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31화 (131/308)

[131]

* * *

로베르토 듀란.

파나마 출신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그는 4체급을 석권하면서 살아 있는 전설이 된 사람이었다.

라이트급에서 시작해서 웰터급까지 제패하는 동안 무적을 구가했고 또 다른 살아 있는 전설, 레너드와 막상막하의 대등한 시합을 펼쳤을 정도로 막강한 실력을 보유한 강타자였다.

오죽했으면 레너드가 맞상대를 하지 못하고 외곽으로 돌면서 그의 주먹을 두려워했을까.

세간에서는 두 번째 시합에서 그가 경기를 포기한 걸 두고 말이 많았으나 그때는 갑자기 찾아온 복통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링에서 내려온 것뿐이었다.

그의 복싱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불명예스러운 패배를 당한 것은 토머스 헌즈와의 대결에서 발생했다.

불과 2라운드만의 충격적인 패배.

강력한 헌즈의 원투 스트레이트에 고목나무 쓰러지는 것처럼 캔버스에 누워 버린 듀란은 경기를 끝내고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이건 내 경기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컨디션이 엉망인 상태에서 링에 올라와 제대로 된 경기를 할 수 없었어요. 오늘 내 몸은 천근처럼 무거워 헌즈의 펀치를 보면서도 피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헌즈와의 재대결을 원합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다시 경기를 한다면 충분히 그를 잡을 수 있소.”

언론은 그런 그를 비웃었다.

처참한 패배에 대한 핑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변명은 사실이었다.

아내와의 불화,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훈련을 하지 못했고 시합 당일은 계속된 설사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는 강력히 재대결을 원했으나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쉬웠다.

다시 붙는다면 세상에 그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그의 바람은 헌즈가 슈퍼 미들급으로 전향한 탓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와신상담.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지금까지 그가 복싱 영웅으로 등극하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고 그는 언제나 그 난관들을 극복하면서 전설을 이어온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최강철과의 대결이 확정되는 순간부터 혹독한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전설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슈퍼스타로 거듭나면서 자신보다 훨씬 많은 개런티를 최강철이 받았지만 한 번도 진다는 생각을 가져보지 않았다.

21전 21KO승을 거두고 있는 최강철의 전적은 독보적이었으나 그의 펀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원 펀치.

단 한 방에 상대를 실신시키는 펀치력이 없다는 건 복서로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난타전이 벌어진다면 최강철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밥 애런이 보유한 전문 트레이너 집단이 듀란의 진영에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체계적인 훈련 시스템으로 체력 강화 훈련을 담당한 피지컬 트레이너부터 최강철의 장단점을 분석해 온 전략 분석관, 근육을 풀어주고 다듬어주는 메디컬 트레이너까지 다양한 전문가들이 그의 훈련을 돕기 위해 합류했다.

시합이 결정되고 두 달 동안 듀란의 몸은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75㎏까지 불었던 몸은 68㎏까지 감량되었는데 섀도복싱을 하는 그의 모습은 날아갈 것처럼 빨랐고 경쾌했다.

그만큼 훈련량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듀란에게는 영혼의 파트너 레이 아르셀이 언제나 함께해 왔는데 그가 기자들에게 한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시합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열심히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자신의 훈련 모습을 공개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누가 본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최강철이 비밀리에 훈련하면서 언론에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는 것과 완벽하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팡, 팡, 팡!

마치 샌드백이 찢어질 것처럼 강력한 펀치 샤워에 토머스의 눈이 돌아갔다.

스포츠라인의 토머스는 복싱 전문 기자로서 듀란에 대한 취재도 여러 번 했지만 이런 훈련 장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예전 전성기 때의 듀란을 보는 것 같았다.

날렵하게 변해 버린 모습은 두 달 전에 봤을 때의 듀란이 아니었고 보름 전하고도 또 달라 보였다.

사람의 능력은 정말 무서운 것인가 보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집념이 얼마나 커다란 변화를 보이는지 듀란은 두 눈으로 직접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토머스는 어떤 기자 못지않게 최강철의 팬이었기에 걱정이 앞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건 오늘 같이 온 워싱턴 포스트지의 맥과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토머스. 자네가 보기에는 어때?”

“놀랍군. 아직도 두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 저 정도니 이번에는 허리케인이 위험하겠어.”

“펀치가 마치 망치 같아. 샌드백을 봐. 펀치 맞은 자국이 들어가잖아.”

