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26화 (126/308)

[126]

* * *

저희들끼리 재밌게 놀 것이지 갑자기 쫓아온 놈들이 무조건 끌어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무대로 나갔다.

춤은 춰본 적도 없고 특별히 배운 적도 없다.

더군다나 나이트클럽은 처음이라 지금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후배들과 여대생들에 둘러싸여 어쩔 수 없이 몸을 흔들어댔다.

이런 장소, 이런 분위기에서 멀대처럼 멍청하게 서 있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기 때문이었다.

복싱에는 스텝이라는 것이 있다.

상대와 나, 적의 공격을 리드미컬하게 피하기 위해서는 몸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복싱 선수가 마치 춤추는 것처럼 움직일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춤을 배워본 적은 없었으나 복싱 스텝을 변형시키며 후배들이 상체를 흔드는 걸 따라 했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다. 지금까지 사각의 링에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이를 악물며 살아왔기에 더욱더 쉽게 빠져들 수 있었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젊은이들이 나이트클럽을 찾는 모양이다.

소리를 지르며 마음껏 젊음을 발산하는 청춘들의 얼굴에서 억눌려 있던 자유의 해방이 느껴졌다.

최강철이 포위된 상태에서 몸을 흔들자 여대생들이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들은 슈퍼스타 최강철이 춤을 추는 모습에 열광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깡총거리며 뛰는 모습이 유명한 댄스 가수가 공연하는 모습을 보는 소녀 팬을 연상시켰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슬그머니 무대를 빠져나와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사라질 시간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모자를 쓰고 안경까지 착용해서 신분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오래 있는 건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계산을 하고 바깥으로 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기다렸다.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찜찜했지만 그들은 이해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로 금방 깨지고 말았다.

“도망가는 거예요?”

“도망은 무슨… 자러가는 거지. 난 일찍 잠자는 버릇이 있거든.”

“변명이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런가. 그런데 왜 나왔어. 더 놀지 않고.”

“오빠만 어색한 자리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정말 너무해요. 신입생들하고 지금 이 시간까지 있었던 게 누구 때문인데 혼자 도망가는 거예요!”

“미안, 그 생각을 못 했네.”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저를 이곳에 나오게 만든 건 오빠였으니까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도대체 남자가 왜 그래요!”

성은정이 똑바로 바라보며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그녀는 최강철이 자신을 팽개치고 도망가려 한 것에 대해 상당히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숨이 흘러나왔으나 어쩔 수 없다.

파트너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는 그녀의 말이 가슴을 찔러 다가오는 택시에 올라타지 못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럼 어쩌지?”

“맥주 한잔 더 해요.”

“11시가 넘었는데 무슨 술을 또 마셔.”

“가요. 도망가려고 한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막무가내였다.

무조건 끌고 가는 그녀로 인해 최강철은 근처의 호프집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맥주가 나오자 단숨에 벌컥벌컥 마셨는데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난 허리케인이 이렇게 무책임하고 겁쟁인지 오늘 처음 알았어요.”

“휴우… 천천히 마셔라.”

“내버려 둬요. 나 화났으니까.”

“미안하다고 했잖아. 깜박하고 네 생각을 못 한 것뿐이야.”

“그랬을 거예요. 따라 나오지 않았다면 난 그냥 바보가 되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겠죠. 말해봐요. 왜 그랬어요?”

“음, 할 말이 없다.”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었어요. 도망갈 만큼?”

“그런 건 아냐.”

“그럼 뭐예요?”

“난 여자 친구 있다고 말했잖아. 그리고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걱정돼서 그만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미팅도 나온 남자가 그걸 변명이라고 해요? 더구나 오빠는 스스로 나쁜 남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난 오빠가 마음에 들어요.”

도발적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입에서 기어코 나오지 않아야 될 말이 나왔다.

어이가 없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여대생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성은정은 거침없이 자신을 바라보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도대체 얘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가 좋아하던 스타에 대한 동경일까, 아니면 친구들에게 떠벌여야 할 자랑거리를 만들고 싶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자신을 좋아해서?

“난 여자 친구 있다고 했잖아.”

“물어보지 않아서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도 남자 친구 있어요. 그럼 나같이 예쁜 여자가 남자 친구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미팅을 나와서 당연히 없다고 생각했지.”

“오빠도 여자 친구 있다고 했잖아요. 설마 오빠는 되고 나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그렇구나.

