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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환생-120화 (120/308)

[120]

최강철이 더 럼블의 돈 킹과 만난 것은 하버드에 다녀온 후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하나씩 정리를 해나간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해놓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공항에조차 나와 보지 않았던 돈 킹은 이제 최강철이 뜨자 사무실 밖에까지 뛰어나왔다.

“허리케인, 기다리고 있었네. 들어가세.”

그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자 번쩍번쩍한 실내 장식이 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사는구나.

더 럼블에는 몇 번 와봤지만 돈 킹의 사무실은 처음이었는데 그가 황제처럼 멋지게 사는 걸 보자 입술 끝이 움직였다.

부자들은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남을 움직여 돈을 번다고 했는데 돈 킹은 선수들의 피와 눈물로 이렇게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자 아름다운 금발의 미녀가 커피를 가져왔다.

“충분히 쉬었나. 몸은 좀 어때?”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열려고 하던 참이었네. 아름다운 미녀들과 가수들이 출연하는 대규모 파티야. 더 럼블이 복싱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프로모션이라는 걸 이 기회에 확실하게 알릴 생각이네. 그래서 기자들과 할리우드의 스타들을 대거 초청할 계획일세.”

“언제 말입니까?”

“한 달 후로 예정하고 있네. 이곳 뉴욕 컨버터호텔 파티 룸을 통째로 빌려서 할 생각이야.”

“그렇군요. 제가 참석해야 돈 킹 씨의 면이 서겠죠?”

“당연한 거 아닌가? 이 파티는 자네를 위한 건데 주인공이 참석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후후… 알겠습니다.”

최강철이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하자 돈 킹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선수들의 숫자는 거의 100여 명에 달했지만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놈이 바로 눈앞에 있는 최강철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담대할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여우처럼 비상하게 머리가 돌아갔고, 어떤 때는 노회한 정객과 마주한 것처럼 처신하기 어려웠다.

그랬기에 돈 킹은 최강철을 상대하면서 진심으로 대했다.

이런 자에게는 서투른 거짓과 위선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리케인, 이제 말해보지. 그래,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

“돈 킹,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돌아가서 학업을 시작할 계획이에요.”

“언제 말인가?”

“2월 초에 돌아갈 겁니다.”

“나는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겠구만. 자네는 세계 챔피언일세. 그런 자네가 갑자기 무슨 공부를 한다고 그러는 건가?”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다음 시합은 제 방학에 맞춰서 일정을 잡아주십시오. 앞으로 저는 1년에 2번씩 시합을 하겠습니다.”

“방학 때 미국으로 넘어올 거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걱정은 하지 마세요. 시합이 잡히면 한국에서 훈련할 테니까요.”

“자네가 그렇게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알았네, 그렇게 준비하지.”

“그리고 그건 알아보셨습니까?”

돈 킹이 어깨를 으쓱하며 특유의 제스처를 취하자 최강철이 슬며시 얼굴을 굳혔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요청했던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복싱을 시작하면서 언제나 꿈꾸었던 열망.

바로 판타스틱4와의 시합이다.

하지만 그건 그만의 바람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이 시점에서는 돈 킹의 바람이 더 클지도 몰랐다.

그들과 허리케인의 대결은 꿈의 대결이 될 것이고 천문학적인 돈벌이가 될 것이 분명했다.

“우리에게는 옵션이 두 가지가 있네. 판타스틱4 중에서 웰터급에 남아 있는 건 듀란뿐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레너드는 은퇴했고 헌즈와 헤글러는 슈퍼 웰터급과 미들급에서 뛰고 있네. 그렇기 때문에 듀란전이나 WBC 챔피언 허니건과의 통합 타이틀전에 총력을 기울일 생각일세.”

“어떤 게 더 가능성이 있습니까?”

“듀란전일세. 허니건은 5개월 후에 방어전이 이미 잡혀져 있어. 하지만 듀란은 지금 놀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해. 듀란은 자네의 타이틀을 욕심내고 있으니까 조건만 맞으면 싸우려고 덤벼들 걸세.”

“그럼 그렇게 추진해 주십시오.”