“임팩트가 정확하다는 뜻이고 펀치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거겠지. 나는 저런 건 처음 본다.”

토머스가 소곤대며 말하자 맥과이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듀란의 훈련장에는 30여 명의 기자가 몰려 있는 상태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놀라움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 밥 애런이 작정한 것 같더구만. 듀란이 승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아.”

“원래 그 인간이 소속 선수들한테는 잘해. 그래서 슈퍼스타들이 돈 킹을 떠난 거 아니겠어?”

“돈 킹도 달라졌어. 허리케인한테 하는 거 보면 지극정성이잖아.”

“흐음… 그건 그렇지. 나도 그게 놀라워.”

“자네가 봤을 때 이 경기 어떨 것 같은가?”

“처음에는 허리케인이 이길 거라고 확신했는데 이제는 뭐라고 말하기 어렵겠어. 듀란이 이렇게 까지 투지를 불사를지 몰랐거든. 이대로라면 막상막하의 경기가 될 것 같아.”

“허리케인의 광팬이 자네가 그런 평가를 내리는 걸 보면 정말 재밌는 경기가 되겠어. 도박사들이 듀란의 훈련 장면을 보고 나서 승률을 대폭 조정했다고 하더라.”

“어떻게?”

“처음에 시합이 결정되었을 때 7대 3으로 최강철의 우세였지. 그런데 한 달 전에 6대 4로 변했다가 지금은 5 대 5로 조정되었대.”

“전문가 집단보다 도박사들이 더 정확해. 그들은 돈이 달렸기 때문에 각종 정보가 무시무시하거든.”

“허리케인이 이번 달 말에 미국으로 들어온다면서?”

“마무리 훈련을 뉴욕에서 한다고 하더라.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한국으로 쫓아갈 판이었는데.”

“레드불스는 그 친구의 고향 같은 곳이지. 스파링 파트너도 많으니까 당연히 넘어오는 거 아니겠어?”

“나는 그 친구 돌아올 때 공항으로 나갈 생각이다. 자네가 갈 건가?”

“당연한 걸 묻고 그래. 그런 빅뉴스를 놓칠 수 없잖아.”

“공항이 또 난리가 나겠군.”

토머스가 사진기와 수첩을 정리하며 빙그레 웃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최강철을 본다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웃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허리케인 최강철.

그에게 최강철은 하늘에서 준 선물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기사를 쓰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9년 전 그가 불가사의한 능력을 보여주며 세계 선수권대회를 제패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를 따라다니는 동안 진정한 행복을 맛봤다.

상대를 향해 무시무시한 연타를 터뜨리는 그의 복싱을 보면서 전율에 젖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랑이라면 사랑이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걸 보고 사람들은 우정이라 부르지만 그가 최강철을 생각하는 건 우정을 넘은 사랑이었다.

맥과이어의 입이 불쑥 열린 것은 그가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 할 때였다.

“만약에 허리케인이 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듀란이 이기면 과거로 돌아가는 거야. 너도, 나도 새로운 영웅을 원하잖아. 허리케인은 새로운 영웅이고 나는 그가 끝내 이 전쟁에서 이겨주기를 바라. 그 친구는 언제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싸움을 이겨왔어. 비록 듀란이 무섭게 변했지만 나는 허리케인이 분명 극복할 거라고 믿는다.”

* * *

시합이 점점 다가왔음에도 최강철이 계속 학교에 나오자 경영대학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교 전체가 술렁거렸다.

정말 시험까지 모두 끝내고 간다는 약속이 현실로 다가오자 학생들은 최강철을 향해 모두 눈인사를 하며 그가 걸어가는 길에서 비켜섰다.

누구도 그의 행동을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의 의지, 그리고 행동에 말없이 속으로 응원의 박수를 보낼 뿐이다.

학교에 나와 수업을 받는 동안 그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던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그냥 찾아온 게 아니다.

몸에 좋다는 인삼은 물론이고 보약과 심지어 어떤 놈은 해구신까지 들고 왔다.

그들의 정성을 고맙게 여기며 거절하지 않았다.

비록 시합을 앞두고 함부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아니었기에 윤성호에게 건네주었지만 그들의 정성만은 마음 깊이 고마워했다.

사회인들이 보여주는 이기적인 배려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정성이기에 더욱더 가슴으로 다가왔다.

