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 * *
김철중과 그 일당들은 강의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 모였다.
오늘 강의는 10시부터 잡혀 있었지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들은 9시에 학교로 나와 경영대학 앞 벤치에 모여들었다.
잔뜩 흥분한 모습.
“철중아, 우리의 영웅께서 시합이 잡혔다. 봤냐?”
“당연히 봤지. 그 난리가 났는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난 오늘 아침 뉴스 보고 심장이 벌렁거려서 죽는 줄 알았다.”
“휴우, 상대가 듀란이야, 듀란. 전설의 돌주먹과 우리 선배님이 붙는다니 난 꿈을 꾸는 것 같다.”
김현영과 유상식이 번갈아가며 설레발을 떨었다.
그들은 뉴스를 보자마자 학교로 달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과는 다르게 김철중의 얼굴은 훨씬 더 심각해져 있었다.
“오늘 아침에 강철 선배님한테 전화했었다.”
“네가?”
“그래, 신문 보고 정말 놀랐거든. 시합이 잡혔으니까 이제 학교에 안 나오실 것 같아서 훈련 열심히 하라고 인사도 드릴 겸 전화했었던 거야. 그런데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학교에 나오겠다고 그러더라.”
“무슨 소리야? 시합이 잡힌 사람이 학교는 왜 나와?”
“그러니까 말이지. 그래서 내가 하도 어이없어서 물었어, 왜 학교에 나오냐고. 그랬더니 학생이 당연히 학교에 나오는 거 아니냐며 되묻더라.”
“아이고!”
김철중의 말에 세 놈의 입에서 동시에 곡소리가 나왔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믿겨지지도 않았기 때문인데 그들의 표정에는 김철중이 거짓말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믿을 걸 믿어야지.
통합 챔피언 타이틀 방어전.
그것도 듀란이란 불세출의 강력한 도전자와 시합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학교 수업을 받기 위해 학교에 온다는 건 때려죽어도 못 믿을 말이었다.
“야, 이 자식들아. 정말이라니까. 강의 시간 되면 분명히 나타날 거다. 강철 선배, 농담은 잘해도 거짓말은 안 하잖아.”
“혹시 또 휴학계 내러 나오는 건 아닐까?”
“수업 받으러 나온다고 했단 말이다. 왜 내 말을 못 믿어!”
“넌 그 말이 믿겨지긴 하니?”
“안 믿겨져.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해가 되기도 해. 6년이나 휴학했었잖아. 그런데 또 휴학을 하겠어. 너희들 기억나? 우리가 왜 학교에 다니는 거냐고 물었을 때 강철 선배가 한 말?”
“꿈이 있다고 했었지.”
“그래. 어떤 꿈인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어. 이렇게 성공한 사람도 아직 못다 한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 부러웠고 놀라웠다. 강철 선배는 학교를 반드시 졸업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수업을 계속 받으면 훈련은 어떻게 해?”
“나도 그게 걱정이다. 전 국민이 강철 선배의 시합이 결정된 것 때문에 난리가 아닌데 어쩔 생각인지 모르겠어.”
* * *
1학년에게 경영학 원론을 가르치는 서정설 교수가 학과장인 윤문호 교수를 찾아온 것은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는 회계학을 가르치는 민창석 교수와 함께 들어왔는데 언제나 윤문호 교수와 식사를 같이하는 사이였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본 윤문호 교수가 반갑게 맞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서정설 교수의 입이 급하게 열렸다.
“교수님, 차나 한잔하시고 가시죠.”
“점심 먹기 전에 무슨 차를 마셔요. 무슨 일 있습니까?”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뭐죠?”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을 걸 보며 윤문호 교수가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차를 마시자고 한 건 빈말이다.
우리나라 말은 행간의 의미에서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윤문호 교수는 차를 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앞에 앉는 두 사람을 향해 의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서정설 교수가 입맛을 다시며 슬그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교수님, 최강철이 수업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요?”
“교수님, 정말 아무렇지 않아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학생이 수업을 받는 게 뭐가 어때서요. 당연한 거잖아요.”
“그 친구 시합 잡힌 거 모르세요?”
윤문호 교수가 무슨 소린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서정설 교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오히려 윤문호 교수의 표정은 더 황당해 보였다.
