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23화 (123/308)

[123] 제17장 캠퍼스

가방을 든 채 버스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었다.

미국에서 타고 다니던 벤츠는 잊어버린 지 오래다. 한국에 돌아온 후 승용차를 살까도 생각해 봤지만 결국 고개를 흔들어 버렸다.

자신이 비록 일반 학생들과 다른 위치에 있으나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위화감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한국 사회는 부자들이나 겨우 승용차를 타고 다닐 뿐 학생들에게는 꿈속의 꽃마차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6살이나 어린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받아야 할 입장이었으니 약간의 불편함이 있더라도 참아낼 필요성이 있었다.

캠퍼스로 들어서자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계절의 변화로 인해 날아온 것이 아니라 캠퍼스를 가득 채운 젊은이들로부터 뿜어져 나온 열기였다.

살아서 움직인다.

친구들과 걸어가는 학생들의 몸에서,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대생의 모습에서, 족구를 하며 소리치는 남자들의 몸에서 모두 젊음의 뜨거움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최강철은 한 달 동안 많은 기자와 방송국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들이 요청하면 언제든지 달려 나가 밥을 먹었고 술을 마셔주었다.

일부러 그랬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자신이 필요한 것을 요청하기 위해 그는 기자들에게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연락을 주십시오. 하지만 만약 여러분 중 누구라도 제가 학교에 있을 때 찾아온다면 저는 그분을 꼭 기억할 겁니다. 그러니 제 학교 생활은 절대 방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일종의 협박이다. 그리고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기자들은 그의 요구를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아쉬운 건 그들이었고 최강철이 원한 것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으니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 가지를 받으면 한 가지를 줘야 하는 게 인생의 이치이지 않겠는가.

서울대 학생들도 한국 국민들이었고 공부벌레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최강철을 알아봤다.

그가 캠퍼스를 가로지르며 길게 만들어진 중앙로를 따라 걸어갈 때 수많은 학생이 그를 알아보며 반가움을 나타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이 공항이나 다른 곳에 있던 사람들과 다르게 몰려와 사인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손을 들어 흔들거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행동만 한 후 그들은 자신이 갈 길로 걸어갔다.

같은 학생으로서 학교에서까지 괴롭히지 않겠다는 생각들을 가진 게 분명했다.

좋다. 이런 정도면 학교생활 하는 데 지장이 없을 것 같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첫 수업을 기다리고 있는 신입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어느새 친구를 사귀었는지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는데 최강철이 들어서자 일시에 대화를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정적은 잠시였을 뿐.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박수가 들불처럼 퍼져 나가며 강의실을 가득 찼다.

이거 왜 이래. 쪽 팔리게.

최강철이 잠시 서 있다가 박수를 치는 학생들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주고 비어 있는 자리를 차지했다.

그럼 그렇지. 예상했던 것처럼 아무도 말을 붙여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무려 6년이나 선배였고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든 복싱 영웅에게 처음부터 말을 붙여 온다면 간덩이가 잔뜩 부은 놈일 것이다.

지금 그와 같은 학번은 군대를 다녀와 4학년에 재학 중이거나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어야 정상이었으니 신입생들에게 최강철은 하나님과 동기 동창 정도 될 만큼 까마득한 선배다.

개학 후 첫 수업은 거의 대부분의 교수들이 강의 계획 정도만 알려주고 수업을 끝내기 때문에 시간이 남아돈다.

교수들은 강의에 들어와 최강철을 눈으로 찾았으나 일부러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채 고리타분한 학문의 탐구 자세를 주제로 신입생들을 협박하다가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후우, 교수들의 태도를 보니 땡땡이는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다.

교수들은 제일 먼저 그가 강의실에 들어온 것부터 확인했으니 대타를 친다는 건 무덤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최강철은 강의실에서 빠져나와 벤치에 앉았다.

다른 신입생들은 삼삼오오 몰려나와 담배를 피우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지만 최강철은 그들에게서 떨어져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예상은 했으나 적응이 쉽지가 않을 것 같다.

자신이 이곳까지 오기에는 많은 고민과 결심이 필요했지만 막상 현실과 부딪치자 암담함이 몰려왔다.

처음 서울대에 진학할 때와는 너무 많은 변화가 발생했다.

