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복싱에서 상대의 전략은 마주친 첫 순간에 곧바로 나타난다.
물론 세부적인 전략과 비장의 무기는 결정적인 기회에 터져 나오겠지만 커다란 밑그림은 경기 시작부터 곧바로 터져 나오게 되어 있다.
특히 듀란이란 선수가 지닌 피지컬은 절대 다른 스타일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복서로서 명성을 날려 온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바꾸지 않았던 불꽃같은 인파이팅이다.
위잉.
링의 중앙에 마주치자 듀란은 단발 라이트 훅을 최강철의 관자놀이를 향해 던져왔다.
잽조차 생략한 강력한 펀치였다.
최강철은 뒤로 한 발 물러서며 펀치를 피한 후 곧장 연속으로 레프트 잽을 던졌다.
파앙, 팡, 팡!
첫발은 빗나갔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듀란의 머리를 훑고 회수되었다.
그때부터 최강철은 링을 돌면서 레프트 잽으로 거리를 확보했다.
바로 레너드가 듀란을 무너뜨릴 때 썼던 전략이다.
듀란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지점을 확보한 후, 거리를 주지 않은 채 외곽으로 돌다가 기회가 났을 때 공격을 터뜨리며 빠져나가는 게 그의 첫 번째 전략이었다.
처음에는 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듀란의 발이 느린 건 아니었으나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거라 판단되었고 실제로도 경기는 그렇게 흘러갔다.
최강철을 따라 오며 펀치를 날리던 듀란의 스텝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 것은 1라운드 중반이 지났을 때부터였다.
갈지자 스텝.
최강철의 후퇴 경로를 따라 방향을 선회하며 퇴로를 차단하는 스텝이 교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각의 링은 누군가에게는 넓고 누군가에게는 좁다.
사각의 링은 도망갈 곳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제한된 공간이기 때문에 아웃복싱을 하는 선수에게 링 사이드나 코너는 무덤과 같은 곳이었다.
듀란의 압박 스텝은 분명 챠베스의 ‘컷 오브 더 링’과 유사한 것이었다.
상대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거울처럼 움직이는 것.
사각의 링을 팬케이크처럼 잘라서 공격자의 스텝이 상대의 스텝을 커트하게 되면 아무리 현란한 스텝을 가진 아웃 복서라도 결국은 링 사이드나 코너 쪽으로 몰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컷 오브 더 링’이다.
듀란은 지금까지 이런 기술을 써본 적이 없다.
워낙 강력한 주먹을 지녔고 스태미나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발도 느린 편이 아니어서 웬만한 아웃 복서들은 그의 폭발적인 인파이팅을 견디지 못한 채 나가떨어졌다.
최강철은 사이드로 빠져나가다가 방향을 선점한 듀란의 오른발이 불쑥 가로막으며 펀치가 날아오자 급히 백 스텝을 이용해서 뒤로 빠졌다.
곡선 움직임은 직선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 것인데 여기서 ‘컷 오브 더 링’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결국 난타전밖에 없다.
최강철의 입술 끝이 슬그머니 올라갔다.
밀린다. 그것도 찔끔찔끔 미세하게 코너와 링 사이드로 밀리고 있었다.
연속으로 잽을 내면서 상대의 접근을 차단했으나 듀란은 그때마다 카운터를 날리며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레이 아르셀, 좋은 전략을 준비해 왔구나.
펀치를 피해 왼쪽으로 돌아나가는 순간 불쑥 듀란의 얼굴이 정면에서 나타났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계속 똑같은 일이 반복되자 마치 무림에서 나오는 기관 진식에 걸려든 느낌이 들었다.
부웅, 부웅!
자신의 퇴로를 기다렸다는 듯 듀란의 강력한 양 훅이 관자놀이와 복부를 향해 터졌다.
암 블로킹으로 막았으나 팔이 욱신거릴 정도로 강한 펀치였다.
“예상대로 ‘컷 오브 더 링’이야. 그런데 훨씬 정교해.”
“레이 아르셀이 더 가다듬은 것 같아. 이렇게 계속 진행하면 결국 잡힌다. 어쩔래?”
이성일이 먼저 말했고 윤성호가 뒤를 이었다.
1라운드는 일방적으로 밀렸다.
펀치의 숫자는 비슷했고 결정적인 펀치는 맞지 않았지만 계속 뒤로 밀렸기 때문에 점수 면에서는 뒤졌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강철은 윤성호의 질문에 고개를 흔들었다.
“한 라운드만 더 가 보죠. 듀란이 뭘 또 준비했는지 더 확인해야겠어요.”
“좋아, 그렇게 해. 하지만, 점점 위험해질 거야.”
“압니다.”