이런 세상, 이런 순수한 마음이 그들에게서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를 바란다.

김철중이 슬그머니 다가온 것은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선택 교양인 화학 수업이 끝났을 때였다.

“선배님, 이거 받으십시오.”

“뭐냐?”

“족보입니다.”

“너희 집 족보를 왜 내게 가져와? 설마 너희 조상님 이름 외우라는 건 아니지?”

“그게 아니고요, 요게 이번 시험에 나올 예상 문제를 뽑아놓은 것들입니다. 이것만 외우시고 오시면 시험은 무난하게 치를 수 있을 거예요.”

“하아, 좋은 거네.”

“외우실 시간이 없으면 그냥 챙겨 오십시오. 그냥 오셔도 될 겁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최강철이 비실거리며 웃은 김철중을 바라보며 의문을 나타냈다.

그가 내민 것은 노트 반 권 분량의 A4 분량이었는데 슬쩍 들춰보니 모든 과목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조교 형님들이 시험 볼 때 선배님 곁으로 오지 않겠다고 전해달랍니다.”

“그 소리는 나보고 커닝해도 눈감아주겠다는 소리구나?”

“뭐, 그런 거죠.”

“특혜를 받고 사는구만.”

“선배님은 그 정도 특혜는 받으셔도 됩니다. 전공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도 아마 그렇게 해줄 겁니다. 우리 과 조교들이 다른 과목 조교들한테 부탁을 해놔서 아무도 터치하지 않을 거예요.”

“철중아.”

“예, 선배님.”

“가서 그러지 말라고 전해. 공정한 시험을 감독해야 하는 조교들이 그런 짓 하면 되겠어. 그리고 쪽 팔리게 내가 커닝을 할 것 같으냐?”

“그게 아니라…….”

김철중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놈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최강철은 강의실을 나섰다.

아무리 순수한 의도라 해도 행동이 정당치 못하면 그건 이미 타락된 것이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뿐 아니라 나중에 헛된 이야기로 부풀려져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될 수 있다.

시험 당일.

최강철이 나타나 시험이 치러지는 강의실에 들어서자 모든 학생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첫 과목은 영어 시험이었기에 가장 먼저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왔다.

영어는 어느 누가 시험을 내도 풀어낼 자신이 있었다.

6년 동안 미국에서 지내며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원서로 된 경영학 원론까지 공부할 실력이었으니 기초 영어 정도는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였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까지 그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졌는지 모른다.

비록 훈련 때문에 시험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수업을 충실히 듣는 것만으로도 시험을 치르기엔 충분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루시퍼가 준 압도적인 지능 때문이다.

한 번 본 것은 그의 머릿속에 거의 완벽하게 저장된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시험을 볼 때마다 계속 일찍 나가자 학생들이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조교들은 김철중의 말대로 아예 그의 근처에 접근하지 않았지만 시선이 가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관심이 가는 사람에게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재밌는 일이 발생한 것은 마지막 경영학 원론 시험을 끝내고 최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발생했다.

조교로 있는 같은 학번 조윤호가 그를 붙잡았던 것이다.

조윤호는 대학원에서 석사 코스를 밟고 있었는데 그와는 세 번이나 같이 밥을 먹었고 평소에도 커피를 마시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너 왜 그러냐? 제발 좀 쓰고 나가!”

“무슨 소리야?”

“뭐라도 갈기고 나가. 백지로 내지 말고. 뭐라도 대충 써야 점수를 줄 거 아니냐.”

“썼어. 그것도 많이. 그러니까 잡지 마라. 나 내일 출국하려면 준비할 게 많아.”

“정말… 이야?”

“네가 직접 보면 되잖아. 어쨌든 고맙다 신경 써줘서.”

최강철의 그의 황당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활짝 웃었다.

이런 놈하고는.

걱정하지 마, 인마. 쓸 만큼 충분히 썼으니까 네가 채점하는 데 부담이 되지 않을 거다.

최강철이 문을 나서자 지켜보고 있던 놈들 몇이 벌 떼처럼 일어나 달려 나왔다.

놈들은 최강철을 지금 놓치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처럼 뛰어나왔는데 시험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것이 한두 놈이 아니라 거의 절반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선두에 섰던 김철중이 소리를 질렀다.

“선배님, 내일 공항으로 나가겠습니다! 저희들 오지 말라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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