전생의 그는 참 바보같이 산 게 분명했다. 고리타분하고 세상 물정도 모른 채 여자는 당연히 결혼할 때까지 정절을 지키는 거라 생각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첫날밤을 지낸 후 깨끗한 시트를 보며 여자는 처녀막이 찢어지면 피가 나오는 거 아니냐고 아내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아내는 우물쭈물하며 그렇지 않은 여자도 많다는 말로 그의 질문의 피했다.

순진하게 그 말을 믿었다.

자연적으로 처녀막이 찢어지는 경우도 많다면서 의심하는 거냐는 아내의 눈초리를 견뎌내지 못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한 자신은 한심했던 존재가 분명했다.

웃음이 나왔다.

고등학교 시절 태릉선수촌에서 만난 이문영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칼같이 끊어버린 것은 여자에 대한 거부감과 복싱으로 성공해야 된다는 압박감, 아직 어리고 순진한 그녀에 대한 마지막 양심 같은 것 때문이었다.

다시는 여자를 동반자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니 그녀의 호감을 받아들이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서지영과 사귀기 시작한 것은 낯선 타국 땅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찾아온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문영과 다르게 성인이었고 자신으로 인해 상처를 입는다 해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에 그동안의 다짐을 깨뜨렸다.

그럼에도 거리를 두며 그녀를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사랑을 원했으나 아직 그는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잔인하고, 어쩌면 이기적인 행동들이었지만 그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할리우드 스타 아그네스와의 섹스를 거부한 것은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려 오점이 남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지 그녀와의 섹스가 두려웠기 때문은 아니다.

세상에는 가장 즐거운 것이 3개가 있다고 한다.

일어서서 하는 건 골프고, 앉아서 하는 건 마작, 누워서 하는 건 바로 섹스다.

자신은 섹스에 미친 놈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섹스를 마다할 정도로 앞뒤가 꽉 막힌 놈은 더더욱 아니다.

남자 친구가 있다면서 자신이 마음에 든다는 말을 하는 이 여자는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섹스, 아니면 슈퍼스타와의 사랑, 그것도 아니면 엔조이?

그녀에게서 그 어떤 것이든 여자가 가지고 있는 두 얼굴을 확인하기엔 충분하다.

나쁜 남자. 그래, 지금의 나는 여자에게 있어 나쁜 남자가 분명하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성은정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사귀는 건 안 돼. 하지만 원한다면 오늘 같이 잘 수는 있어.”

* * *

“아버지, 저 왔어요.”

“그려, 일찍 왔구나.”

“준비 끝났으면 가요. 예약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해요.”

“강철아, 그거 정말 해야겄냐?”

“해야 합니다. 무조건 가셔야 돼요.”

최강철은 찜찜한 표정으로 서 있는 부모님을 재촉했다.

오늘은 서울대병원에 건강검진을 신청해 놨는데 오전 10시로 예약이 되어 있었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수차례에 걸쳐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며 이야기를 했으나 부모님은 한 번도 병원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최강철은 예약을 한 후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 병원에 가실 분들이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건강검진에 집착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30살이 되던 해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말기가 될 때까지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

참으로 미련한 분이다.

가슴이 찢어질 만큼 고통스러웠을 텐데 말기가 될 때까지 소화제를 드시며 병원을 찾지 않은 건 미련함보다 기나긴 세월 속에서 쌓여온 고집 때문이었을 것이다.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도착해서 건강검진이 진행되는 동안 최강철은 담당 의사를 만났다.

담당 의사는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최강철을 확인한 후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랐는데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허둥댔다.

“헉… 허리케인… 최강철 선수…….”

“선생님, 저의 부모님이 오늘 건강검진을 받으십니다.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 그래요. 부모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최강철이 두 사람의 이름을 말하자 의사가 예약자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슈퍼스타 최강철의 부모를 자신이 맡는다고 생각하자 그의 얼굴은 슬쩍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특히 저의 아버지를 잘 봐주세요. 위쪽에 암이 있는지 꼼꼼하게 봐주십시오.”

“무슨 증상이라도 있었습니까?”

“자꾸 헛구역질을 하십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쪽 담당 교수님께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직 아버지한테서 어떤 증상도 발생하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해서라도 현재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

증상이 발병하기에는 시간이 남았으나 운명은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자신이 다시 사는 것 또한 믿기지 않는 운명의 장난이었으니 아버지의 상태 또한 미리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5시간이나 걸쳐 검진을 받고 나온 부모님을 모시고 강남에 있는 고깃집으로 모시고 가 맛있는 저녁을 사드렸다.

검진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온다고 했으니 이제 기다릴 일만 남았다.

* * *

작은형이 제대를 해서 집으로 돌아온 것은 6개월 전이라고 했다.