“허리케인, 그런데 말일세. 조금 늦추는 건 어떻겠나? 자네는 이제 통합 챔피언에 올랐으니 방어전을 한두 차례 치르고 싸우는 게 어때?”

“돈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자네는 매번 정곡을 찌르는구만.”

“맹수는 먹이를 잡을 때 싸운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일상에 불과할 뿐이지요. 맹수는 맹수와 싸워야 초원을 주름잡는 황제가 될 수 있습니다. 돈 킹, 나는 황제가 되고 싶을 뿐 초원의 변방에서 떠도는 하이에나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과연 허리케인이야. 자네 말을 들으니 내 심장까지 뜨거워지는군. 알겠네, 그렇게 준비하지.”

* * *

윤성호는 황인혜의 아파트에서 저녁을 먹고 9시가 넘어서 들어왔다.

서로를 탐했다.

시합 때문에 한동안 못봤기 때문에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뜨겁게 부딪쳤다.

황인혜는 뉴욕대를 나온 인텔리 중의 인텔리 여성이었지만 윤성호와 잠자리를 할 때면 누구보다 뜨거운 여자로 변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윤성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데이트할 때도 그랬고 섹스를 할 때도 욕망에 사로잡힌 모습이 아니었다.

윤성호의 입이 슬쩍 열린 것은 황인혜가 눈을 사르륵 감으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 때였다.

“인혜 씨, 난 한 달 후면 돌아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알아요.”

“난… 인혜 씨를 두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 이대로 떠나기에는…….”

이제 시간이 없었다.

지나온 6년 동안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였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얻고 싶은 여자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만남과 사랑이었다.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그와 다르게 황인혜는 엘리트의 산실이라는 뉴욕대까지 나온 재원이었다.

처음에는 워낙 차이 나는 환경으로 인해 올려다보지 못할 나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퉁명스럽게 대했고 티격태격 싸우기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쌓이면서 점점 그녀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다.

얼마나 떨렸던가.

자신의 몸을 그녀가 처음 받아들여 주었을 때의 그 순간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걸 확신했을 때 윤성호는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복싱했던 사람답게 단순하고 강렬한 프러포즈였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이유를 물었으나 그녀는 끝까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의 삶. 그녀는 지금처럼 살고 싶다며 끝내 그와의 결혼에 응하지 않았기에 윤성호의 가슴은 점점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기에 그의 고통은 점점 더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품속에 안긴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똑같은 이야기 반복하고 싶지 않아요. 강철이 방학 때면 돌아온다면서요. 우린 그때 보면 되잖아요.”

“나는 당신을 우리 부모님께 보여 드리고 싶어. 당신들의 며느리라고 보여주고 싶단 말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이 사람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결혼이란 약속 안에서 확인하고 싶어.”

“왜 자꾸 그래요. 싫다고 했잖아요!”

윤성호의 목소리가 올라가자 가만히 듣고 있던 황인혜의 몸이 가슴에서 빠져나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단호하다.

그녀는 타월로 자신의 몸을 감싸며 차가운 태도로 샤워를 하려는 듯 걸어 나갔다.

그때 어느새 몸을 일으킨 윤성호의 입에서 벼락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내가 키울게! 내가 키우면 되잖아! 내가 던킨의 아빠가 되어줄게. 자폐아가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 바보처럼 굴어. 그리고 난 당신이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거 아무런 상관 없어. 난 괜찮다고!”

“당신이 어떻게 그걸…….”

욕실을 향해 걸어가던 황인혜의 몸이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부르르 떨리는 그녀의 등.

충격을 받았는지 그녀의 등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일어선 윤성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그런 후 방문까지 걸어가 아직도 제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못하는 그녀의 등을 향해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일주일 후에 베아뜨리체에서 기다릴게. 이번에도 나는 반지와 꽃다발을 들고 갈 거야.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때… 나타나지 않거나 내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난 더 이상 인혜 씨 안 볼 생각이야. 너무 아파서 이젠 견딜 수가 없거든. 갈게. 잘 자.”