“무슨 시합요?”
“지금까지 뭐 하셨어요. 신문도 안 보시고!”
“난 제주도 학술 발표회에 갔다가 오늘 아침에 공항에서 직접 학교로 나오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최강철 군 시합이 정말 잡혔단 말입니까. 듀란하고요?”
“그렇다니까요.”
“아이고! 신문, 신문 어디 있어. 민 조교, 거기 신문 좀 있으면 가져와 봐!”
윤문호 교수가 얼마나 놀랐는지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평소에는 큰소리 한번 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밖에 있던 대학원생이 총알같이 신문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1면에 큼지막하게 나온 최강철과 듀란의 사진. 그리고 거대한 전쟁이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읽으며 윤문호 교수의 입에서 연신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윤문호 교수의 모습을 보면서 서정설 교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교수님, 이제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셨죠?”
“아니, 이 친구, 시합이 잡혔는데 학교는 왜 나왔어. 서 교수님, 정말 이 친구 학교 나온 거 맞아요?”
“그렇다니까요.”
“혹시 왜 나왔느냐고 물어봤습니까?”
“예.”
“뭐라던가요?”
“출석 안 하면 학점 못 받을까 봐 나왔다고 하더군요.”
“허허…….”
서정설의 대답을 들은 윤문호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출석을 안 하면 당연히 학점을 받지 못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무슨…….
더 황당한 것은 서정설의 입에서 더 기가 막힌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 친구, 시험 볼 때까지 학교에 나오겠답니다. 이걸 어쩌면 좋겠습니까?”
“음…….”
시합을 앞둔 세계 챔피언이 훈련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해서 학교에 나오겠단다.
정말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서울대의 학칙이 엄격하고 수업에 출석하지 않은 학생에게는 학점을 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최강철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영웅이었다.
그런 영웅이 학교 출석 때문에 시합에 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최강철은 학과장인 윤문호 교수가 찾는다는 말을 듣고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세 명의 대학원생이 책을 잔뜩 펼쳐놓고 뭔가를 열심히 하다가 동시에 그를 쳐다봤다.
표정의 변화.
그들은 최강철의 모습을 확인하고 입을 떠억 벌렸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입을 열었다.
“교수님,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들어가 보세요. 저희들은 최강철 선배님의 절대적인 팬입니다. 이번 시합 꼭 이겨주십시오.”
“고맙습니다.”
빙긋 웃어주었다.
공붓벌레라고만 알려진 서울대 경영학 대학원생들조차 그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니 그게 너무나 고마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윤문호 교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를 향해 다가왔다.
“강철 군, 어서 오게.”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앉지.”
최강철을 소파에 앉게 한 윤문호 교수는 손수 직접 커피를 타 와 그의 앞에 내려놨다.
“마셔.”
“예, 교수님.”
“내가 커피는 잘 탄다네. 커피는 너무 달면 허당이야. 적당히 쓴맛이 나야 돼.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이건 너무 쓴데요.”
“예끼, 이 사람아.”
“하하… 그래도 맛있습니다.”
윤문호 교수가 눈을 부릅뜨자 최강철이 활짝 웃었다.
이런 사소한 농담을 받아줄 수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네와 나, 참 인연이 깊어. 그렇지 않나?”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상의하지 않았어?”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자네가 무슨 일이 있을 때 조언과 걱정을 같이 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일세. 그만큼 자네를 아끼고 있다는 뜻이야. 자네, 시합이 잡혔다면서?”
“예, 4개월 후에 싸우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런 친구가 수업을 계속 받다니, 어쩔 생각인가? 공부도 중요하지만 자네는 대한민국의 영웅일세. 영웅은 영웅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위안을 줘야 하는 존재가 바로 영웅이 해야 할 일이야. 그런 친구가 훈련은 안 하고 수업을 받다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교수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영웅은 아니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나를 걱정시키고 있잖아. 나는 자네가 이 시합에서 반드시 이겨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 중의 하나일세. 그러니 이제 학교에 나오지 마. 내가 무슨 수를 쓰든 자네 학점에 이상이 없도록 만들어놓을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그러니 내 말대로 하게. 자네는 아니라고 하지만 자네는 분명히 대한민국의 영웅일세. 서울대의 학칙이 아무리 엄격해도 영웅을 죽이는 행동은 하지 않아!”
