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얼굴도 부었고 온몸이 부어 움직이기 어려웠다.
서지영과 함께 방을 나서자 윤성호와 이성일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맞아주었다.
특히 이성일은 그들이 방을 나오는 걸 본 후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싸가지 없는 말부터 해왔다.
“아무렴, 원기 회복에는 그만한 게 없지.”
“뭔 소리냐?”
“온몸이 쑤시고 아프지?”
“그래.”
“그래도 잘했을 거야. 난 널 믿어.”
“뭘 잘해, 이 자식아!”
팔을 번쩍 들려고 했지만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비명 소리가 나왔다.
옆에서는 서지영이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대놓고 이성일이 야한 소리를 해대자 마치 쥐구멍에라도 들어갈 기세였다.
“그만해, 인마. 지영 씨 부끄럽게 왜 그래. 남녀가 한 방에 있으면 다 그런 거지, 뭐. 강철아, 밥이나 먹으러 가자.”
혼내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는데 윤성호가 그걸 그대로 따라 했다.
할 말은 태산 같았지만 최강철은 어이없다는 표정만 지은 채 입을 닫아버렸다.
여기서 더 떠들어봤자 불리해지는 건 그와 서지영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상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방에서 2시간 가까이 있었으니 이 인간들이 야한 상상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최강철과 서지영은 그야말로 손만 잡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이 식당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지며 사람들이 반겨주었다.
어제의 흥분과 열기를 그들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을 향해 겨우 손을 들어 인사를 해주고 예약된 자리에 앉았다.
예전 같으면 사진을 찍자거나 사인을 해달라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텐데 최강철이 불편한 모습으로 겨우 자리에 앉는 걸 봤기 때문인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예의와 배려를 안다.
잘 먹고 잘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비록 몸은 불편했으나 아침 식사 시간은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윤성호와 이성일은 어제 있었던 시합에 대해서 떠들며 최강철을 정신없게 만들었는데 라운드마다 리뷰를 하는 통에 시합을 다시 하는 기분이 들었다.
주제가 시합에서 벗어난 건 식사가 거의 끝났을 때였다.
“강철아, 지금 한국에서는 난리가 났단다.”
“왜?”
“왜긴 왜야. 네가 타이틀을 획득했기 때문이지. 거의 모든 국민이 네 경기를 지켜봤대. 한국에서는 너를 영웅이라고 부른단다.”
“거참, 영웅은 무슨.”
“정말이야. 어제 네가 이기는 순간 한국 국민들이 전부 거리로 뛰쳐나왔어. 그 모습을 뉴욕 타임지에서 보도까지 했다니까.”
“얼굴 벌게진다. 그만해라. 나라를 구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까지… 정말 그랬다면 돌아가는 게 걱정되네.”
“걱정할 게 뭐가 있어. 사람들이 좋아해 주면 좋은 거지. 그런데 우리 언제 돌아가냐?”
“내년 2월 초에.”
“강철 씨, 어딜 가?”
최강철의 대답에 서지영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녀는 최강철과 일행들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반문에 윤성호와 이성일이 놀란 눈으로 최강철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 이거, 죽으려고 환장했군.
그들의 표정에 담긴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최강철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을 뿐이다.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더 늦으면 공부하기가 어려워질 것 같아서 내년에 복학할 생각이거든.”
“돌아… 간다고… 그걸 왜 지금에서야.”
서지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은 얼굴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는데 자신만 몰랐다는 현실이 그녀의 입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영 씨, 놀란 모양이네.”
“응, 놀랐어.”
“화났어?”
“아직은 아냐. 하지만 나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적절하지 않다면 그땐 화가 나겠지. 말해줘.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지영 씨도 알겠지만 나는 훈련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라 나중에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왜?”
“아주 돌아가는 게 아니라 공부할 때만 한국에 있을 거야. 방학 때는 다시 돌아와 지영 씨와 함께 있을 거니까 아무런 문제 없어.”
“그렇구나. 강철 씨는 나와 3개월 동안 떨어지는 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구나.”
서지영의 얼굴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최강철의 변명이 그녀를 이해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별은 하루도 길다. 그리고 그 이별은 끔찍한 고통과 슬픔을 주는데 최강철은 그런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건 뭘까.
과거의 나는 어떤 사랑을 했을까.
무조건 주는 사랑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얼마나 외롭고 슬픈 것인지 너무나 잘 안다.
사랑이란 건 주고받는 거래였다는 것을 죽는 그 순간 뼈저리게 느꼈다.
믿음이 배반되었을 때 겪어야 했던 지옥 같은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아픈 것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사는 인생에서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기에 서지영을 만났다.
그녀는 충분히 사랑스러운 여자였고 그 누구보다 착해서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여자였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몸은 26살의 피 끓는 청춘이었으나 정신은 이미 세상의 모든 더러움과 세파에 찌들어 버렸기에 순수와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단순하지 않다는 뜻이다.
화가 난 표정으로 떠나는 그녀를 잡지 않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고, 때를 잃어버린 사람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최강철이 그녀를 다시 찾은 것은 얼굴의 붓기가 가라앉고 몸 상태가 원래대로 회복되었을 때였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인원이 또 늘었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마이다스 CKC의 직원은 다시 7명이 더 늘어나 있었다.
델 컴퓨터와 시스코의 매출액이 급격히 늘어났고 사업 확장으로 인해 업무량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직원들을 뽑는 기준도 강화되었는데 워낙 연봉 조건과 근무 여건이 좋았기 때문에 퀄리티가 뛰어난 인재들의 스카우트가 가능했다.
