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 * *
다른 누구도 아닌 국민들의 선택이었다.
그것이 지역감정과 정치인들의 욕심으로 인해 잘못된 결과가 나왔다 해도 군부 정권이 연장된 것은 오롯이 국민들의 선택이었다.
누군가는 그 결과에 승복하지 못했으나 누군가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투표해서 뽑았으니 군부독재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동력은 상실되었고 연일 계속되던 데 모행렬은 1987년 그 뜨거웠던 가을을 끝으로 내리막을 걷더니 1988년을 거쳐 올해 들어서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대학가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운동권이 총학생회를 독점하던 시절은 가고 학교를 위해 일하겠다는 학생들이 총학생회를 점령했다.
변화다. 그리고 학생들이 캠퍼스로 다시 돌아와 학문과 인생을 탐구하기 시작했으니 대학가는 생생한 젊음으로 가득 찼다.
대학 신입생들에게 가장 큰 행사는 미팅이다.
학교가 연일 시위에 사로잡혔던 시절에도 미팅은 지속되었고 신입생들은 그 속에서 작은 위안들을 얻었다.
전쟁터에서도 사랑은 핀다.
데모 행렬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싸우다가도 미팅 시간이 되면 총알같이 자리를 벗어나 최루탄이 가득 묻은 몸으로 미팅 장소에 나갔다.
그건 여대생들도 비슷했기에 서로를 보며 웃었고 인생 한편의 아련한 추억이 되어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소중하게 묻을 수 있었다.
시위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후로는 한편의 미안함을 지니고 벌어졌던 미팅이 거리낌 없이 활성화 되었다.
지금 김철중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일당들과 함께 다가온 것도 드디어 첫 미팅을 나간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선배님, 가시죠.”
“으…….”
“얘들아, 선배님 모셔라.”
신음을 흘리는 최강철의 몸을 박정빈과 유상식이 다가와 끌어당겼다.
꼭 포로를 끌고 가는 모습과 비슷했다.
“놔라, 내 발로 가겠다.”
“중간에서 튀거나 버티는 상황이 발생하면 즉시 발포하겠습니다. 선배님, 오늘만큼은 절대 그런 사태가 발생되지 않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았다, 이 자식들아.”
이젠 할 수 없다.
미리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원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피하는 순간 비겁자로 몰리기 때문에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불편함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놈들, 이제 보니 상당히 영악하다.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인 종로로 향하는 동안 김철중을 비롯해서 나머지 놈들은 사전 작전을 짜기 시작했는데 아주 지능적이었다.
“그러니까 한 명한테 몰아준다, 이거지?”
“바로 그거야. 어차피 우리끼리 싸워봤자 상식이 좋은 일만 만들어주는 거잖아. 상식이 저놈은 미팅이 아니라도 예쁜 여자를 사귈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게 안 되니까 같이 사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머리 좋기로 소문난 박정빈이 입술을 삐죽거리는 유상식의 표정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얼굴이 잘생긴 유상식은 이번 미팅에서 얼굴마담 역할만 하라는 것이다.
그들의 작전은 간단했다.
파트너를 선택할 때 우선권을 가진 놈이 가장 예쁜 여학생이 잡은 물건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었다.
“결정 방법은?”
“단순하게 가위바위보로 가자. 1등이 오늘, 그다음이 다음 미팅을 기약하는 거로 하지. 오케이?”
“좋아, 콜.”
네 놈이 떠들다가 긴장된 표정으로 순서를 정하는 걸 보면서 최강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이것들 봐라. 서울대에 다니면서 얼굴도 그럴듯한 놈들이 이런 작전까지 펼쳤으니 예쁜 여자들이 안 넘어갈 리가 있나.
그가 다른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면 저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질 만행이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입맛만 다시며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녀 간의 인연은 이런 사소한 행동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종로, 보신각에서 조금 우측으로 꺾어서 들어가면 젊음의 거리가 나온다.
저녁이 되면 대학생들로 바글거리는데 이곳에서 대부분의 미팅이 성사되어 커피숍이나 호프집은 젊은 남녀들로 빽빽하게 들어찼다.
“선배님, 이쪽으로 오시죠.”
“네가 웨이터냐. 그 손 안 치워.”
마치 경로석에 모시는 것처럼 유상식이 최강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 겨우 26살밖에 안 된 그를 이놈들은 노인네 취급하고 있었다.
그들이 미팅 장소로 정한 곳은 젊음의 거리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는 ‘비틀즈’란 커피숍이었다.
이곳 주인은 비틀즈를 무척이나 좋아한 모양이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그렇게 떠들던 놈들이 긴장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첫 미팅. 묘령의 여인들을 기다리는 순진한 청춘들.
