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김도환이 터뜨린 스포츠서울의 특종이 깔리자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시대의 풍운아, 허리케인. 전설의 돌주먹 듀란과 전쟁>
단독이다. 그리고 현재 벌어지는 진행 과정이 상세하게 담겨 있었기 때문에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흥분을 멈추지 못했다.
물론 시합이 확정되었다는 기사는 아니었으나 그 가능성이 충분했기에 한국 국민들은 기대를 숨기지 못한 채 전율에 사로잡혔다.
그 속에는 당연히 MBC 스포츠 국장 윤길현과 복싱 담당 부장인 이창래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종을 모두 읽은 윤길현이 한숨을 길게 뿜어냈다.
이번 건도 스포츠서울의 김도환이 터뜨렸다. 이 자식은 최강철에 관한 것이라면 어떤 놈보다도 빠르다.
“야, 이 부장. 너 김도환이 만나서 술 좀 마시라고 했잖아. 그 자식 한량이라서 술과 여자 좋아한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어?”
“쩝, 그랬죠.”
“그런데 이게 뭐냐. 맨날 신문한테 얻어터지고 뒷북이나 쳐대니 이게 무슨 꼴이야!”
“국장님, 그건 술과 여자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런 특종을 어떤 놈이 나눠주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이 자식아 어떡하든 뭘 주워 와야지. 실무 책임자란 놈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나올래?”
“이거 왜 이러세요? 그래도 그놈하고 친하게 지내는 바람에 저번 통합 타이틀전 때 발이라도 담근 겁니다. 김도환이 최강철을 움직여 주지 않았다면 우린 손가락만 빨 뻔했다는 거 벌써 잊으셨어요?”
“에잇, 정말 열받네. 야, 이 부장. 도대체 김도환 이 자식은 최강철과 어떤 사이냐? 어떤 사이길래 이런 기사를 매번 터뜨리는 거냐고!”
“10년 전에 최강철이 아마추어 데뷔할 때부터 따라다니며 고기 사줬답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때 이미 찜해놨다는 거죠. 최강철이 김도환을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라니까 말 다한 거 아니겠어요?”
“그럼 이번 기사도 최강철한테서 나왔겠구만.”
“그럴 겁니다.”
“그럼 신빙성이 엄청 높다는 뜻이잖아. 그렇지?”
“제가 봤을 때 거의 성사가 될 것 같아요. 지금까지 김도환이 터뜨린 것 중에서 맨땅을 때린 기사는 하나도 없었거든요.”
“듀란과의 전쟁이라…….”
윤길현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대박이다.
정말 허리케인과 듀란의 대결이 성사된다면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전부 뒤집어질 일이었다.
“이 부장, 네 생각은 어때?”
“무조건 잡아야죠. 이건 잡으면 엄청난 돈이 될 겁니다. 더군다나 복싱은 항상 우리가 최고였습니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반드시 붙잡아야 됩니다.”
“방법이 있을까. 저쪽도 가만있지 않을 텐데?”
“정답은 최강철입니다. 다음 주에 들어온다고 하니 어떡하든 도환이를 통해서 그놈을 때려잡겠습니다.”
“가능하겠어?”
“그럼 어쩝니까. 미국 방송국 놈들이 이젠 죽어도 동시 중계권은 주지 않겠다고 하잖아요. 이걸 못 잡으면 우린 죽습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냐?”
“할 수 있는 건 다 동원해 주십시오. 무제한 경비 사용은 물론이고 우리 방송국 소속 연예인들도 다 동원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놈 총각이잖습니까. 정 안 되면 제일 예쁜 여자 배우들 몇 명 정도 발가벗겨서 그놈 방에 들여보냅시다.”
“이 미친놈이…….”
* * *
한국 권투 협회 회장 최기광이 사무장 유광호를 호출한 것은 스포츠서울의 신문기사로 인해 전국이 난리가 난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최기광은 한국물산의 오너로서 작년에 회장이 된 사람이었다.
