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 * *
최강철은 수없이 몰려 있는 기자들 앞에서 체중을 쟀다.
정확하게 66.5㎏. 한계 체중에 조금 부족할 정도였다.
일부러 맞춘 체중이 아니었다.
최강철은 대부분의 복싱 선수들과는 다르게 지금까지 체중을 빼기 위해 고생을 해본 적이 없다.
평소의 체중은 70㎏ 정도였으나 운동을 시작하고 두 달 정도 지나면 체내에 남아 있던 지방들이 완벽하게 빠져나가며 웰터급의 체중에 정확하게 맞아들었다.
많은 복서가 체중을 맞추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한다.
어떤 선수들은 계체량이 있기 며칠 전부터 물만 마시며 체중 감량을 했고 1차 계체량에 실패라도 하게 되면 사우나장에 들어가 몇 시간이고 땀을 빼며 간신히 체중을 맞추는 경우도 많았다.
훈련이 부족해서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복싱 선수들은 자신의 평소 체중보다 한 체급 아래에서 경기를 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체중 조절을 한다는 것은 뼈를 깎아내릴 정도의 고통을 수반했다.
듀란도 무사히 계체량을 통과했다.
그는 도전자였기 때문에 먼저 체중을 쟀는데 66.3㎏ 으로 오히려 최강철보다 몸무게가 덜 나갔다.
정말 인간 승리다.
최근 들어 거의 1년 정도 쉬면서 살이 엄청나게 붙었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과거 전성기 시절의 몸을 보는 것처럼 날렵하게 변해 있었다.
양측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공식 계체량 행사가 무사히 끝나자 최강철은 라커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가 준비한 옷은 검은색으로 통일된 슈트였다.
“인물 산다, 인물 살아. 역시 옷이 날개야. 강철아, 그거 나중에 나 좀 빌려주라. 다운타운 나갈 때 입으면 여자들한테 인기 짱이겠다.”
“그래라. 그런데 너같이 뚱뚱한 놈한테 이 옷이 맞을지 모르겠다.”
“걱정도 팔자네. 옷은 늘어나게 되어 있어. 특히 비싼 옷은 옷값을 한다니까.”
“이거 비싼 거 아냐, 인마. 다운타운에서 100달러 주고 산 거야.”
최강철이 웃으며 말하자 이성일이 못 믿겠다는 듯 의심의 눈초리를 마구 보냈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 최강철의 모습은 슈트를 입자 영화배우 뺨칠 정도로 변해 있었다.
검은색 슈트에 흰색 와이셔츠.
최강철이 격식을 차릴 때만 입는 복장이었다.
윤성호가 불쑥 나선 것은 이성일이 슈트를 이리저리 만져보며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강철아, 왜 그런 옷을 입은 거냐? 어차피 계체량 행사와 기자회견은 동시에 벌어져서 격식을 차리지 않잖아. 내가 보니까 듀란은 간단한 체육복 차림이더라.”
“그냥 오늘은 이 옷을 입고 싶었어요. 왜요, 이상해요?”
“아니다… 나가자, 시간 됐어.”
공식 계체량 행사에 참여했던 기자들이 전부 기자회견장으로 몰려들었고 뒤늦게 많은 기자가 합류했기 때문에 컨벤션 센터는 기자들과 경호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최강철이 회견장에 나타나자 기자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미국에 넘어온 후 지금까지 2달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동안 기자들은 최강철의 모습을 잡기 위해 첩보전을 연상시킬 만큼 별별 작전을 다 동원했으나 인터뷰에 성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정해진 시간보다 회견장에 일찍 나온 것은 듀란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듀란은 그보다 13살이나 더 많았기 때문에 나이로 따지면 삼촌뻘이었고, 권투 경력으로 따지면 까마득한 대선배였다.
물론 그가 도전자였고 자신이 챔피언이었지만 최강철은 그런 자존심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먼저 자리에 앉은 후 5분 정도 지나자 듀란이 스태프들과 함께 회견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들어오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췄다.
그러자 듀란이 웃으며 최강철의 손을 잡아 왔다.
이렇게 직접 대면한 것은 처음이다.
젊었을 시절 영화배우를 연상시킬 정도로 잘생긴 외모를 가졌기에 사람들은 그를 파나마의 귀공자로 불렀다.
하지만 그의 진짜 별명은 핸드 오브 스톤, 즉 돌주먹이다.
링에 올라서는 순간 한 마리 야수가 되어 상대를 몰아붙이는 그의 투지는 상대를 질리게 만들 만큼 강렬했고 무시무시했다.
“허리케인, 우리 예전에 한번 봤지?”
“경기장에서 봤죠. 북미 타이틀전 때 오셨잖습니까.”
“그래, 그랬지. 그때 자네가 나와 싸우자고 했었는데 이제 그 말이 현실이 되었구만. 우리 멋진 경기를 펼쳐보세.”