“무리할 이유도 없고 무리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무리가 아니야. 체육 특기생들은 시합이 잡히면 시험을 보지 않아도 학점을 준다네. 비록 자네가 체육 특기생은 아니지만 국가의 위상을 충분히 높여준 사람이니 그에 못지않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단 말일세!”
* * *
스포츠데일리의 신치현은 대한일보의 복싱 담당 기자 조영국과 함께 술을 마시며 열변을 토해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스포츠서울이 먼저 터뜨리고 난 후 부랴부랴 후속 기사를 써서 내보냈지만 이미 항구에서 배는 멀리 멀리 떠난 후였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커다란 이슈는 최강철이었고 그에 관한 기사는 방귀만 뀌어도 뉴스거리가 될 정도였다.
특종을 또다시 스포츠서울에서 터뜨리자 사무실 분위기는 지옥과 다를 바 없이 처참하게 변했다.
국장은 사장에게 깨졌고 신치현은 국장에게 박살이 났다.
사무실에서 서류가 날아다녔고 고성이 터졌는데 거의 2시간 동안 선 채로 얻어터졌다.
최강철은 약속을 지켰다.
전화를 하면 잘 받아줬고 쫓아가서 인터뷰를 요청하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성실하게 응해줬기에 수시로 기사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특종은 스포츠서울 쪽으로 넘어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자도 사람인데 아무리 최강철이 이슈 메이커라 해도 맨날 붙어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번에도 김도환이겠지?”
“그럼 누구겠어. 그 인간이 스포츠서울에 있으니까 특종을 뽑아낸 거 아니겠냐.”
“알려준 걸까?”
“만날 때마다 아니라고 우겨. 지가 쫓아다니면서 얻은 거라잖아.”
“그걸 누가 믿어. 믿는 게 병신이지.”
“씨발, 우리 국장은 나가서 무조건 특종 잡아 오란다. 안 그러면 사무실도 나오지 말래. 언제까지 스포츠서울 따까리나 할 거냐는데 할 말이 없드만. 넌 안 그러디?”
“당연한 레퍼토리잖아.”
“너도 잠복 들어갈 거냐?”
“당분간은 그래야겠지. 어디서 훈련하는지, 훈련 스케줄은 어떤지 확인하려면 한동안 뛰어다녀야 되지 않겠어?”
“그놈 학교는 당연히 안 갈 거고. 훈련은 성호체육관에서 할까?”
“가만, 학교!”
“학교 왜? 아… 너 혹시……!”
“그래, 그거라도 일단 갈기자.”
신치현이 슬그머니 이를 악물면서 말을 꺼내자 조영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소린지 안다.
하지만 기사는 쓸 게 있고 안 쓸 게 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국민들의 관심이 온통 쏠려 있는 상태에서 부정적인 기사를 쓰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지랄하지 마. 그러다가 뒈져. 지금 그게 기사로 나갈 일이냐. 그건 자살골이야.”
“일단 확인만 하면 된다. 누가 부정적인 기사를 쓴다고 했어? 사실을 쓰는 거지. ‘최강철, 시합을 위해 학교 수업까지 중단하고 투혼을 불사르다’. 뭐, 이런 정도의 기사만 나가도 국장이 황송한 표정을 짓지 않겠어. 평가는 나중에 이루어지겠지만.”
“너 최강철한테 악감정 갖지 마라. 사람은 말이다, 저한테 잘해준 놈한테 어쩔 수 없이 팔이 굽는 거야. 우리가 김도환처럼 했으면 그놈도 우릴 그렇게 대했을 거 아니냐.”
“악감정은 니미. 야, 내가 없는 기사 쓰겠다는 거야? 학생 놈이 공부는 안 하고 훈련만 좆 나게 열심히 한다는 걸 쓰는 거잖아. 그것도 아주 예쁘게 포장해서.”
“네 맘대로 해라. 대신 나는 끌어들이지 마. 아무리 그래도 그 자식은 우리나라의 영웅이야. 그런 놈을 엿 먹이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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