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37화 (137/308)

[137]

* * *

이창래는 MBC가 독점 중계권을 따내면서 커다란 보너스는 물론이고 중계진을 이끈 채 미국으로 향하는 영광을 누렸다.

간절히 부탁했음에도 끝까지 안 된다며 거절을 하던 김도환은 결국 그를 이끌고 최강철에게 데려다 주었다.

자신의 입으로는 죽어도 말을 하지 못하겠다며 만나게 해줄 테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자신이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으나 김도환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어쩌면 최선의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었고 이번 경기를 따내야 한다는 간절함이 결국 최강철을 향해 한심한 말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그때, 최강철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부장님,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방송사 간의 일에 간섭하는 게 옳은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도환 형님과 친구라는 인연이 있으니 이젠 제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흔쾌히 말하셔도 됩니다. 저는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놈입니다.”

뭘까?

너무나 쉽게 일이 풀리자 기쁨보다 의심부터 들었다.

방송국에 근무하면서 수없이 많은 음모와 계략을 겪었기 때문에 순수함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어 최강철의 호의를 받게 되자 불안감이 불쑥 몰려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최강철이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이유에서 의심을 찾아낼 수 없었다.

최강철은 모든 국민이 영웅이라 부르는 불세출의 스타였으니 자신에게 돌려받아야 할 빚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캐스터와 해설자 등 10명의 스태프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10일 전에 넘어온 후 최강철을 밀착 마크 하며 3번이나 인터뷰를 따냈다.

미국을 비롯해서 전 세계의 언론을 철저하게 차단했던 것과 다르게 최강철은 유독 그가 이끄는 MBC 중계진에게 모습을 드러내어 고위층의 인정을 한 몸에 받게 만들어주었다.

드디어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이 되자 캐스터인 이종엽과 해설자 윤근모가 침을 튀기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으스스 몸이 떨려왔다.

최강철은 자신에게 은인이기도 했으나 그것으로 인해 응원하는 게 아니다.

그 역시 한국 사람이었고 최강철의 승리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간절했다.

이겨라, 최강철. 그래서 너의 승리를 간절하게 바라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기쁨을 다오.

* * *

최강철은 라커룸을 나서며 주변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이젠 이런 장면도 익숙하다.

스태프는 단 두 명뿐이었으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많았다.

시합이 있을 때면 인사만 하고 링 사이드의 VIP석으로 돌아갔던 돈 킹과 톰슨은 아예 출전할 때까지 라커룸에 있다가 조용히 뒤를 따라왔고 10여 명의 경호원이 벽을 친 앞과 뒤쪽에는 수많은 카메라와 기자들이 쫓아왔다.

복도를 걸어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중들의 열기가 폭발하며 얼굴로 훅 다가왔다.

이미 링 위에는 도전자 듀란이 올라와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중이었다.

“허리케인, 허리케인!”

자신을 부르는 관중들의 함성 소리에 손을 들어주었다.

옆에 선 이성일은 대형 태극기를 든 채 따라오고 있다가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자 한껏 치켜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아 그냥 들고만 있어. 쪽팔리잖아.

천천히 걸어 링으로 올라갔다.

그런 후 링의 중앙에 태극기를 들고 걸어가 바닥에 내리꽂으며 오른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태극기를 든다는 것은 조국의 명예를 걸고 싸운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강철처럼 전 세계적으로 두꺼운 팬 층을 형성하고 있는 슈퍼스타에게는 훨씬 많은 약점이 새로 생긴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국가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순간 국적이 다른 사람들은 거부감을 나타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고 국민들에게 영웅으로 불리고 있으니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건 듀란도 마찬가지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옛날 레너드와 대결할 때 미국의 침공을 겪었던 파나마 국민들의 분노를 등에 업고 싸웠던 듀란도 언제나 국기를 들고 나왔다.

지금도 마찬가지.

그 역시 파나마의 영웅으로서 국기를 걸고 싸울 생각인 게 분명했다.

“강철아, 몸 풀어.”