그가 들어서자 가장 가까이 있던 황인혜가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윤성호와 만나면서 최강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들었기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철아, 어서 와. 몸은 괜찮아졌어?”
“보다시피. 내가 워낙 튼튼해서 금방 회복되거든요.”
“회의할 거니?”
“오랜만에 나왔으니까 그동안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들어봐야죠. 10분 후에 제 사무실에서 보는 걸로 준비해 줘요.”
“오케이, 보스.”
고개를 까딱 숙인 황인혜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녀는 사무실에서만큼은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최강철에 대한 예의를 철저히 지켰다.
10분이 지나자 서지영을 필두로 경영진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맨 앞에 들어서는 서지영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렇게 떠난 후 최강철이 한 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회의는 꽤 오래 진행되었다.
맨 먼저 보고를 시작한 것은 서지영이었는데 주 내용은 그동안의 주가 동향과 수익, 선물 투자에 관한 것들이었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가 상승은 무서울 정도였다.
블랙 먼데이가 있고 난 후 1년이 지났을 뿐인데 워렌 버핏이 탁월한 투자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가는 4배나 폭등한 상태였다.
거기다가 우량주를 사두었던 것들도 50% 이상 올라 주가에 들어 있는 총자산이 4,800만 달러나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델 컴퓨터의 약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장 후 1,900만 달러의 보유 주가는 불과 몇 개월 만에 두 배인 16달러를 기록해서 4,000만 달러에 육박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서지영이 운용한 선물 투자의 이익금도 만만치 않았다.
최강철의 지시대로 선물 쪽에 1,000만 달러를 운용했던 서지영은 6개월 만에 3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상승 쪽에 타깃을 잡고 운용한 결과였다.
클로이가 보고한 투자 기업의 성장세도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는 중이었다.
델 컴퓨터의 전분기 실적은 5,000만 달러였고 시스코의 실적은 2,000만 달러를 초과했다. 정말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였다.
물론 대부분의 이익금이 재투자되고 있었으나 이대로라면 조만간 엄청난 이익금들이 회사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수잔이 운용하기 시작한 부동산 쪽은 이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과를 얻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최강철이 별도로 마련해 준 300만 달러를 가지고 뉴욕과 LA 시가지 쪽에 땅을 매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모든 보고가 끝나자 최강철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갈수록 마이다스 CKC의 성장은 불가사의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는 경영진의 보고만 받고 나서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사람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서류를 믿는다.
모든 돈의 흐름은 서류로 결정되는 것이고 커다란 흐름만 맞으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것이 그의 경영 철학이다.
여기 앉아 있는 경영진들은 그의 이런 경영 방식이 자신들을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더욱더 열심히 일해줄 것이다.
“모두 고생했어요. 저는 앞으로도 주식 시장이 활황세를 보일 거라고 예측하고 있어요. 서 대표님?”
“예.”
“버크셔 해서웨이에서 1,000만 달러를 빼서 애플에 투자하세요. 앞으로 애플이 성장할 겁니다.”
“애플은 오랫동안 주가가 정체 현상을 벌이고 있어요. 반면에 버크셔 해서웨이의 전망은 아직도 밝은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일단 많이 올랐으니까 이익 실현 차원에서 전환한다고 생각하시고 내 말대로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선물 투자는 계속 상승 패턴에 초점을 맞추고 운영하세요. 그러면 크게 손해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시장 상황은 그때그때 달라요. 그건 제가 확인해 나가면서 움직일게요.”
“오케이.”
서지영의 반론에 최강철은 토를 달지 않았다.
맞는 말이다. 비록 앞으로의 주식 시장이 상승 추세를 그리겠지만 3개월마다 벌어지는 선물 시장은 수많은 변화를 지니고 있으니 서지영의 판단을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최강철은 그 후로도 클로이와 수잔에게 중요한 사항을 몇 가지 지시 내린 후 회의를 끝마쳤다.
“지영 씨는 잠깐 남아봐.”
모든 사람이 일어났을 때 최강철이 입을 열자 나머지 사람들이 도망치듯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들도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던 서지영이 다시 의자에 앉자 최강철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아직 화났어?”
“여긴 회사예요. 그런 이야기 할 장소가 아닙니다.”
서지영이 둘만 남았어도 경어를 쓰면서 날카롭게 대답했다.
아직도 화가 나 있다는 뜻이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회사일 이야기하지, 뭐. 이틀 후에 출장 갈 거니까 준비해 줘. 장소는 하버드야. 항공편 잡고 차도 렌트해 놔. 거기서 5일 동안 머물 테니까 호텔도 준비하고.”
“거긴 왜 가……?”
“중요한 사람을 만날 일이 있어서.”
“또 투자 때문에 사람 만나는 거야?”
서지영이 슬쩍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최강철이 이럴 때마다 일이 생겼기 때문에 그녀는 출장을 가자는 말에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손은 마이다스의 손이다.
뭔가를 할 때마다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사업에 투자를 했기 때문에 이제 그녀는 최강철이 무서울 정도였다.
미국 최고 펜실베이니아대학 출신이라는 자부심도 그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질 만큼 최강철의 투자 패턴은 경이적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자신의 말투가 변한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투자 때문에 가는 거 아냐.”
“그럼?”
“친구 사귀려고. 거기 하버드 로스쿨에 아주 괜찮은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이 누군데?”
“버락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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