한국에서는 대기업의 오너들이 스포츠 협회의 회장 자리를 하나씩 꿰차는데, 그중에서 복싱은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자가 차지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복싱의 인기가 가장 뜨거웠기 때문에 권투 협회 회장은 방귀깨나 뀐다는 자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을 하는 자리였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어서 와요. 유 사무장도 이 기사 보셨죠?”
“예, 봤습니다.”
“지금 전국이 이 기사 때문에 난리가 아닌데 우린 뭘 해야 하는 겁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허리케인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바람에 우리가 영향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이 기사를 보니까 다음주 에 귀국한다는데 그럼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손 놓고 있을 거예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최기광의 시선을 마주한 유광호의 안색이 흐려졌다.
무슨 뜻인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는 4명의 챔피언이 있지만 그 모두를 합해도 최강철이 현재 누리는 인기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다.
그런 놈이 한국 권투 협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건 최기광 입장에서 봤을 때 환장할 일이었을 것이다.
협회에 소속되어 활동하지 않아도 좋다. 단지 협회에 이름만 올려놓기만 해도 각종 행사에 회장이 따라붙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길 테니 그걸 해결하라는 뜻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유광호는 속으로 한숨을 길게 흘려냈다.
회장이 차기 국회의원 선거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다.
그럼에도 유광호는 그를 향해 웃음을 보였다.
그가 오랫동안 사무장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건 윗대가리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재주가 특별했기 때문이다.
“회장님, 최강철은 미국 프로 복싱 협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한국에 들어오는 건 학업을 하기 위해서라는군요. 하지만 우리가 그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죠. 최강철을 위해 한국 권투 협회 차원에서 환영 행사를 열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는 그 친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습니다. 이중으로 등록된다 해서 문제될 건 없을 테니 부탁을 해보죠. 한국 권투 협회에 등록한다면 회장님이 활동하시는 데 훨씬 편해지지 않겠습니까?”
“내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요. 유 사무장은 역시 유능하군요. 그렇게 해보시요. 필요한 건 내가 전부 지원해 줄 테니까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 * *
서지영은 울었다.
최강철이 떠나는 전날 그녀는 마치 애인을 군대에 보내는 것처럼 구슬프게 울었다.
그녀의 눈물을 보면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운다. 간절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서.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인지 모른다.
부모님과 가족들을 제외하고 자신을 위해 이런 눈물을 흘려준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뜨거운 키스로 반드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일행이 챙긴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방학 때 다시 돌아올 것이기에 당장 필요한 것만 챙겼을 뿐이다.
일행이라 봐야 달랑 그와 이성일이 전부였다.
윤성호는 다른 날 황인혜와 같이 들어가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결혼을 약속했기 때문인지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럼블 측에서 보내온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공항으로 향했다.
이미 언론 쪽에서는 그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기자가 공항에서 진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최강철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과연 듀란과의 일전이 소문처럼 성사될 것이냐는 사실이었다.
최강철이 어디서 지내느냐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다.
환송 나온 기자들과 팬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오로지 그의 1차 방어전 상대가 누구냐는 것뿐이었다.
“허리케인, 돈 킹이 듀란과의 방어전에 대해 협상을 진행한다고 하던데요.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통합 챔피언에 오른 지 불과 3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차 방어전 상대로 너무 강한 적을 선택한 것 아닌가요?”
“언젠가 만날 상대라면 빨리 만나고 싶었습니다.”
“정말 기대되는데요. 시합 일정은 혹시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정확한 날짜는 협상을 통해 결정되겠지만 7월 말이나 8월 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커다란 경기를 앞두고 학교에 다닌 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시합에 방해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공항에 도착한 후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향후 일정을 확인 사살 해주었다.
이렇게 계속 공식화하는 이유는 듀란과의 경기를 반드시 성사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언론이 떠들고 복싱 팬들이 기정사실화하면 어떤 외부적인 요인들도 그들의 시합을 방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몰려든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후 출국 게이트로 들어가 비행기를 탔다.
