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117화 (117/308)

[117] 제16장 영웅의 귀환

서울대의 윤문호 교수는 시합이 벌어지는 날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기 위해 동네를 한 바퀴 돈 후 일찌감치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하지만 동작이 더 빨랐던 건 장성한 3명의 아들이었다.

대학교에 다니는 둘째와 셋째는 물론이고 회사에 다니는 큰 아들놈까지 소파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두 눈이 말똥말똥했다.

신기한 일이다.

아들놈들은 일요일이면 늦잠을 자다가 밥만 먹고 총알같이 집을 나섰기 때문에 얼굴 보기가 어려웠는데 오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식사하세요.”

집사람은 가족들이 전부 일찍 일어나 텔레비전 앞으로 모이자 부담을 느꼈던지 안 하던 짓을 했다.

일요일에는 전부 각자 놀기 때문에 평소에는 간단하게 해결하곤 했는데 가족들이 새벽처럼 일어나 돌아다니자 늦잠을 포기한 것 같았다.

“여보, 우리 여기서 먹읍시다.”

“무슨 소리예요. 다 차려놨는데!”

“지금 시작하잖아…….”

“엄마, 아버지 말씀대로 여기서 먹어요. 지금 최강철 하이라이트 나온다고요.”

대학 4학년인 둘째가 편을 들고 나서자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나머지 놈들이 마구 고개를 끄덕여댔다.

화면에서는 최강철이 프레디 아두와 시합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방송국에서는 그동안 최강철이 펼쳐왔던 KO 퍼레이드를 보여주며 분위기를 잔뜩 끌어 올리고 있었다.

집 사람의 입이 한 치는 튀어나왔다.

겨우 식탁에 차려놨는데 4명의 남자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자 두 눈을 부릅뜬 채 한동안 노려보았다.

하지만 대책 없는 남편과 아들들을 식탁으로 끌고 오기에는 그들의 정신이 별나라로 가 있었기 때문에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키워본 사람들은 안다.

어렸을 때는 그런 대로 대화가 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아들놈들은 부모들과의 대화가 절벽으로 변한다.

그런 놈들이 오늘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며 마구 떠들고 있었다.

“아버지, 최강철이 경영학과 학생이라면서요?”

“그래, 입학하자마자 휴학계를 냈지만 분명히 서울대 학생이다. 그것도 경영학과 수석 합격 한 놈이야.”

“그런데 휴학을 그렇게 오래해도 돼요? 벌써 6년이나 지났잖아요?”

“쟨 특별하잖아. 학교에서는 외국 취업자나 스포츠 스타들에게는 편의를 봐줄 수 있다는 규정이 있어. 그런 규정을 근거로 두 번 연기한 거야.”

“학교는 다닐 수 없겠네요. 세계 챔피언이 학교를 다닐 리 없잖아요?”

“아니다, 저 친구 내년에 복학한다더라.”

“정말이에요!”

최강철이 복학한다는 소릴 하자 아들 셋이 동시에 놀란 눈을 만들었다.

오늘 통합 타이틀을 획득하면 그야말로 최강철은 명실상부한 국민 영웅으로 등극할 것이다.

더군다나 뉴스에서 보니 이번 타이틀전 개런티로 350만 달러란 거액을 받는다고 했다.

일반인들이 평생을 벌어도 결코 만져볼 수 없는 거액이었다.

그런 놈이 왜 학교를 다닌단 말인가.

“최강철은 특별한 친구야. 내가 몇 번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비범함이 있었어. 저 친구가 나에게 그러더라. 복싱 못지않게 학문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뭔가 원대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합이 시작되자 복싱을 좋아하지 않던 집사람까지 슬그머니 소파로 와서 앉았다.

최강철이 남편의 제자라는 특수성도 있었지만 온 국민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오랜만에 가족들이 전부 모였기 때문에 그녀조차 텔레비전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순간, 이런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이었다.

최강철이 출전하는 순간, 아들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머리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태극기를 본 아들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두 눈을 부릅떴다.

대한민국.

긴 전쟁을 끝낸 후 한강의 기적을 만들며 경제를 부흥시켰으나 군부독재자들의 총칼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면서 국민들의 가슴속에는 깊은 슬픔과 절망이 숨겨져 있었다.

그랬기에 국가에 대한 사랑이 특별했다.

총칼에 맞서 장렬히 산화해 갔던 사람들의 넋을 잊지 않았고 끝내 총칼을 무찔러 자유를 획득한 국민들의 자부심은 애국이라는 결과로 승화되었다.

아들들은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다.

윤문호 역시 그랬다.

대학교수, 그것도 한국 최고 대학의 교수라는 권위와 자부심은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들들과 함께 소리를 질렀고 최강철이 맞을 때마다 안타까움에 한숨을 흘러냈다.

