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 * *
최강철은 집에서 나와 성호체육관으로 들어갔다.
시합이 잡히자 윤성호는 눈을 부릅뜨고 체육관으로 오라며 협박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서서히 체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한강변을 여유 있게 달리던 로드워크를 10㎞로 늘렸고 보름 만에 무게를 점점 올려 5㎏ 모래 각반을 양다리에 찼다.
근육을 강화하기 위한 웨이트 트레이닝은 체육관에서 집중적으로 시행했는데 운동을 쉬면서 이완되었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자 온몸에서 힘이 솟구쳐 올라왔다.
이제 성호체육관의 관원은 300명에 육박할 정도였으나 관장인 윤성호는 3층 전체를 최강철의 단독 훈련장으로 막아놨다.
1, 2층이 바글거렸음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훈련 장소가 부족해서 관원들이 불만을 터뜨릴 정도였으나 윤성호는 최강철이 학교를 갔을 때에도 비어 있는 3층 훈련장을 개방하지 않았다.
기자들의 등쌀도 장난이 아니었다.
어떡하든 최강철의 훈련 장면을 촬영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체육관 앞은 기자들로 인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 와중에도 최강철은 학교 수업에 빠지지 않았다.
금요일이 공강이라 일주일에 4번만 학교에 가면 되었다.
윤문호 교수가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말을 했으나 그는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맙다는 인사만 한 후 꼬박꼬박 수업에 참여했다.
* * *
MBC의 ‘화제의 현장’ PD 전성학은 스포츠데일리에서 터뜨린 기사를 보면서 번뜩 눈을 치켜떴다.
<허리케인, 그는 이번 시합을 포기한 것인가>
자극적인 문구의 타이틀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간단했지만 그만큼 관심이 갔고 걱정스러웠다.
시합을 코앞에 둔 최강철이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학교 수업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사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정희 씨!”
“예, PD님.”
“이번 주 나가는 거 편성 취소 해.”
“무슨 말씀이세요. 편집만 끝나면 되는데?”
“그건 나중에 써먹을 테니까 급하게 서치 팀을 짜봐.”
“도대체 왜 이러세요? 오늘 금요일이에요. 우리 팀원들 벌써 2주째 주말을 쉬지 못했다고요!”
조연출 이정희가 소리를 빽 질렀다.
벌써 3년째 전성학과 호흡을 맞춰 오고 있는 그녀는 성질이 나면 일단 들이박고 보는 성격을 가진 왈가닥이었다.
하지만 전성학은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능글맞게 웃었다.
“정희 씨, 우리 프로그램 저번 주 시청률이 얼마 나왔지?”
“그건 PD님이 더 잘 알잖아요. 새삼스럽게 그걸 왜 물어요? 간 오그라들게.”
“그래, 5%. 아주 죽여주는 시청률이지. 어이, 노처녀 정희 씨, 밥줄 끊어지면 뭐 먹고 살래?”
“우와, 이 양반이 또 긁기 시작하시네. PD님, 우리 계급장 떼고 맞짱 한번 뜨자 이거죠?”
“그럴 리가 있나. 정희 씨 손톱이 얼마나 무서운데. 이거 한번 봐. 무슨 생각 안 들어?”
전성학이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이정희 앞으로 툭 던져 주었다.
성격은 지랄 맞아도 머리 하나는 비상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이정희는 신문을 보자마자 탄성을 내질렀다.
그림이 좋다.
다큐 프로그램이라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외면을 받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걸로 이번 주 우려먹어 보자, 이거죠?”
“제발 우리도 시청률 좀 올려보자. 이러다가는 ‘화제의 현장’ 진짜 가을 개편 때 목숨이 잘릴지 모른다고.”
“좋은데요.”
“그렇지?”
“급하게 뛰어야겠네요. 서치 팀도 10명 정도 풀어야 하고 시민 인터뷰도 따야겠죠?”
“그럼, 그럼. 당연한 거지.”
“휴우, 그러고 보면 PD는 그냥 하는 게 아닌가 봐요. 이렇게 여우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걸 보면 가끔 존경스럽기도 해요. 알았어요. 이번 주 데이트 취소할게요.”
통합 타이틀전을 앞둔 최강철이 꾸준히 학교에 나가자 신문에 이어 텔레비전에까지 화제를 삼았다.
신문에서는 사실 확인에 이어 걱정이 된다는 기사에 그쳤지만 텔레비전에서는 미치도록 열심히 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꼭 수업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여론 조사까지 하면서 최강철의 수업 참여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고들었다.
