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실수였어.”
“뭐가?”
“지영 씨에게 복학한다는 말 하지 못했던 거. 내가 바보라서 그래. 엄청 중요한 이야긴데 지영 씨만 만나면 눈이 멀어서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어.”
“나를… 만나면 눈이… 멀어?”
“지영 씨가 너무 예뻐서 지영 씨를 만나면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거든. 알다시피 나는 시합 때문에 훈련하느라 지영 씨 보기가 힘들잖아. 그래서 그런가 지영 씨를 보면 다른 게 생각이 나지 않아.”
“…그걸 변명이라고 해.”
서지영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지만 이미 기세가 꺾여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거짓말을 뻔히 알고도 속아준다.
더군다나 화를 내고 떠난 이후 최강철은 10일 동안 아무런 연락조차 하지 않고 그녀의 애를 태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가슴을 졸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가 아무런 연락이 없자 자신이 화낸 것에 대한 혼란이 찾아왔고 온통 그를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최강철의 말대로 사소한 일일 뿐인데 자신이 너무 격한 반응을 보인 것 같아 불안해졌다.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이것이 최강철이 생각해 낸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이른 바 밀당 전략.
비행기를 탈 때는 차가운 냉기가 폴폴 흘릴 정도로 쌀쌀맞던 서지영은 옆자리에 탄 최강철이 계속해서 말을 붙이며 자신의 실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변명치고는 너무 달콤했고 그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라지면서 마음의 평온함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학교가 방학하면 무조건 뉴욕으로 넘어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알았어. 그 이야기 그만해. 남자가 같은 말 계속하면 실없어 보여.”
“그런가?”
“그런데 그 버락 오바마라는 사람은 왜 만나려는 거야? 솔직히 말해봐. 내가 지금까지 봐온 강철 씨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그렇지?”
“아니야, 그 사람. 너무 괜찮은 것 같아서 친해지고 싶었을 뿐이야. 지영 씨도 만나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사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다.
오바마가 나중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란 사실을 알면 그녀는 아마 놀라 까무러칠 것이다.
최강철이 사람을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건 뉴욕에서 가장 커다란 사립 탐정 사무소를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사립 탐정 사무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었는데 ‘시크릿’은 소속된 인원만 해도 20명이 넘었다.
그렇기에 버락 오마바를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버드에 다닌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그들은 정확하게 버락 오바마의 집 주소와 로스쿨 일정까지 파악해서 가져왔던 것이다.
매사추세츠주 캐임브리지에 도착한 두 사람은 그날 곧바로 하버드를 찾아갔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하버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로스쿨 사무실로 찾아간 최강철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3명의 남녀가 대화를 나누다가 무슨 일이냐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저희들은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혹시 버락 오바마 씨가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무슨 일로 그를 찾으시죠?”
“그분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저는 최강철이란 사람입니다. 혹시 어디 계신지 아시면 연락을 해주겠습니까?”
“어… 최강철… 혹시 허리케인!”
처음에는 몰라 봤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중 한 명의 표정이 서서히 변하더니 말을 떠듬거리며 놀람에 찬 경악성을 터뜨렸다.
“맞습니다. 제 별명이 허리케인이죠.”
“어이구!”
앞에 있던 남자가 펄쩍 뛰자 뒤에 있던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입을 떠억 벌렸다.
허리케인은 현재 스포츠계에서 살아 있는 전설, 판타스틱4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빅 스타였다.
더군다나 맨 앞에 있던 제이콥은 최강철의 경기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광팬이었기에 정체가 확인되자 비명부터 질렀다.
“허리케인, 영광입니다. 당신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제이콥이 다짜고짜 다가와 최강철의 손을 잡아 왔다.
그의 행동은 죽었던 할아버지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처럼 반가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팬이라며 좋아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데 모른 체할 수 없어 그의 손을 잡고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제이콥은 자신이 하버드 로스쿨에서 공부하는 대학원생이라고 소개를 했는데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은 사무실의 직원들이었다.
“제이콥, 저는 오바마 씨를 보고 싶습니다. 그를 아시나요?”