“알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들어오자 윤성호가 최강철의 등을 떠밀었다.

순순히 수긍을 하고 코너 주변에서 왔다 갔다 하며 스텝을 밟았다.

크게 의미 있는 짓이 아니라는 건 안다. 이미 라커룸에서 섀도복싱으로 가볍게 땀을 낸 상태였기 때문에 충분히 몸은 풀어져 있었다.

슬쩍 눈을 들어 듀란을 보자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자신의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화면에서 본 그 사람. 전설의 명트레이너로 불리는 레이 아르셀이 듀란의 귀에 대고 뭐라 소리치는 게 보였다.

저 사람은 이 경기를 위해 뭘 준비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했다.

강한 적수와의 전쟁. 사람들은 이 경기를 거대한 전쟁이라 불렀지만 자신에게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산을 정복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산을 정복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강철아, 조금이라도 히팅을 당하면 물러서야 해. 연타를 당하는 순간 위험하다는 거 잊지 마. 알겠어?”

“예.”

“듀란은 다른 놈들하고 다르다. 어쩌면 단발 공격에 당할 수도 있어. 정신 바짝 차리란 말이야.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강한 펀치를 맞아도 무조건 스텝을 멈추면 안 된다. 그게 안 된다면 차라리 다운을 당해. 다운을 당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다.”

“예.”

“놈은 맹수다. 한 번 물면 놓지 않아. 물지 못하게 미리 막아야 해. 특히 압박 스텝 신경 쓰고.”

“알았습니다.”

윤성호가 긴장된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그동안 링에서는 아나운서가 초대된 손님들을 소개시켰고 주최 측에서 공식적인 경기 선언이 이어졌다.

“강철아, 가자!”

모든 식이 끝나고 마지막 순서를 위해 레퍼리가 링의 중앙으로 부르자 윤성호와 이성일이 한 몸이 되어 중앙으로 걸어갔다.

국가 연주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국에 와서야 국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다른 문화, 다른 음식, 다른 생각.

이 모든 것이 애국자가 되게 만드는 원인들이다.

최강철은 머리에 태극기를 두르고 애국가를 끝까지 따라 부른 후 자신의 코너로 들어왔다.

그런 후 링 아나운서의 선수 소개를 들었다.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듀란의 소개는 더할 나위 없이 거창했다.

라이트급에서 시작해서 4체급을 석권하는 동안 92전을 치렀고 그중 73번을 KO로 끝냈다.

더군다나 챔피언 방어전에서 기록한 11연속 KO승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듀란의 소개가 끝나자 관중들이 기립 박수로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관중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준 것은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하지만 관중들은 최강철이 소개될 때도 앉지 않았다.

21전 21KO승.

승률 100%의 압도적인 전적 때문이 아니다.

비록 전적은 듀란에 비해 형편없이 적었으나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최강철의 경이적인 파이팅이 관중들로 하여금 자리에 앉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시저 팰리스 호텔 특설 링은 이미 광기로 그득 찼다.

폭발 직전의 긴장감.

최강철은 반대쪽 코너에서 껑충거리며 뛰고 있는 듀란을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듀란은 껑충거리며 뛰고 있었는데 저 어리숙한 스텝이 수많은 선수를 죽음 속으로 몰아넣었다.

레퍼리의 손짓에 의해 링의 중앙으로 나가자 듀란이 자신의 눈을 강하게 쏘아봤다.

지금까지 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고 맹수가 먹이를 잡아먹을 때 나타내는 살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강철은 그 시선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린 후 이를 드러냈다.

이봐, 듀란. 나를 먹잇감으로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했잖아. 그런 시선은 초식동물에게나 나타내는 것이지 당신을 잡아먹기 위해 나온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거야.

기다려, 곧 그것을 증명해 줄 테니까.

* * *

꽃다방은 오늘도 초만원이었다.

자리가 없음에도 꾸역꾸역 기어 들어와 복도에까지 사람들이 들어찼기 때문에 오줌을 싸러가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벌써 최강철 경기를 중계하는 특집 방송이 시작된 지 2시간 가까이 흐르자 사람들이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안달을 부렸다.