“이렇게 경기를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슨 소릴. 기자들이 기다리는군. 우리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를 할까.”
악수를 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몸부림치던 기자들의 행동이 뜸해지자 듀란이 먼저 손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한쪽에 있던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공식 기자회견이 시작되었다.
기자들은 언제나 하이에나처럼 행동한다.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내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기자회견장, 특히 이런 빅 이벤트의 전쟁을 알리는 회견장에서는 상대에 대한 독설을 유도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백전노장 듀란은 최강철에 대해 한마디도 모욕을 주거나 멸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최강철도 마찬가지였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정말 실망스러운 기자회견이었다.
야수와 야수의 대결로 알려졌으니 그동안 숨어 있던 최강철이 직접 듀란을 대면하면 엄청난 신경전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 어떤 기자회견보다 싱거워 기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그들은 최강철의 성질을 안다.
듀란이 터프하다고 정평이 나 있지만 뒤늦게 혜성처럼 나타난 최강철은 동양에서 온 갈색 폭격기라 불리며 허리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화끈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중요한 시합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수많은 뉴스들을 양산했다.
프레드 아두와 주먹다짐까지 갈 뻔했던 것은 물론이고 마크 브릴랜드와도 그에 못지않게 뜨거운 신경전을 펼쳐 그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기자들은 최강철의 행동을 보면서 영악하기 짝이 없다고 논평을 해왔다.
강력한 적을 흥분시켜 자신의 페이스로 끌고 들어오는 최강철의 심리전은 언제나 상대보다 한 수 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사람처럼 행사가 끝날 때까지 전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특종이 터지기 시작한 것은 싱거웠던 기자회견이 모두 끝났을 때였다.
기자회견이 모두 끝나자 최강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듀란의 손을 먼저 잡았는데 그때부터 뉴스거리를 한꺼번에 폭발시켜 주었다.
“듀란, 당신은 나의 우상이었습니다. 복싱을 하기 전부터 당신의 경기를 보면서 흥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링에서 마주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랬나, 고마운 말이군.”
“고맙다는 말은 시합이 끝난 후 해주시기 바랍니다. 몸을 보니 정말 많은 연습을 했다는 걸 알겠더군요. 이렇게 멋진 몸으로 나타나 줘서 고맙습니다. 나는 과거의 나태했던 듀란과 싸우게 될까 봐 정말 걱정이었습니다.”
“천하의 허리케인을 상대하면서 그럴 리가 있겠나. 나는 타이틀을 빼앗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했어. 나를 보고 사람들이 돌주먹이라고 부르지만 내 열혈 팬들은 나를 ‘디스트로이어’라고 부르지. 왜인 줄 아나? 나는 상대가 파괴될 때까지 이 주먹으로 두들기기 때문이야. 그러니 조심해. 자네는 지금까지 해왔던 어떤 경기보다 힘든 경기를 치르게 될 테니 말이야.”
“원하던 바입니다. 나의 우상 듀란, 당신에게 진짜 야수가 무엇인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90전이 넘는 경기를 하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을 이번 경기에서 맛보게 될 겁니다.”
* * *
성호전자 재무 팀의 남효열 차장은 상반기 실적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다가 슬금슬금 다가온 김석태 과장을 향해 눈을 돌렸다.
김 과장의 손에는 A4 용지가 들려 있었는데 빽빽하게 볼펜으로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차장님, 이천 원 내십시오.”
“왜?”
“우리 팀은 돈을 관리하는 부서잖습니까. 그래서 최강철의 경기 결과에 따라 한 사람에게 돈을 몰아주기로 했습니다. 통계학적인 분석으로 가장 정확한 결과를 맞춘 사람이 독식하는 것이죠.”
“어이구, 잘들 한다. 넌 어째 일은 안 하고 맨날 엉뚱한 짓만 하고 돌아다녀? 우리가 재무 팀이지 도박 팀이냐?”
“도박 팀이라뇨. 이건 어디까지나 통계학적인 실력이 누가 가장 좋은가를 알아내기 위한 것이에요.”
김 과장의 뻔뻔한 대답에 남효열이 사무실을 주욱 둘러봤다.
팀원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는데 남효열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하아, 회의 시간에 바쁘니까 일들 열심히 해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이 친구들은 소귀의 경 읽기구만. 김 과장, 애들 관리 똑바로 못 하겠어? 네가 제일 선임이면서 이런 짓이나 하고, 그러니까 팀이 엉망이잖아!”
“죄송합니다.”
김석태는 남효열이 얼굴을 찡그리며 잔소리를 해대자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평소와는 다른 남 차장의 반응에 김석태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슬그머니 등을 돌려 도망갈 채비를 했다.
그때 남효열의 목소리가 툭 하고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장난스런 웃음이 잔뜩 배어 있었다.
“얼마라고?”
“예? 아… 2천 원입니다.”
