하얗게 굳히고 있다가 그녀의 시선을 받자 불에 덴 것처럼 움츠려 들었다.

그러나 그의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맞습니다. 오늘 데이트를 신청하려고 했어요. 연경 씨, 저는 당신과 데이트를 하고 싶습니다. 시간을 내주실 수 있나요?”

“성일 씨라고 그랬죠. 그거 알아요? 난 용기 없는 남자 별로예요. 그러니까 데이트 신청 거절할래요. 친구가 나서야 겨우 말을 붙이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런 사람 매력 빵점이에요.”

“아니… 그게…….”

“전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김연경이 가벼운 묵례를 한 후 바람이 휭 하게 불 정도로 차갑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러자 이성일의 눈알이 튀어나오며 최강철을 노려봤다.

“이 미친놈아! 겨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간신히 찾아냈는데 네가 아주 초를 쳐버렸구나. 이젠 어쩔 거야, 이 웬수 같은 놈아!”

하아, 난리 났다.

나름대로 마음이 급해서 도와주려고 나섰다가 오히려 방해를 놨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랬기에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는 놈의 고함 소리를 피해 정신없이 감자탕에서 빠져나왔다.

이럴 때는 삼십육계가 정답이다.

나름대로 다른 것에는 모두 자신이 있었는데 여자와 관련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초보 수준을 면치 못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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