“강철아, 딱 한 라운드만이다. 하지만 더 이상 안 돼!”
“걱정하지 마세요.”
최강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윤성호와 이성일을 향해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역시 듀란이다.
허공을 가르는 펀치에서 들려오는 파공성이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고 커버링에 얹히는 주먹들은 은은한 통증을 줄 만큼 위력적이었다.
그럼에도 두렵지 않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차피 지옥이잖아.
링의 중앙으로 나가자 듀란의 스텝이 여전히 물밀듯 압박해 들어왔다.
최강철의 현란한 스텝은 그의 ‘컷 오브 더 링’ 전략에 연신 차단되며 펀치를 허용했다.
역시 한 가지가 더 있다.
화살처럼 쏘아지는 최강철의 레프트 잽을 때려잡기 위해 듀란의 레프트 훅이 날아왔던 것이다.
같이 맞고 때린다는 전략이었다.
펀치력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듀란은 최강철의 레프트 잽이 나올 때마다 강한 레프트 훅을 날려 왔다.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가 지닌 레프트 잽의 위력이 날카롭다 해도 듀란의 레프트 훅과는 위력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이 맞고 때리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듀란의 접근을 차단하던 레프트 잽까지 막히자 상황은 점점 불리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거침없는 공격.
듀란은 뒤로 물러나는 최강철을 따라다니며 연신 돌주먹을 날려 서서히 코너로 몰아넣었다.
이것 역시 완벽한 공격을 시행하기 위한 사전 전략의 일환이다.
아웃 복서의 움직임을 차단하고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게 만들어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어놓은 후 쓰러뜨린다는 전략.
최강철은 뒤에 닿는 링 로프를 느끼며 급히 벗어나기 위해 사이드스텝을 썼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듀란의 주먹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번개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콤비네이션.
로프에 상대를 묶어놓았을 때 그가 지닌 막강한 위력의 연타 공격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최강철은 완벽하게 커버링을 한 상태에서 듀란의 공격을 받아들이며 위빙과 더킹으로 펀치를 흘려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듀란은 빠져나갈 수 있는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한 채 근접거리에서 펀치를 갈기고 있었는데 최강철이 빠져나가려 할 때마다 몸통을 끌어안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일방적인 경기.
관중들의 고함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들렸다.
내가 상대를 공격할 때도 이런 함성 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적셨겠지.
* * *
“아니, 씨발. 이게 뭐야! 저 새끼는 왜 반격조차 못 하냐고. 아이고, 미치겠네.”
“얼마나 기다려서 보는 경긴데 병신처럼 당하고만 있어. 저게 허리케인이라는 최강철 맞아!”
“졌네, 졌어. 아무리 잘 봐줘도 4라운드를 못 버티겠어. 방송국 이 개새끼들이 광고 틀어대면서 질질 끌 때부터 알아봤어. 저런 새끼를 내가 응원하겠다고 시간 아깝게 여기 와서 죽치고 앉아 있었으니 한심하다. 한심해.”
“내 말이 그 말 아니냐. 팔은 붙들어 맨 거야, 뭐야. 병신 같은 새끼. 저렇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질 거면 뭐 하러 링에 올라간 거야?”
곱슬머리와 대머리가 번갈아가며 떠드는 게 꽃다방 전체에 들렸다.
최강철이 불리한 경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그 목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그것이 놈들을 더욱 고무시켰던 모양이었다.
“영웅 좋아하고 자빠졌네. 저런 새끼가 영웅이면 나는 성웅이겠다. 어쩌다 챔피언 딴 거 가지고 하도 떠들길래 오랜만에 구경 왔더니 완전히 시간만 버렸구만. 에잉, 집에서 늦잠이나 잘 걸 괜히 왔잖아.”
“최강철, 저 새끼 실력이 과대평가된 거야. 좆도 아닌 놈을 언론이 마구 띄워주는 바람에 국민들이 현혹된 거지. 내가 봤을 때 다음 라운드에서 작살나게 얻어터지고 끝날 거 같다. 잘됐지, 뭐. 얼른 집에나 가자고.”
놈들이 떠드는 걸 듣고 있던 김영호와 류광일의 이마빡이 점점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건 꽃다방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놈들의 말이 계속될수록 성질을 참지 못하고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게 눈으로 보였다.
그러나 먼저 칼을 빼 든 건 류광일이었다.
“아이, 씨발. 듣다 보니까 좆 같네. 여기 당신들 밖에 없어? 왜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고 있는 거야!”
“너는 뭐야? 네가 뭔데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거 가지고 시빌 걸어? 이 새끼 웃긴 놈이네.”