“그럼요, 그 친구는 저와 가장 친한 친구 사이입니다. 지금 마지막 수업 중이니까 조금 후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10분 정도면 끝날 테니 앉아서 잠시 기다리시겠어요?”
“아, 그렇군요. 그럼 신세를 지겠습니다.”
제이콥은 유쾌한 사람이었다.
하버드 로스쿨 학생답지 않게 처음 본 사이임에도 격식을 차리지 않았는데 손수 차까지 내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떠들어댔다.
그는 허리케인을 만났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열심히 떠들던 제이콥이 시계를 보더니 총알같이 뛰어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흑인 청년과 함께 들어왔다.
최강철은 자신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사내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버락 오마바의 장년 모습은 수도 없이 봤지만 아직 결혼조차 하지 않은 청년의 모습을 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찐빵처럼 부풀어진 머리, 검었지만 탄력 넘치는 어린 얼굴. 그는 이제 자신보다 겨우 3살 많은 29살의 청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바마 씨.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허리케인, 나는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당신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는 게 더없이 영광스럽지만 도무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거든요.”
“하하, 그러실 겁니다. 내가 당신을 찾아온 이유는 당신이 쓴 자서전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이란 자서전을 우연히 읽고 꼭 당신을 보고 싶어서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정말 내 글을 읽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내 글은 아직 출판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당신이 내 글을 읽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지인을 통해 우연히 얻었습니다. 당신이 출판사에 의뢰했던 원고를 제가 보게 된 것입니다.”
“헉!”
버락 오바마가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자서전을 완성하고 혹시 출판이 가능한지 타전한 곳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하지만 출판사는 아직 새파랗게 어린 그의 자서전을 출판해 줄 생각이 없었기에 포기하고 있던 차였다.
원고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는데 출판사에서는 그보고 직접 가져가라며 우편으로 배달해 주는 걸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허리케인이란 대스타가 자신의 글을 감명 깊게 읽고 찾아왔다고 하니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오바마 씨, 나와 저녁을 같이하면서 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실 수 있을까요?”
“저와 같이 식사를 하자는 말입니까?”
“왜요, 다른 약속이 있나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저녁을 먹으러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아, 다행입니다. 제이콥 씨, 당신도 같이 가시죠. 오늘은 제가 만든 자리니 최고급 식당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쏘겠습니다.”
최강철이 화통하게 말을 하자 버락 오바마와 제이콥이 동시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허리케인을 만난 것도 영광인데 밥까지 사겠다고 하자 가슴이 벅차올라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행은 다운타운으로 나가 오바마가 안내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가장 비싼 식당에서 최고의 대접을 해주고 싶었으나 오바마는 자신이 즐겨 가는 허름한 식당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자서전을 읽고 왔다는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식사를 하면서 주로 한 이야기는 그의 글에 관한 것들이었다.
완벽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오바마가 쓴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한때 베스트셀러로까지 판매되었기 때문에 전생에서 읽어본 적이 있었다.
29살에 불과한 청년이 쓰기에는 꽤나 심오했던 글이었고 그때 처음으로 오바마가 케냐 출신 아버지와 미국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란 걸 알았다.
과거에 읽었던 그의 글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대화를 나눴다.
생생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버락 오바마는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화두만 던져주면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이야기하며 최강철의 고민과 걱정을 덜어주었다.
뭔가 생각하는 게 다르다.
아직 새파랗게 어렸음에도 삶의 철학과 꿈꾸는 세상에 대한 의지가 확고해서 최강철과 서지영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가로 성장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을 만큼 달변이었고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도 대단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식사가 끝나고도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던 최강철이 힐끔 시계를 본 후 오바마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오바마 씨, 저희는 이곳에서 5일 동안 머물 예정입니다. 당신과의 만남이 저에게는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에 일정을 넉넉하게 잡고 왔습니다. 오늘은 벌써 10시가 훌쩍 넘었군요. 저는 당신과 내일 다시 만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좋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일은 제가 조금 바쁩니다. 그래서 오후에는 시간이 없군요. 괜찮다면 저녁이 어떨까요?”
“내일은 토요일이라 수업이 없지 않나요?”