국민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최강철 선수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러는지 도대체 알 수 없어요. 그러다가 시합에서 지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제발 최강철 선수 훈련에 집중해 주세요.”
“서울대가 문젭니다. 오죽 학생들을 잡았으면 시합을 앞둔 최강철 선수가 수업에 들어가겠어요? 이런 경우에는 편의를 봐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글쎄요. 학생이니까 공부하는 건 당연한데 걱정이네요. 그래도 저는 최강철 선수를 믿습니다. 허리케인 최강철, 파이팅!”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훈련을 끝내고 땀으로 범벅이 된 최강철이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시작되었는데 윤성호와 이성일은 나란히 앉아 영화 감상을 하듯 지켜보는 중이었다.
워낙 텔레비전에서 예고 방송을 때렸기 때문에 두 사람은 프로그램이 방송되기 10분 전부터 침을 삼키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익숙한 장면이다.
미국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벌어지던 일이라 이제는 뭐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우와, 시작부터 죽여주는구만. 강철이가 역시 화면발은 잘 받아. 그런데 학교 다니는 것 때문에 심층 취재 했다고 그러더니 왜 경기 장면을 내보내는 거지?”
“그거야 일단 사람들 시선을 끌려고 그러는 거잖아. 넌 그런 것도 모르냐?”
“어이구, 관장님. 똑똑해서 좋으시겠어요.”
“지금 비웃는 거지?”
“그럴 리가요.”
둘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면 우애 좋은 형제를 보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훈련이 끝나면 뭐가 그리 좋은지 시시덕거리기를 멈추지 않았으니 천상배필이다.
윤성호가 열심히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최강철에게 고개를 돌린 건 경영학과장인 윤문호의 인터뷰가 나올 때였다.
“강철아, 저 사람 아는 사람이냐?”
“우리 학교 교수님입니다.”
“참 고지식하게 말하네. 서울대는 원칙을 고수한다니 한심하구만. 저 사람, 국민들한테 욕 좀 먹겠어.”
그렇다. 지금 윤성호는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서울대의 학칙에 대해 원론적인 말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최강철의 승리를 간절히 원하는 국민들이 들었을 때 충분히 열 받을 말이었다.
이해가 간다.
자신에게 학교 수업을 받지 않아도 무슨 수를 쓰든 해결하겠다던 윤문호 교수는 화제가 되자 학생의 본분에 대한 원칙을 말하며 최강철의 태도를 칭찬하고 있었다.
참 고지식한 양반이다.
* * *
“도환아, 뭐 먹을까?”
“너 왜 이러냐?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이 자식아, 친구끼리 밥도 못 먹어? 우리가 원투 해 사귄 사이냐.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묻고 그래.”
“허이구,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네. 너 인마, 최근 들어 네가 몇 번이나 전화한 줄 알아?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손에 꼽을 정도였어. 난 그때 네 손가락이 부러진 줄 알았다.”
“사람이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뭘 그리 따져. 우리 등심 먹을까?”
이창래가 슬그머니 말을 돌리자 김도환이 입술을 슬쩍 내밀었다.
뭔가 있다.
최근 들어 이 자식이 밥을 산 건 열 번도 넘었다.
이창래의 끗발은 신문 기자인 자신에 비한다면 비교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컸다.
유력 텔레비전 스포츠국의 부장이었고 인맥도 그보다 훨씬 넓기 때문에 예전에는 오히려 그가 여러 번 부탁을 했다.
그런 놈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고 그건 최강철에 관한 일일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비싼 소고기를 먹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아쉬운 놈이 우물을 파는 게 세상의 이치다.
놈의 태도를 보자 잔뜩 긴장한 게 조금 있다가 본론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창래는 저녁을 다 먹은 후에도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도환아, 우리 오랜만에 술이나 마시러 가자.”
“술 마셨잖아.”
“좋은 데 가서 마셔. 분 냄새 맡아본 지 오래됐잖아.”
“룸살롱 가자는 말이냐?”
“그래.”
“하아, 부담되네. 그냥 말하면 안 되겠냐?”
“이 자식아, 일단 가. 비싼 양주 먹여놓고 해야 내가 덜 쪽 팔릴 것 같으니까 내 사정 좀 봐줘.”
어쩔 수 없다.
이놈이 이렇게 나오는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조건 고다.
강남의 룸살롱 ‘비원’에 들어서자 탤런트 뺨치는 아가씨들이 교태를 부리며 그들을 맞아주었다.
미인에 비싼 양주가 곁들여지자 세상천지가 다 내 것 같았다.