어찌 긴장되지 않겠나. 대화를 중단하고 열심히 문을 바라보는 놈들의 시선은 온통 긴장감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5명의 여대생이 들어서자 김철중의 눈이 번뜩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깁니다!”
이놈들 오늘 횡재했다.
무용과 학생들이라고 하더니 전부 몸매가 장난이 아니었고 얼굴도 상당한 수준을 가진 여대생들이 김철중의 손짓에 따라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런.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무리 중에서도 독보적인 미모를 지닌 여자가 바로 자신의 상대라는 것을.
다르다. 신입생들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고 옷을 입은 맵시도 훨씬 세련되었다.
공주들을 맞이하는 것처럼 황송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도록 한 김철중이 일어난 상태 그대로 주절거리며 입을 열었다.
“오시느라고 고생했죠. 길은 막히지 않던가요?”
“괜찮았어요.”
자연스럽게 김철중과 맞은편에 앉았던 단발머리 여학생이 방긋 웃으며 대답을 했다.
눈치를 보니 그녀가 그쪽의 주선자였던 모양이다.
여학생들은 미리 최강철의 존재를 확인했기 때문인지 들어오면서부터 그를 주목하고 있었는데 막상 눈이 부딪치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미팅의 패턴은 똑같다.
일단 남자 측과 여자 측이 주선자의 간단한 소개로 인사를 하고 커피를 시킨 후, 잠시 학교 이야기와 최근에 유행하는 노래와 영화 등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파트너를 정하는 순서로 넘어간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대부분의 화제가 최강철로 집중되고 있었다.
그녀들은 돌아가면서 최강철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는데 호기심을 숨기지 못했다.
“오늘은 이쯤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해요. 여러분들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린 여기 청춘들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호호… 그러니까 누가 허리케인을 모시고 나오라 그랬나요.”
대충 끝내고 미팅을 진행하려고 하자 여학생들이 반기를 들었다.
그녀들은 최강철에 대한 궁금증을 이쯤에서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그녀들을 바라보며 최강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우린 저쪽에 가서 우리끼리 이야기할 테니 파트너 결정하고 이야기 나누다가 2차에서 다시 보죠. 그래도 되겠어요?”
슬쩍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앞에 앉아 있던 성은정에게 동의를 구했다.
자신의 파트너로 나온 그녀는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무척 침착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우리 때문에 신입생들이 미팅을 망치면 안 되니까요.”
그녀가 따라서 몸을 일으키자 여대생들이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금방 잦아들었고 그녀들의 시선은 앞에 있는 김철중과 떨거지들에게 돌아갔다.
최강철의 존재로 인해 잠시 미팅의 본분에 대해 잊었지만 금방 본래의 목적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성은정 씨라고 했죠?”
“네.”
“4학년이 신입생들 미팅에 나온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후배들이 장난치는 줄 알았어요.”
성은정이 그의 말을 듣고 밝게 웃었다.
그녀 스스로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 쉽게 대답하기 곤란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이 상황이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저기 주선자가 1학년 과대표예요. 쟤가 오빠 이야기를 4학년 과대표한테 말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대요. 그 소리를 듣고 4학년들이 전부 난리가 났어요. 서로 나가겠다고 손을 드는 바람에 우리 과대표가 엄청 곤란해졌을 정도였어요. 재밌죠?”
“내가 그렇게 인기 있다니 놀랍네요.”
“당연하잖아요. 오빠는 한국 사람들한테 영웅이거든요.”
“휴우, 그래도…….”
“결국 과대표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다가 저를 선택했어요.”
“은정 씨를요? 왜죠?”
“제가 나가서 이대 무용과의 명예를 지키고 오랬어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허리케인한테 꿇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저밖에 없다고 말하던데요.”
어쩐지 눈부시도록 예쁘다고 했다.
결국 성은정의 말은 이대 무용학과의 과대표가 제일 아름아운 퀸카를 선발해서 내보냈다는 뜻이다.
“그럼 강요에 의해서 나온 거군요.”
“어머, 아니에요. 저도 그 소리를 듣고 손을 번쩍 들었는걸요.”
“정말입니까?”
“오래전부터 오빠를 만나보고 싶었어요. 제 방에 가면 오빠 브로마이드가 잔뜩 붙어 있을 정도로 오빠를 좋아했어요.”
“은정 씨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왜 저 같은 사람을 좋아했죠?”
“특별했으니까요. 오빠의 복싱은 사람을 흥분시키는 무언가가 있어요. 더군다나 잘생기셨잖아요.”
“그런 소린 처음 들어봅니다.”