“수업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약속이 잡혀 있거든요. 빠질 수 없는 약속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버락 오바마가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원칙을 지키는 그의 성격이 지금 이 순간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세계를 들썩거리게 만든 대스타, 허리케인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어도 그는 선약을 깰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바마 씨, 실례가 아니라면 무슨 약속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은 오후에 농구를 한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거든요. 제가 빠지면 팀의 성적에 문제가 생겨서 도저히 빠질 수가 없어요. 미안합니다.”
“그렇다면 내일 시합이 잡혀 있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나도 같이하면 안 될까요?”
“예?”
최강철의 제안에 버락 오바마가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복싱의 황제 허리케인이 자신과 농구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하자 그는 잘못 들었나 귀까지 후벼댈 정도였다.
“농구라면 나도 한가락 합니다. 문제가 안 된다면 당신과 같이 뛰어보고 싶네요. 부탁합니다. 같이 뛰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세상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버락 오바마는 고등학교 시절 선수 생활까지 했을 정도로 농구를 잘했다.
프로에 가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다닌 고등학교가 주 대회에서 우승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매주 하버드 대학생과 로스쿨 대학원생들로 구성된 농구 경기에 반드시 참석했다.
하버드에는 6개의 농구 클럽이 있었는데, 매주 돌아가면서 리그전을 치렀기 때문에 버락 오바마의 주말은 언제나 코트와 함께였다.
최강철은 고등학교 시절 이성일과 함께했던 농구를 생각하고 덤볐다가 완전 바보가 되고 말았다.
그들의 농구 수준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버락 오바마와 그 일행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천하의 허리케인도 오랫동안 농구를 하면서 호흡을 맞춰온 사람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최강철은 최선을 다해 뛰며 경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최강철이 코트에 나타났을 때 클럽 선수들은 전부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반겨주었다.
믿겨지지 않은 일을 보고 사람들은 기적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최강철의 출현과 그와 함께했던 유쾌한 농구 시합이 바로 기적이었다.
꿈같은 5일의 여정.
최강철은 버락 오바마와 두 번의 농구 경기를 했고, 4번이나 같이 식사를 했으며, 밤늦도록 이틀 동안 술을 마셨다.
떠나는 날 버락 오바마는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다.
헤어짐에 대한 서운함이 그의 얼굴에, 그리고 온몸에 절절히 배어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최강철이 손을 내밀었다.
“오바마 씨, 우린 친구가 된 거 맞죠?”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계속해서 말했지만 난 당신의 사상을 존경합니다. 인종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과 하나가 되려는 당신의 철학은 전 세계를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나에게 당신의 가족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습니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 오히려 제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영웅이라 불리는 당신과 5일이란 시간을 보냈으니 난 죽을 때까지 이날들을 잊지 못할 겁니다.”
“다시 찾아와도 되겠죠?”
“왜 그런 말씀을… 허리케인이 온다면 난 언제나 환영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나에게는 더없는 영광입니다. 언제든지 와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바마, 혹시 내가 돈이 많다는 걸 아나요?”
“당신같이 엄청난 인기 복서가 왜 돈이 없겠어요. 이번에도 많은 돈을 벌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돈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허리케인, 당신과 나의 우정은 이런 만남으로 충분합니다. 당신과 나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정을 쌓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 보면 돈이 필요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특히 당신처럼 원대한 꿈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지요.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찾아올 테니까요. 원하는 것을 하세요. 제가 당신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아무런 조건은 없습니다. 나는 당신과의 우정이 더없이 소중할 뿐이니까요.”
굳게 악수를 하고 돌아섰다.
인연이란 우연히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일부러 만들어지기도 한다.
버락 오바마를 만나 이렇게 시간을 보낸 이유는 간단하고도 매우 중요했기에 그런 인연을 만들기 위해 치졸하지만 이런 방법을 선택했다.
힘없는 조국 대한민국.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그들에 의해 수많은 제약을 당하며 북한의 위협에 굴복했고 일본과 중국의 고압적인 태도에 제대로 대항조차 하지 못한 채 굴욕의 역사를 거듭했다.
나는… 그것을 막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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