지겨웠겠지.

군대라는 사회에서 자유를 구속당한 채 7년이란 시간을 버텼으니 작은형 성격으로 오래 버틴 것이다.

여자가 떠난 후 작은형은 한동안 방황하다가 결국 제대를 선택했다고 한다.

여자를 찾기 위해 탈영하지 않은 걸 보면 죽도록 사랑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배운 것이 없었고 특별한 기술조차 없는 사람이 제대해서 할 수 있는 건 막노동이 전부였다.

작은형은 벌써 32살이나 되었으니 기술을 배운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에서 노는 아들 때문에 아버지의 고민이 깊어지는 걸 보며 최강철은 귀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압구정동에 커다란 상가를 사들였다.

7층 건물이었는데 나중에 로데오 거리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인테리어 업자들에게 의뢰해서 150평이나 되는 1층을 고급스러운 커피숍으로 꾸몄고 바리스타 2명을 고용했다.

물론 상가는 자신의 명의로 했다.

투자의 목적보다 노름을 좋아하는 작은형이 사고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커피숍이 오픈하는 날, 작은형을 데리고 압구정으로 향한 것은 복학한 지 정확하게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강철아, 어디 가는 거냐?”

“형. 취직시켜 주려고.”

“취직?”

“그래, 취직. 맨날 집에서 놀 수는 없잖아. 돈을 벌어서 결혼도 하고 조카도 낳아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아이고, 우리 잘난 동생. 형을 위해서 그런 생각까지 다 하고 기특하네. 그런데 뭐 하는 데냐? 월급은 많아?”

착하기만 했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더군다나 성격이 단순해서 남한테 쉽게 속는 타입이라 노름 빚 때문에 아버지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그를 향해 웃어주었다.

남들은 경멸하고 무시했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자신을 좋아하고 아끼는 형이었다.

상가에 도착해서 커피숍으로 들어가자 오픈 준비를 전부 마친 채 매니저와 바리스타, 종업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철아, 여긴 왜 왔어?”

“여기가 형이 근무할 곳이야. 지금부터 형이 할 일을 가르쳐 줄 테니까 열심히 해야 돼.”

“와우!”

최강덕이 번쩍번쩍한 커피숍을 둘러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처럼 고급스럽고 거대한 커피숍은 처음 봤기 때문인데 여기서 근무한다는 말을 듣자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형은 여기서 카운터를 보는 거야. 손님들이 나갈 때 돈을 받는 게 형의 일이야…….”

최강철은 차근차근 해야 할 일들에 설명해 주었다.

돈을 받는 방법, 직원들을 관리하는 것과 커피숍 운영에 관한 것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고, 알아듣지 못하면 자신이 직접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당장은 잘하지 못해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좋아질 거야. 형은 이곳의 총지배인이자 실질적인 책임자라는 거 잊지 마.”

“여기 사장은 누군데 이렇게 막중한 자리를 나한테 주냐? 너하고 친한 사람이야?”

“나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사장이라고.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형을 총지배인 자리에 앉히지. 내가 아니면 누가 형 같은 사람을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앉히겠어.”

“아이고.”

“내가 형을 이곳에 취직시키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야. 아버지가 형 때문에 엄청 힘들어하시는 걸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미안하다.”

“형이 이곳에서 일하면서 지켜야 할 게 있어. 만약 그것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가차 없이 형을 자를 거니까 명심해.”

“그게 뭐지?”

“첫째, 노름하지 마. 만약 12시 전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노름한 것으로 간주할 거야. 둘째, 돈 욕심 부려 삥땅 칠 생각 하지 마. 물론 저기 있는 매니저가 수시로 체크하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 하겠지만 만약 하다가 걸리면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알아서 해. 마지막으로 직원들하고 불화를 일으키지 마. 형은 총지배인이니까 직원들을 잘 관리해서 가게가 번창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돼.”

“걱정 마라. 내가 잘할게.”

“이 세 가지만 잘 지키면 나는 형한테 200만 원씩 월급을 줄 거야. 물론 회사원들처럼 보너스도 있고 월급도 매년 인상되겠지. 더불어 나는 형이 성실하게 이 가게를 운영한다면 20년 후 이 상가를 통째로 넘겨줄 생각이야.”

“정말… 정말이냐?”

“하지만 꼭 기억해야 돼. 형이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 들지 않게 산다면 지금 한 약속들은 전부 없었던 게 될 거야. 그러니 형, 지금부터 열심히 살아줘. 부모님과 가족들한테 떳떳하게 고개 들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달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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