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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환생-136화 (136/308)

[136]

* * *

서울대 학생회관에 아침 8시부터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경영대학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다른 학과에 다니는 학생들도 꽤 많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9시가 되기 전에 이미 학생회관이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대학의 근본은 자유다.

자유로운 사상, 자유로운 학문, 자유로운 행동.

그런 것이 있기에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의 저항은 대학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현상이 특이하다.

교수의 지시로 인해 학생회가 행사를 주최했다고 해서 이토록 많은 대학생이 모였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뜻이다.

학생회에서 만든 응원 격문들이 여기저기 나붙었고 학생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제 2시간만 있으면 거대한 전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김철중과 일당들은 9시까지 오라는 말을 들었으나 아침 6시가 조금 넘어 학생회관으로 들어왔다.

제일 앞자리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응원을 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미친놈들이 너무나 많다.

서울대는 공부에 미친놈들이 흘러넘치도록 많다는 걸 예전부터 알았지만 이런 일에도 미친 짓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생회관에는 벌써 맨 앞줄 로얄석에 50여 명이 몰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학생회장과 83학번 선배들도 여럿 보이고 있었다.

더 웃긴 건 어둠을 뚫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뒤를 쫓아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야, 일단 가방 던져.”

“오케이.”

김철중의 지시에 따라 일당들이 로얄석을 향해 뛰어가 가방을 날렸다.

오늘은 선배에 대한 양보란 단어가 그들의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지워진 날이다.

대한민국의 고요.

나라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이 고요의 정체는 태풍의 눈에서 발생하는 폭발 직전의 침묵이었고 긴장이었다.

웰터급 세계 타이틀 통합챔피언 1차 방어전.

그 주인공은 바로 허리케인 최강철이었고 상대는 듀란이었다.

세계는 이들의 대결을 거대한 전쟁이라 불렀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토록 최강철의 경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대한민국에는 현재 4명의 세계 타이틀 홀더들이 있으나 프로 복싱이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음에도 전 국민이 통째로 미쳐 버리는 이런 지독한 관심은 받아본 적이 없다.

언론은 사람들의 반응을 먹고사는 괴물이다.

시합이 벌어지기 한 달 전부터 대한민국의 언론은 온통 최강철의 기사로 도배가 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온통 이 한판의 시합에 쏠려 있었으니 언론이 연신 떠드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광기가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최강철의 승리를 간절하게 바라는 광기가 말이다.

심리학 박사 박종용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민들의 뜨거운 반응에 대해서 이렇게 분석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강합에서 독립한 후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고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지만 또 다시 오랜 시간동안 군사독재에 시달리며 죽음과 같은 절망 속에 사로잡혀 왔습니다. 비록 한강의 기적이란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그런 세월을 지내면서 사람들은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고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신도 모르게 영웅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최강철 선수의 출현은 영웅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을 완벽하게 구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계의 복싱 팬들은 최강철 선수를 허리케인이라 부릅니다. 거침없이 싸우는 그의 복싱이 그만큼 투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는 강자들을 연파하며 통합 챔피언에까지 올랐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우리도 이런 영웅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커다란 응원을 보내는 것이라 생각되는군요.”

* * *

최강철은 호텔을 떠나면서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아침 일찍 찾아온 돈 킹의 얼굴에는 평소에 짓던 웃음 대신 긴장감이 잔뜩 담겨 있었다.

그가 보유한 유일한 슈퍼스타 허리케인의 출전.

허리케인은 그의 자랑이자 명예였고 미래에 대한 보장이었기에 천하의 돈 킹마저도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허리케인, 나는 자네를 믿네.”

“나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 겁니다.”

최강철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돈 킹이 내민 손을 붙잡아주었다.

남들은 그를 돈벌레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는 자신을 믿어주고 성장시켜 준 은인이었으니 충분히 존경받을 만하다.

그로서 족하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믿음을 받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호텔을 나설 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조용히 손을 들어주었다.

결전의 날.

예전처럼 달려와 사인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그리고 몸짓에서 자신을 향한 응원이 더욱더 크게 느껴졌다.

웃어주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이번에도 당신들에게 멋진 경기를 선사해 주겠다면서.

더 럼블에서 마련해 준 차를 타고 호텔을 떠날 때까지 서지영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보 같은 여자다.

사랑하는 남자가 중요한 일을 할 때 여자는 눈물과 걱정을 절대 보여서는 안 된다는 미신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여자다.

해가 지면서 어둠이 깔리자 시저 팰리스호텔 특설 링에 화려한 조명이 불을 뿜으며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 경기를 기다린 것은 대한민국 사람들뿐만 아니다.

전 세계의 복싱 팬들은 최강철과 듀란의 경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약 판매가 시작된 지 불과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매진이 되었다.

중동의 왕자들이 속속들이 날아왔고 각국의 재벌들과 할리우드 스타들까지 표를 구하기 위해 난리를 피웠다.

시저 팰리스호텔 특설 링 수용 인원 21,000석 중에서 후원 기업들이 가져간 표의 숫자는 13,000석에 달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 판매된 것은 겨우 8,000석뿐이었는데 로얄석 암표 가격이 10,000달러에 달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다른 경기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아무리 커다란 경기라도 후원 기업들이 알아서 표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경기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이 경기만큼은 유력 인사들은 물론이고 할리우드 스타들이 통 사정해도 표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런 실정이었음에도 최강철은 자신에게 배정된 표를 이용해서 그동안 사귀어왔던 사람들을 초청했다.