서지영은 떠나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슬픔을 숨기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프다. 하지만 이런 아픔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상황은 한국 공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리 알려줬기 때문인지 김포공항은 개미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는데 최강철의 귀국을 환영하는 현수막까지 보였다.
최강철의 팬클럽인 허리케인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이었다.
한쪽에 몰려 있던 그들은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있었는데 최강철의 모습이 보이자 열광을 터뜨리며 그를 반겼다.
최강철이 입구 게이트를 빠져나와 제일 먼저 한 일은 부모님을 찾은 것이었다.
그의 위상이 변했다는 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권투 협회에서 부모님을 차로 모셔 와 가장 앞쪽에서 마중할 수 있도록 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 돌아왔습니다.”
“그려. 잘 왔다, 잘 왔어. 오느라 고생했지?”
“괜찮아요. 그런데 그 꽃다발은 뭐죠?”
“저 사람들이 너 주라고 준비했더라. 이 꽃 들고 저 양반이랑 사진 한번 찍게 해달라고 부탁하던데…….”
최우용이 눈으로 유광호와 같이 서 있던 최기광을 가리켰다.
멋들어지게 고급 양복을 입은 그의 얼굴은 기름기가 좔좔 흘렀고 유광호가 쩔쩔매는 걸 보니 금방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빙그레 웃어주었다.
사진 정도는 찍어준다. 유광호의 모습에서 그들의 정체를 짐작한 최강철은 꽃다발을 받아 든 후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돈 좀 뿌렸나 보다.
권투 협회장 최기광과 유광호가 최강철의 좌우에 서서 손을 들어 올리자 기자들이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댔다.
유광호가 슬쩍 입을 연 것은 사진을 모두 찍은 후였다.
“강철아, 미안하다. 이해해 줄 거지?”
“그럼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무장님 일인데요. 뭐 또 다른 거 있어요?”
“나중에…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자. 사실 너한테 부탁할 일이 몇 가지 있어.”
“그러세요.”
“인터뷰 시작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만 가볼란다. 나중에 연락하마.”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사무장님이 자꾸 뻣뻣하게 대하면 저까지 그렇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 인연이 어디 보통 인연입니까.”
“고맙다.”
등을 돌려 사라지는 유광호의 모습을 보면서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데리고 독일로 갔을 때 잔소리하던 그의 모습과 아시안게임 때 승리를 기뻐하며 펄쩍펄쩍 뛰던 그의 모습이 겹쳐지며 나타났다.
한번 맺은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나는 그런 인연을 언제나 신의로 지켜 나갈 것이고 작은 이익에 얽매여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본가로 돌아온 최강철은 며칠 지난 후부터 학교 다니면서 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기자가 매일처럼 그를 기다리며 부모님과 가족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학교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 가까운 곳에 숙소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서울대 주변에는 아파트가 거의 없어 사당동에 있는 제일아파트를 구입했다.
제일아파트는 지은 지 1년 반밖에 되지 않은 새 아파트였는데 10층짜리였고 25평이나 되어 이성일과 둘이 쓰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부모님과 막내 누나는 같이 살아도 된다며 그가 독립하는 것을 막았으나 최강철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정신없이 빠르게 시간이 지나갔다.
복학 수속을 마치고 나자 많은 사람이 그를 기다렸다.
유광호의 부탁으로 한국 권투 협회가 주관한 환영 행사에 두 차례나 갔다 왔고 김도환이 소개해 준 기자들과 식사를 했으며 방송 관계자들과도 만났다.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에 영향력이 커지면 우연으로 생기는 인연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인연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인연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은 독고다이로 살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런 인연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뒤늦게 한국으로 들어온 윤성호는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은 후 황인혜를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결혼 날짜는 5월로 정해졌는데 한국에서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재밌는 건 결혼까지 결심한 윤성호가 한국에서 체육관을 열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최강철이 훈련할 수 있도록 사당동에 5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들이고 내부 수리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보다. 그는 결혼을 한 후에도 황인혜와 떨어져 최강철과 함께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바보가 틀림없었다.
개학 날짜가 내일로 다가오자 가슴이 뛰었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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