“호호… 거짓말.”
성은정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는 최강철의 얼굴을 하나씩 뜯어보며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어렵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필수 코스로 통과해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미팅을 나왔는데 처음부터 강적을 만난 것 같았다.
신입생들 앞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던 그녀는 둘만 자리하자 꼬치꼬치 최강철에 관한 것들을 물어 오기 시작했다.
대답을 하면서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고 곤란한 질문에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혹시 사귀는 분 있어요?”
“있습니다.”
“정말이에요?”
“전 거짓말을 잘 못 해요. 지금 미국에 있어요.”
그녀는 실망하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남자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여자에게 솔직하다는 건 어쩌면 잔인한 짓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금방 숨기고 다음 질문들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왜 미팅을 나왔어요?”
“여긴 한국이잖아요. 그리고 난 대학교에 복학해서 이제 1학년이라고요. 당연히 미팅은 해봐야죠.”
“그 분한테 미안하지 않으세요?”
“미안해해야 되는 겁니까?”
“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는 기분 나쁠 것 같아요.”
“하하, 그러니까 모르게 하는 거죠.”
“오빠는 나쁜 남자네요.”
“좋은 남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녀를 배신하지 않을 거니까 꼭 나쁜 남자라고 보기는 어려운 거 아닌가요?”
뻔뻔한 대답에 성은정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올랐다.
어쩌면 맞는 대답인 것 같다.
머나먼 미국에 있는 여자 친구 때문에 젊은 남자에게 정절을 지키라고 강요한다는 게 얼마나 고리타분한 생각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최강철은 그저 미팅에 참석했을 뿐이다.
본격적으로 미팅의 진수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2차로 호프집에 몰려갔을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대하던 여대생들은 술이 들어가자 갖은 애교를 부리면서 친근감을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감당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문제는 9시가 훌쩍 넘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시계를 볼 때 발생했다.
“우리 나이트클럽 가요.”
“뭐라고?”
“오라버니, 미팅의 꽃은 나이트클럽이라고요. 우리 거기 가서 재밌게 놀아요.”
환장하겠네.
여대생들은 물론이고 김철중을 비롯한 후배 놈들마저 간절한 눈을 한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무작정 튀고 싶었지만 선배로서의 체면상 그건 절대 해선 안 되는 짓이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열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놈들을 향해 호쾌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 가자. 오늘은 내가 풀로 쏠 테니까 실컷 놀아봐. 얼마나 잘 노는지 내가 지켜볼 테니까 대충 놀면 혼날 줄 알아.”
“우와, 만세!”
일행이 몰려간 곳은 이태원의 캐피탈호텔 나이트클럽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음악이 좋고 분위기가 좋았다.
신입생들이라 그런지 나이트클럽에 도착하자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하는 게 꼭 눈 오는 날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자마자 후배 놈들은 여대생들과 함께 무대로 뛰어나갔다.
춤추는 무대에는 수많은 젊은이가 흥겨운 팝송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는데 마치 수초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오빠, 나이트클럽 와봤어요?”
“아니.”
성은정의 숨결이 훅, 하고 다가오자 움찔하며 겨우 대답했다.
그녀는 음악 소리 때문에 대화가 힘들자 바짝 다가와 귀에 대고 이야기를 했는데 얼마나 가깝게 다가왔는지 볼과 입술이 맞닿을 정도였다.
“지금까지 뭐 했어요. 이런 데도 안 와보고!”
“미국에서 열심히 복싱했지. 그런데 정신없네. 음악 소리가 너무 커.”
“쟤들 정말 열심히 노네요. 아휴, 나도 저렇게 좋을 때가 있었는데.”
“마치 노인네처럼 말하네. 은정이도 아직 한참 좋을 때야. 이제 겨우 대학 4학년이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해?”
“이제 조금 있으면 졸업이잖아요. 그러니까 좋은 시절 다 지나간 거 맞아요.”
“조금 떨어지면 안 돼. 너무 가까이서 말하니까 내가 힘들어.”
“왜 힘들어요. 내가 무서워요?”
술이 들어가서 그런 걸까.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랬던 것일까.
최강철이 상체를 옆으로 비키며 그녀의 입술과 간신히 떨어지자 성은정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무섭기는. 내가 사고 칠까 봐 그래. 자꾸 입술을 가져다대면 참기 힘들잖아. 은정이는 내가 남자로 안 보여?”
“사고 쳐봐요.”
성은정이 빤히 바라보며 도발적인 시선을 던져 왔다.
정말 못 말리는 아가씨다. 사고를 쳐보라며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엔 은은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진짜 사고는 그다음부터 벌어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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