특히 김영호와 류광일이 앞에 앉아 있던 40대 대머리와 곱슬머리는 연신 투덜거리며 신경질을 냈기 때문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질 정도였다.

“아이, 씨발. 미치겠네. 오픈 게임 보다가 질려 죽을 뻔했는데 뭐야, 이거. 또 광고야. 아, 이런 씨발 좆도.”

“좆만 한 새끼들이 돈만 밝혀서 그래. 무슨 광고를 열 몇 개씩 하는 거야. 씨발 놈들이 아주 우리를 홍어 좆으로 본다니까.”

친구는 친구를 닮는다더니 같이 있는 놈도 아가리에 욕을 달았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생각 같아서는 앞에 앉아 있는 두 놈의 아구창을 한 방씩 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뜩이나 초조해 죽겠는데 자꾸 성질을 건드리는 놈들의 주둥이가 그 옛날 심청전에 나오는 뺑덕어멈을 연상시켰다.

눈꼴 시린 장면을 겨우겨우 참아가며 시선을 텔레비전에 고정시켰지만 두 놈의 설레발은 끊이지 않았다.

듀란에 이어 최강철이 출전할 때 잠시 조용하던 놈들이 또다시 떠들면서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지랄들 한다, 지랄을 해. 광고 끝나니까 이제 링 아나운서가 나와서 시간을 끄는구만. 저 새끼들은 왜 소개하고 지랄이야. 어이구, 할 일 더럽게 없네. 시간이 아깝다. 시간이 아까워.”

“이젠 국가까지 연주하네. 이 새끼들 아주 사람을 말려죽일 작정이구만. 질질… 질질질. 권투 경기 한 번 보기 더럽게 힘들다, 힘들어!”

“얼씨구, 저 레프리 떠드는 건 안 하면 안 돼? 맨날 똑같은 얘기 뭐 하러 하는 거냐?”

아주 쌩 쇼를 한다.

지들 딴에는 남들 들으라고 떠드는 것 같은데 옆에서 계속 듣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그럼에도 참았다.

이제 곧 경기가 벌어질 참이었기에 걸레를 입에 문 놈들에게 시비를 걸기 싫었다.

“우와, 깡철이 눈빛 봐라, 죽여준다.”

꽃다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동시에 느낀 감정이었던지 잠시 동안 소란스러움이 멈췄다.

하지만 진짜는 최강철이 애국가를 따라 부른 후 레퍼리가 주의 사항을 주기 위해 양 선수를 중앙으로 불러 모았을 때였다.

듀란의 시선을 받은 최강철의 시선은 무서우리만치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두 눈은 마치 호랑이처럼 번들거렸다.

이것 또한 이전과는 다른 변화였다.

상대 선수가 쏘아봐도 시선을 피하거나 고개를 숙이던 예전과 다르게 최강철은 듀란의 시선에 맞서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마주 노려보고 있었는데 불꽃이 튀어나올 것처럼 강렬한 시선이었다.

“우리 깡철이가 아주 작정했구나. 오히려 듀란이 움찔하는 것 같네. 그렇게 보이지 않아?”

“야, 말 시키지 마. 뭐가 이렇게 살 떨리냐. 그냥 눈빛만 교환하는데도 오줌이 마려우니 이거 시합 보다가 심장마비 일어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최강철은 코너로 돌아왔다가 링 줄을 잡고 가볍게 주저앉았다가 일어선 후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모든 것은 끝났고 이제 전쟁이 시작될 시간이다.

관중들은 공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흥분과 긴장으로 인해 벌써부터 고함을 지르며 시합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때앵!

공이 울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순간 링의 중앙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가 마주 다가온 듀란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당신도 기다렸겠지.

하지만 나는 당신보다 훨씬 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오늘 복싱 역사상 영원히 기억될 정도로 큰 사고를 칠 거야.

전설의 돌주먹 듀란, 당신을 상대로.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