“30명이 2천 원씩 내면 6만 원인데 겨우 그걸로 뭐 하냐. 최강철이 나오는 빅 이벤트라면 최소 5천 원은 되어야 하지 않겠어?”
“아이고, 차장님. 5천 원은 너무 큽니다.”
“그런가. 야, 그런데 뭘 찍는 거냐?”
“일단 누가 이길지를 찍습니다. 그러고는 라운드를 찍는 거죠. 라운드가 같으면 더 근사치에 있는 사람이 먹는 방법입니다.”
“이리 줘봐.”
남효열이 김석태가 가지고 있는 종이를 뺏어서 주욱 살펴보더니 기가 막히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이런 인간들 하고는.
이게 무슨 내기란 말인가.
종이는 반으로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직원들의 이름은 전부 최강철 쪽으로 몰려 있었다.
여기서 만약 그가 듀란 쪽에 건다면 진짜 독식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최강철 쪽에 자신의 이름을 쓰며 그 옆에 5라운드 2분이라고 적었다.
그 모습을 본 김석태가 웃었다.
그래, 평소 남효열의 행동이라면 절대 듀란 쪽에 동그라미를 칠 사람이 아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직원들은 돈을 잃을지라도 최강철이 이겨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통계학은 개뿔.
* * *
토요일.
직장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요일이고 주중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친구들과 만나 마음껏 즐기는 날이었다.
윤미정과 정혜미, 김선숙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친해져서 직장 3년 차인 지금까지 우정을 지속해 오는 사이였다.
그녀들은 매주 토요일만 되면 습관처럼 모여 저녁을 먹은 후 2차로 맥줏집에 들러 수다를 떨었는데 주중에 있었던 일들이 그 자리에서 전부 안주가 되어 흘러나왔다.
저녁으로 우아하게 떡볶이와 순대, 김밥을 사이좋게 나눠 먹고 그녀들이 잘 가는 맥줏집으로 향했다.
여자들의 생명은 분위기와 안주발이고 종각에 있는 이 맥줏집은 그녀들의 취향과 딱 맞아떨어지는 장소였다.
불토의 저녁은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종각 뒤편, 거리에 넘실거리고 있었는데 학생들과 회사원들이 짬뽕이 되어 웃고 떠들며 쉴 새 없이 지나갔다.
그녀들도 그중의 하나다.
꽃다운 27살의 나이였으니 이 젊음은 아직 그녀들의 것이었다.
맥줏집이 있는 빌딩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게로 올라가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뭐지?
그녀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아함을 나타냈다.
사람들은 맥줏집 앞에서 뭔가를 보고 있었는데 얼굴에 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가 붙여놓은 벽보를 본 후 그녀들 또한 웃음을 머금었다.
내일 11시 대한의 건아, 최강철의 통합 타이틀전을 맞이하여 무료로 맥주를 드립니다. 많이 오셔서 우리의 영웅 최강철을 응원합시다.
PS, 깡철이가 지면 돈 받습니다. 열 받는데 맥주까지 공짜로 줄 수는 없잖아요!
깔깔깔.
여고생은 아니었지만 주인이 써놓은 내용을 보며 그녀들은 즐겁게 웃었다.
최강철, 복싱 선수이면서 현재 대한민국 여성들에게 인기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내였다.
꽃미남들이 바글대는 영화배우와 탤런트들을 제치고 압도적인 표차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인물은 인물이다.
더 재밌는 건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최강철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점이었다.
“미정아, 내일 뭐 해?”
“뭐 하긴 늘 하던 거 해야지.”
“그게 뭔데?”
“늦잠.”
정혜미의 질문에 윤미정이 뻔뻔하게 대답하며 왜 묻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혜미는 물론이고 김선숙까지 그녀의 답변에 완벽한 공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들도 그렇기 때문이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6일 내내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어댔으니 일요일만큼은 세상천지가 개벽해도 이불 속에 누워 자유를 만끽했다.
“이것아, 오늘 우리 사무실 분위기가 어떤 줄 알기나 해?”
“무슨 일 있었어?”
“최강철 때문이지. 오늘 하루 종일 우리 사무실 남자 직원들이 최강철 이야기만 하더라.”
“하긴, 우리 사무실도 그랬어.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고?”
“바보야, 매력적인 여자는 남자들의 관심사에 민감해야 돼. 내가 좋아하는 김 대리님이 최강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야. 그러니 내가 그 사람 시합을 안 볼 수 있겠어?”
“네가 권투를 본다고?”
이건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정혜미는 운동하고는 지금 이날 이때까지 담을 쌓고 살아온 여자였고 심지어 텔레비전에서 요가만 나와도 채널을 돌릴 정도였다.
두 여자가 동시에 정혜미의 얼굴을 바라보다 불현듯 뭔가 생각난 것처럼 천천히 입맛을 다셨다.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남자 직원들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든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로 변신해서 시집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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