* * *

윤성호는 베아뜨리체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그들이 데이트할 때마다 항상 앉았던 창가의 구석자리였다.

세 번의 청혼을 했으나 매번 거절당했지만 그는 황인혜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랬기에 최근 최강철이 뉴욕의 탐정 사무소와 거래를 한다는 걸 알고 몰래 그곳을 찾아가 그녀에 대한 의뢰를 했다.

비용은 비쌌으나 불과 열흘 만에 그들은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아 왔다.

탐정 사무소에서 내민 보고서를 보면서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나왔다.

그녀에게는 10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었고 선천적인 자폐아로 지금 특수학교 기숙사에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고서에는 결혼한 지 3년 만에 남편과 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과 사고의 충격으로 인해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에게는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과거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던 이유를 알게 되자 망설임이 찾아왔다.

이미 결혼을 했었고 자폐아 아들을 둔 여자와의 결혼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사실을 만약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아시면 어떠실까.

하지만 그의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사랑은 그런 거다.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한 쾌락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황인혜는 그에게 그런 자격이 충분한 여자였다.

그녀의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고 그녀와 남은 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에게 남겼던 말처럼 그녀가 오지 않거나 오늘도 프러포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두말없이 일어나 떠날 생각이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그가 알았을 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될 것이다.

하나는 자신과 함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먼저 그를 떠나는 것이었다.

어쩌면 영악한 짓이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먼저 떠나겠다고 한 것은 어쩌면 그녀로부터의 이별 통보를 듣지 않고 싶어 했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약속했던 시간이 1시간이나 지났으나 윤성호는 자리에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면,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면 이 기다림에 담겨 있는 희망과 기대의 끈을 쉽게 놓고 싶지 않았다.

간절하게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담배를 끊은 지 3년이나 지났음에도 초조한 시간은 그에게 담배를 빨아들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만들어냈다.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눈이 돌아갔으나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칸막이로 가로막힌 출입구는 문이 열렸음에도 사람을 쉽게 보여주지 않아 윤성호를 긴장되게 만들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를 기다렸다.

그녀라는 확신. 비록 2시간이나 지났지만 그는 지금 들어온 사람이 그녀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이윽고 칸막이 사이로 그녀의 모습이 보였을 때 윤성호의 몸이 스르륵 자리에 주저앉았다.

또각또각.

다가오는 그녀의 구두 소리가 윤성호에게는 마치 천둥처럼 들렸다.

“당신은 여전히 바보군요. 2시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기다리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인혜 씨 예쁘다. 오늘따라 더…….”

“그 꽃 나 줄려고 가져온 거죠?”

“응.”

“주세요.”

앞자리에 앉은 황인혜가 손을 내밀어 꽃을 달라고 말했다.

윤성호의 손이 부들거리며 옆에 놓아두었던 꽃을 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원래 청혼할 때는 무릎을 꿇고 멋지게 하는 거예요. 하지만 내가 늦게 왔으니까 오늘은 봐줄게요. 너무 탓하지 마요.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먼 길을 가는데 이 정도 망설임은 봐줄 수 있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응, 으응.”

“그런데 반지는 어디 있어요. 그것도 주세요.”

“어… 어, 여기 있어.”

“반지가 당신을 닮았네요. 뭉툭하고 바보스럽게 보여요. 그런데 이상하게 나랑 어울리는 것 같아요. 나도… 당신을 오래 만나다 보니 그렇게 변했나 봐요. 이제 해봐요.”

“뭘?”

“프러포즈 해야죠. 그래야 대답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에요.”

그녀의 시선이 불타는 것 같았다.

열정이다. 그리고 사랑이 담겨 있는 시선이었다.

윤성호는 그녀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혜 씨 나와 결혼해 줘. 당신의 남은 인생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나와 결혼해 줄래?”

“좋아요. 할게요. 당신과… 함께할게요…….”

여자는 행복한 순간이 찾아오면 운다.

지금의 황인혜처럼.

울음 속에서 피어난 그녀의 웃음은 더없이 아름다워 베아뜨리체를 환하게 밝혀줄 만큼 눈부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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