델 컴퓨터의 마이클 델, 시스코의 CEO 캐에른 파크와 레오나드 보삭 부부, 빌 게이츠, 버락 오바마, 그리고 서지영과 친구들까지.

한번 맺은 인연을 소홀히 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인연은 단순한 경제적인 이익에 의해 움직일 경우 쉽게 끊어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언제나 신뢰로 대해야만 한다.

화려한 조명을 뿜어내는 특설 링의 불빛을 보면서 최강철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특설 링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마치 오로라처럼 보였다.

“성일아, 저 불빛 멋있지 않아?”

“난 도대체 너란 놈을 모르겠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냐.”

“지금 상황이 어떤데?”

“넌 지금 시합을 앞둔 놈이…….”

이성일이 잠시 최강철을 바라보다 입맛을 다시며 눈을 돌렸다.

지금까지 꽤 많은 세월을 같이 지내왔지만 이놈의 정신 구조는 도대체 모르겠다.

이런 상황은 아무리 배포가 큰 놈이라도 긴장해야 되는 게 당연한 건데 최강철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어제 저녁.

오죽하면 미국 텔레비전에서는 한국의 모습을 특보로 내보내기까지 했다.

지금 한국은 그의 경기로 인해 나라 전체가 전쟁 선포를 하루 앞둔 긴장 속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서울의 거리와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이성일과 윤성호는 마른침을 연신 삼킬 수밖에 없었다.

너무 거대한 기대로 인해 심장이 벌렁거려 숨조차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최강철을 대한민국의 영웅이라고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부르고 있었다.

영웅이라, 영웅.

자신은 영웅이란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모른다.

그저 영웅이란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 전체가 최강철을 영웅이라 부르는 사람은 자신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친구 놈이었다.

“강철아, 점점 나는 두려워진다.”

“왜?”

“예전에는 시합에서 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세상에는 강한 자들이 산더미처럼 있는데 언제나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절대 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대한민국 전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 너를 영웅이라 부르면서. 이젠 네가 지면 대한민국이 지게 되는 거야.”

“이 자식아, 무슨 말을 그렇게 거창하게 해.”

“거창한 게 아냐. 시합에서 질 수는 있어. 그건 다시 재기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국민들이 상처 입는 건 두렵다. 우리로 인해 실망하는 모습을 볼까 봐 그게 두려워.”

“우리 성일이가 철들었네.”

“인마, 이제 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마. 시합을 앞두고 진지해지라고.”

“난 충분히 진지하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이 나한테 거는 기대도 알고 있어. 그래서 태극기를 앞세우는 거 아니냐.”

최강철이 빙그레 웃으며 이성일을 바라봤다.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하더니 이성일이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복싱을 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친구 놈의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멋있게 변하는 모습.

전생에서도 이렇게 살았다면 이성일은 자신을 돕느라 등골 빠지는 삶을 살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느 날.

전세까지 빼서 캐나다로 보내주고 컵라면을 먹으며 버티던 날.

외로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어쩔 줄을 모르며 지내던 지옥 같은 날.

이성일은 불쑥 찾아와 자신을 멱살을 틀어쥐고 왜 이렇게 병신같이 사냐며, 왜 이렇게 슬프게 사냐며 눈물을 쏟아냈다.

그때 나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 나는 바보였어, 그리고 너무나 슬퍼서 어쩔 줄을 몰랐지.

보내줄 학비가 모자라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너에게 전화를 했을 때 다음 날 통장으로 들어온 돈을 보면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미안함도 사치라는 걸 늦게 알았어.

나로 인해 네가 겪었던 그 고통.

바보는 내가 아니라 너였더라.

사채까지 얻어서 나에게 준 그 돈으로 인해 네 마누라가 나에게 달려와 소리를 질렀을 때 너는 처음으로 제수씨에게 손찌검을 했었지.

네 마누라가 뭘 잘못했다고 그런 짓을 해.

왜 그렇게까지 했냐. 나 같은 놈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했어.

잘못은 내가 했던 거잖아. 모든 잘못은 병신같이 살면서 너를 괴롭혔던 내 잘못이었어.

성일아, 이 자식아. 나는 말이야… 너만 보면 눈물이 나와.

이 지랄 맞은 세상에서 너 마저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버텼을까.

그래서 이젠 그렇게 살지 않을 거고, 너를 괴롭히지도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라. 난 절대 지지 않을 테니까.

우리의 남은 삶. 다시는 패배자로 살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보지 마, 이 새끼야!

라커룸에서 대기하는 시간은 지루하다.

듀란이 엄청난 훈련을 하면서 전쟁에 대비해 왔다는 것을 알지만 나 역시 지금까지 준비해 왔던 어떤 경기보다 최선을 다했다.

듀란.

당신을 존경하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한 번 죽었던 사람이야. 죽음의 맛을 본 놈이 누굴 두려워하겠는가.

더군다나 나에게는 악마에게 받은 강철 같은 심장이 있어.

물론 내가 쓰러질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복싱이라는 특수한 시합에서 나오는 한순간의 결과일 뿐 내가 당신을 대하는 자세로 인한 것이 절대 아닐 거다.

왜냐하면 난 이번 시합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당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전력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야.

나는 투신이거든.

그러니까 두려워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되어야 해.

투신은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단어가 아니잖아.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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