예전 그가 서울대를 선택한 이유는 전생의 삶과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경영학을 공부해서 사업으로 크게 성공해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 그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복싱으로 세계 챔피언에 올랐고 향후 세계를 주물러 나갈 기업들을 손아귀에 움켜쥐었을 뿐만 아니라 보유한 현금만 해도 5,000만 달러에 달했다.

더군다나 미래를 알고 있는 이상 앞으로도 그 돈들은 끊임없이 불어나게 될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억은 현실의 지식보다 훨씬 무서운 위력을 발휘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지금 공부에 대한 집착은 이미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복학한 이유는 오직 단 하나.

토대의 마련이었다.

썩을 대로 썩은 한국 사회와 그렇게 만든 인간들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강력한 무기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 * *

“저기, 선배님. 커피 드시겠습니까?”

“어, 고마워.”

김철중이다. 이번 신입생들의 과 대표로 선출되었는데 처음부터 리더십을 발휘하며 주임 교수로부터 신뢰를 받은 특별한 놈이었다.

“잠시 앉아도 될까요?”

“그래라.”

“애들이 선배님을 무척 어려워합니다. 느끼셨죠?”

“그렇더구만. 야, 니들도 이리 와. 거기서 눈치 보고 있으면 내가 부담스럽다. 사내놈들이 왜 그러냐. 안 잡아먹어, 이 자식들아.”

최강철이 손짓하자 김철중과 같이 있던 놈들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놈들이 앞으로 튀어와 부동자세를 했을 때 최강철의 얼굴에서 웃음이 번졌다.

“이름!”

총알 같은 대답.

왼쪽에 안경을 쓴 놈은 박정빈이고, 가운데 덩치는 김현영, 오른쪽에 잘생긴 건 유상식이었다.

“야, 여기가 군대냐. 뻣뻣하게 굴지 말고 앉아. 우리 인사나 하고 지내자. 괜찮지?”

“감사합니다.”

이건 뭐, 완전히 이등병들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총알같이 자리를 차지하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하나님의 전언을 듣기 위해 집중하는 것처럼 최강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굳이 내 소개는 안 해도 되지?”

“한국에서 선배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앞으로 잘 지내자. 니들한테 부담되지 않도록 알아서 쥐 죽은 듯이 행동할 테니까 뭐 할 때 따돌리거나 그러지 마. 늦게 학교에 들어왔더니 외롭다. 니들이 나 좀 잘 챙겨주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충복이 되어 선배님을 모시겠습니다.”

“하아, 이 자식들아. 내가 같이 놀아달라고 그랬지 언제 모셔달라고 했어. 그냥 편하게 지내잔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하여간, 너희들은 이제부터 쉬는 시간에는 무조건 나랑 같이 다니는 거야. 니들 밥값은 내가 전부 댈 테니까, 그냥 놀아만 줘.”

* * *

최강철은 시간표를 주욱 확인하고 경영학과 4학년의 강의실로 향했다.

어차피 치러야 할 통과의례라면 최대한 빨리 해치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신입생들과 다르다.

머리가 굵었기 때문인지 수업을 준비하는 태도가 묵직했고 강의실도 조용했다.

문을 열고 들어와 교단으로 올라서자 학생들의 시선이 동시에 몰려들며 웅성거림이 생겨났다.

의외의 출현에 놀란 얼굴들이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에 복학한 최강철입니다. 뭐, 대충 저에 대해서 아시겠지만 미국으로 넘어가 복싱을 하다 보니 뒤늦게 이번에 복학하게 되었습니다. 곧 수업이 시작될 테니 본론만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83학번입니다. 여기에 83학번 친구들이 계시면 손을 들어주십시오.”

말을 끝내고 학생들을 쳐다보자 거의 20여 명이 손을 드는 게 보였다.

예상과 비슷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빙그레 웃으며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른 수업을 받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저와 같은 학번 친구들과 상견례를 하고 싶어서 여기에 왔습니다. 이따 수업이 끝나고 6시에 학교 앞 ‘세상만사’에서 제가 저녁과 맥주를 살 테니 시간되시는 분들은 참석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최강철이 박력 있게 인사를 한 후 강의실을 나서자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올 지 알 수 없지만 괜찮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동기들이 졸업하기 전 친분을 쌓아놓겠다는 생각과 자신이 83학번이라는 사실을 4학년들한테 확실히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세상만사’는 서울대 앞에 있는 호프집 중에서 제일 큰 곳이라 단체석도 여러 개 있었다.