실컷 마시고 즐겼다.
죽을 때 죽더라도 천국에 왔으니 이태백이 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치 공연장의 사회자처럼 설레발을 떨던 이창래의 표정이 슬그머니 변한 것은 12시가 다 되어 룸에서 아가씨들 내쫓은 다음이었다.
“도환아, 나 좀 살려주면 안 되겠냐?”
“내가 언제 널 죽인다고 했어? 이 자식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이번 경기 중계권 때문에 내가 미칠 지경이다. KBS 이 새끼들이 죽어도 양보를 못 하겠대.”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이번 중계권을 따낸 놈들이 NBC야. 그놈들하고 다리를 놔주라. 우리가 중계할 수 있도록.”
“내가 인마, 그런 빽이 어디 있어?”
“최강철. 돈 킹은 그놈 말이면 듣는다. 너하고 최강철은 특별한 관계잖아. 그러니 나 좀 살려줘.”
“이 미친놈이 염병하고 있네.”
* * *
로드워크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단순하게 똑같은 속도로 정해진 거리를 뛰는 것은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 불과하다.
복싱 선수의 로드워크는 기초적인 체력 강화 훈련이 끝나면 최강철이 늘 차고 다니는 것처럼 모래 각반으로 하체와 상체의 근육을 단련하는데 시작은 2㎏이 기본이었다.
일정한 경지에 올라서면 그다음부터는 점점 무게를 올리고 로드워크의 스피드도 변화를 준다.
예를 들면 전력으로 100m를 뛴 후, 100m는 정상적인 속도로 달리는 극한 반복 훈련이다.
이것을 바로 ‘Unlimited Run’이라고 부른다.
상상해 보라.
아무리 지독한 훈련을 겪은 선수라도 이런 훈련을 소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5㎏ 모래 각반을 양다리에 차고 10㎞를 매일같이 뛴다는 건 죽음과 같은 고통이 수반되기에 웬만한 선수들은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가끔가다 텔레비전에서 씨름 선수들이 타이어를 끌고 모래사장을 달리는 훈련 장면이 나오지만 그런 건 이 훈련 방법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라고 봐도 될 만큼 약했다.
그런 훈련을 최강철은 매일 새벽 반복했다.
근육이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으며 체력이 회복되자 일주일 전부터 그동안의 정상 훈련에서 벗어나 ‘Unlimited Run’을 뛰기 시작했다.
단내가 훅훅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참으며 최강철은 이를 악물고 전력으로 뛰기를 멈추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는 윤성호가 오히려 지칠 지경이었으니 얼마나 혹독한 훈련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 20일 후면 미국으로 떠난다.
그 전까지 완벽하게 체력을 끌어 올린 후 마무리 훈련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다른 시합과 달리 듀란전은 강한 스태미나를 구축해야 된다는 게 이성일의 주문이었고 그 역시 동의했다.
듀란의 펀치력은 정평이 나 있었다.
스쳐도 사망.
우습게 들릴지 모르나 듀란의 펀치에 쓰러진 선수들 상당수는 카운터가 끝날 때까지 캔버스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천부적인 반사 신경을 가졌음에도 최강철이 긴장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맷집을 믿었고 공격을 위해 펀치를 허용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듀란전은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나는 이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어떤 허점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윌프레드 베니테스.
현존하는 복서 중 재능 면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선수다.
챔피언이었던 그는 화려한 테크닉을 가진 도전자 레너드와의 경기에서 12라운드 KO패를 당했는데 그때까지 베니테스가 점수 면에서 이기고 있다가 뒤집혔다.
경기력에서는 레너드마저 압도할 정도로 뛰어났으나 그는 게으른 천재였다.
오죽하면 그의 코치를 맡고 있는 아버지가 눈물로 훈련하자며 애원했을까.
베니테스가 레너드에게 진 것은 절대적인 훈련량의 부족이었고 자만의 결과였다.
나는 루시퍼에게 받은 능력이 있었으나 그것이 인간의 범주 내에 있는 것이란 걸 이미 깨닫고 있었다.
세상은 넓었고 한계를 초월하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능력을 과신하거나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마크 브릴랜드의 무시무시한 스피드, 프레드 아두의 경이적인 연타 능력과 맷집만 봐도 알 수 있다.
만약 자신이 능력을 과신하고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들과의 경기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사각의 링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좋다.
야수가 되어 인간의 범주 경계선에서 노니는 강자들과의 전쟁을 원한다.
그것이 다시 인생을 살고 있는 나에게 유일한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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