“야, 이 씨발 놈아. 그렇게 나이 처먹었으면 나잇값을 해. 아직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졌다고 지랄하는 게 맞는 말이냐? 병신들이 꼴값 떨고 있어!”
“뭐라고? 너 일루 와, 이 새끼야!”
“오긴 뭘 와. 난 예전부터 여기 있었다, 이 새끼야. 나와 씨발 놈아. 아주 죽여줄 테니까.”
류광일이 방방 뜨면서 멱살을 틀어쥐자 대머리의 모가지가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대로 두면 정말 사고를 칠지 모르기에 김영호가 달려들었고 주변 사람들도 말리느라 꽃다방이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 소란은 3라운드가 시작되면서 금방 사그라졌다.
최강철이 3라운드가 시작되자마자 강력한 원투 스트레이트를 터뜨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전략은 듀란이 ‘컷 오브 더 링’ 전략을 들고 나올 것을 대비해서 마련한 것이었다.
선제공격이 바로 그것이었다.
최강철은 밀고 들어오는 듀란을 향해 번개같이 좌우 스트레이트와 양쪽 복부를 향해 훅을 터뜨린 후 빠르게 빠져나왔다.
의외의 상황에 잠시 멈칫했던 듀란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그 역시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강철은 냉정한 시선으로 그의 웃음을 받아넘긴 후 똑같은 패턴으로 듀란의 얼굴을 흔들어놓았다.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 펀치는 결코 솜방망이가 아냐.
치고 빠진다.
먼저 강력한 공격을 퍼붓고 뒤로 빠지자 압박이 훨씬 느슨해졌다.
그럼에도 듀란은 똑같은 패턴을 유지하면서 계속 다가왔다.
그리고 최강철이 선제공격을 할 때 마주 펀치를 내밀며 거칠게 밀어붙였다.
1, 2라운드와 전혀 다른 양상.
근접전에서 난타전을 벌이는 건 아니었으나 두 선수가 링 전체를 사용하면서 치고받자 관중석이 열기로 가득 찼다.
최강철은 화살처럼 날카로운 레프트 잽을 던져 듀란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비어 있는 공간을 향해 원투 스트레이트를 던졌다.
듀란의 얼굴이 남산만 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듀란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휴우, 듀란. 날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 왔구나.
휘청.
마주 빠져나온 듀란의 라이트 훅에 턱을 맞은 최강철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뒤로 밀렸다.
맞는 순간 반사 신경을 이용해서 고개를 돌렸지만 정신이 멍해질 정도의 충격이 전신을 마비시켰다.
최강철은 슬그머니 이를 악문 채 기회를 잡았다는 듯 밀고 들어오는 듀란의 양쪽 복부를 향해 숏 훅을 날린 후 곧장 어퍼컷을 끌어 올렸다.
충격을 받았다고 해서 뒤로 밀리면 더욱 커다란 위기가 다가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듀란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전진해 들어오며 콤비네이션 펀치를 휘둘렀다.
맹수다.
상처 입은 짐승의 목 줄기를 물어뜯는데 복싱 역사상 듀란 같은 포식자는 드물었다.
'윙, 윙… 위잉!
귓가로 스쳐 지나가는 파공성.
듀란의 주먹은 하나하나 살기를 지닌 채 최강철의 숨통을 끊기 위해 공간을 점유하며 무섭게 전진해 들어왔다.
“밀리면 안 돼!”
코너에 있는 이성일의 목소리가 울부짖는 것처럼 들려왔다.
맞다. 밀리면 답이 없다.
최강철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방어 기술을 동원해서 듀란의 펀치를 피하며 계속 복부를 두들겼다.
네가 죽나 내가 죽나 어디 해보자.
당신의 주먹이 대단하다 해도 당신은 이미 늙었다는 걸 알아야지.
최강철은 더 이상 물러나지 않고 듀란의 복부를 연속으로 후려갈긴 후에야 사이드로 빠져나갔다.
압박 전술을 깨뜨리기 위해 준비한 것 중 하나였다.
같은 패턴.
최강철은 뒤로 빠진 후 다시 선제공격을 감행해서 듀란의 접근을 차단했다.
왜 그를 판타스틱4의 일원으로 꼽았는지 알만하다.
웬만한 선수들은 최강철이 공격을 시작하면 방어에 급급했으나 듀란은 끊임없이 펀치를 쏟아내며 반격을 가해왔다.
더군다나 클린 히트를 당해도 고개만 잠시 흔들었을 뿐 밀고 들어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역시 듀란. 당신의 터프한 공격력은 엄지손가락이 저절로 치켜질 정도로 대단하다.
헌즈에게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지던 당신의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그래, 이런 강한 모습 정말 좋아.
피가 끓잖아. 내 속에 들어 있는 악마의 피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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