저녁 6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50여 명의 학생이 자리를 차지하고 술판을 벌이는 중이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선 후 시선을 똑바로 고정시킨 채 예약해 놓았던 자리를 향해 다가갔다.

최강철이 자리에 앉아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들어오면서 손을 흔들어 일행이란 걸 알렸기 때문에 앉아 있던 최강철은 일어나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6시가 되었을 때 참석한 인원은 정확하게 25명이었다.

역시 여자가 없다. 같은 학번이라도 군대에 가지 않는 여자들은 이미 졸업하고 없을 때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 와중에 홍일점이 하나 박혀 있는 게 눈으로 들어왔다.

쟨 뭐지?

궁금했으나 그것부터 물어보기에는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맥주와 안주들이 나왔고 참석한 놈들이 하나씩 자기소개를 해나갔다.

같이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동기라는 유대감은 금방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변하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왜 인원이 이것밖에 없어?”

최강철의 단순하고도 간단한 질문에 왁자지껄했던 금방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들의 눈은 전부 최강철을 향해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전부 입을 닫은 채 대답을 하지 않고 있을 때 그동안 맨 끝에서 조용하게 앉아 있던 홍일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제가 드리죠. 선배님, 저는 경영대학 학생장을 맡고 있는 정수연입니다. 오늘 세계적인 스타 최강철 선배님이 상견례 자리를 마련한다고 해서 주제넘게 따라 나왔습니다. 저도 선배님을 보고 싶었거든요.”

“그렇군. 그래, 보니까 어때?”

“화면에서 본 것보다 훨씬 멋지시네요.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으실 것 같아요.”

“빈말이지?”

“당연하죠. 이럴 때는 립 서비스를 해야 된다고 배웠어요. 교수님들은 경영의 기본이 립 서비스에서부터 시작한다고 가르쳐 주셨어요.”

“아이고, 이런…….”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정수연이 나서면서 풀어졌다.

그녀는 간단한 몇 마디로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만들어냈는데, 학생장답지 않게 유머 감각이 뛰어났다.

하지만 최강철의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자신의 질문에 굳어진 친구들의 모습에서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그는 웃음을 잠재우며 그녀를 향해 시선을 똑바로 던졌다.

“내 질문에 대답해 준다고 했는데… 들어볼까?”

“선배님들은 그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할 거예요. 그래서 주제넘게 제가 나섰으니까 이해해 주시기 바라요. 원래 83학번 선배님들은 140명이 입학했어요. 현재 4학년 재학생은 정확하게 31명이고 이미 졸업하신 분들이 60명쯤 돼요.”

“나머지는?”

“나머지 분들은 군대에 있거나 감옥에 계시죠. 퇴학을 당해서 학교를 나가신 분들도 5명이 계세요.”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만 앉아. 올려다보기 힘들어.”

그녀의 말을 들은 최강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구만.

자신의 간단한 질문에 83학번 친구들이 입을 닫아버린 이유를 알게 되자 눈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이미 졸업했다는 60명은 어떤 자들이 권력을 잡아도 상관없는 놈들이었을 것이고, 이곳에 있는 31명은 군대에 있느라 역사의 현장에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1987년의 뜨거움과 싸우다가 희생을 당했다는 뜻이었다.

참석한 놈들이 쉽게 입을 열지 못한 것은 부끄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분노가 모두 공존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강철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친구들이 맥주를 마시며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다들 분위기가 왜 그래. 너희들 잘못이 아니잖아. 사람은 모두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야. 어떤 놈은 부를 추구하고 어떤 놈은 명예를 추구하지. 그리고 어떤 놈은 사랑 때문에 목숨을 던지기도 해. 여기 이곳에, 너희들이 있는 건 누군가의 희생 때문이 아니라 원래부터 여기가 바로 너희 자리였기 때문이야.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시대는 변하고 삶의 가치는 오래된 여정을 걸어 간 후에야 진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거잖아. 군대에서 뺑이 치던 너희들이 미안해한다면 미국에서 복싱이나 하던 나는 죽어야 된다.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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