마크 브릴랜드가 치사한 작전을 펼치며 끌어안을 때마다 육두문자를 쏟아내었고, 끝끝내 최강철이 기적처럼 힘을 내어 그를 쓰러뜨렸을 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들들의 몸을 끌어안고 만세를 불렀다.

마크 브릴랜드가 KO되는 순간 아파트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진동했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주민이 한꺼번에 뛰어올라 기뻐했기 때문이다.

올해 벌어졌던 올림픽에서 12개의 금메달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앵커와 해설자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들도 나처럼, 우리 국민들처럼 그 기쁨과 가슴 벅찬 영광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쥐어진 주먹에서 땀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시합이 진행될 동안 꽃다방은 탄식과 탄성이 터져 나왔고 욕설과 주먹질이 난무했다.

그러던 한순간.

10라운드에 들어와 최강철이 폭풍처럼 마크 브릴랜드를 몰아붙이자 한 놈도 빠짐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와아, 와아! 그래, 죽여. 깡철아, 여기서 끝내자!”

고함 소리가 천둥처럼 꽃다방을 진동시켰다.

펄쩍펄쩍 뛰며 주먹질을 해대는 통에 실내가 권투 경기장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마침내.

간절히 시합을 지켜보던 김영호와 류광일은 끝내 최강철이 마크 브릴랜드를 캔버스에 길게 눕히자 서로를 끌어안으며 몸부림을 쳤다.

꽃다방은 난리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이 서로를 끌어안고 만세를 불렀는데 상대가 누군지 가리지 않았다.

저 새끼 봐라. 아무리 좋아도 왜 다방 아가씨를 끌어안고 지랄이야.

한 놈이 다방 아가씨를 부둥켜안고 지랄을 떨었어도 그 누구 하나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허리케인, 허리케인, 최강철 만세!”

마치 이성을 잃은 사람들처럼 기쁨을 숨기지 못하던 인간들이 꽃다방을 벗어나 거리로 뛰쳐나가기 시작한 것은 바깥에서 들려온 환호성 때문이었다.

그들을 따라 김영호와 류광일도 밖으로 나왔다.

길거리에서는 차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가 난무했고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승리를 기뻐하고 있었다.

최강철은 이성일의 귀를 잡아당겨 그의 어깨에서 내려온 후 겨우 일어나 코너로 돌아간 마크 브릴랜드를 향해 다가갔다.

마크 브릴랜드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코치진이 가로막아 왔으나 최강철은 그들이 비켜줄 때까지 조용히 서서 기다렸다.

마크 브릴랜드의 고개가 들려지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최강철이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마크, 훌륭한 경기였다. 나는 너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허리케인…….”

그의 손이 마주 나왔다. 그러고는 내밀어진 최강철의 손을 굳게 붙잡았다.

붉어진 얼굴. 아직도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듯 그의 눈에는 흘렀던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허리케인, 너는 진정한 강자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을 거다. 나중에… 다시 한번 붙었으면 좋겠다.”

“언제든지, 기다리 마.”

“고맙다.”

최강철이 그의 손을 굳게 잡은 후 링의 중앙으로 나와 함성을 지르고 있는 관중들을 향해 다시 한번 손을 번쩍 들었다.

“허리케인, 허리케인, 허리케인!”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관중들의 함성.

그들은 경기가 끝난 후 5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케인을 연호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충격적인 마지막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링 아나운서가 다가온 것은 레프리의 공식 승리 선언이 끝나고 난 후였다.

이것도 새롭게 생긴 습관 중의 하나다.

그동안 다른 경기에서는 타이틀전이 끝나도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최강철이 워낙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이제는 자연스럽게 링 아나운서가 다가왔다.

“허리케인, 승리를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다른 경기와 다르게 고전을 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마크 브릴랜드 선수가 워낙 뛰어난 스피드를 지녔기에 경기 내내 힘들었습니다. 마크 브릴랜드 선수는 대단한 선수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10라운드에서는 정말 엄청난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허리케인 특유의 폭발적인 인파이팅을 펼쳐졌는데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까?”

“그렇습니다. 마크 브릴랜드 선수의 체력이 소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 마크 브릴랜드 선수는 10회 들어 급격히 체력이 떨어져서 이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통합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저는 이전 시합부터 계속 말해왔듯이 판타스틱4와의 대결을 원합니다. 그들이 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붙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 계시는 헌즈, 당신을 비롯해서 누구든 도전하길 바랍니다. 나는 당신들과 영광스러운 대전을 원합니다.”

최강철이 링 사이드에 있는 헌즈를 가리키며 당당히 말하자 관중들이 고함을 지르며 성원을 보내왔다.

떠오르는 태양 허리케인, 최강철.

그리고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복싱의 영웅들과의 한판 승부를 그들은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성원입니다. 저 역시 당신과 그들의 대결이 펼쳐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허리케인, 당신에게는 아직 이루어야 할 목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바로 WBC 챔피언인 허니건과의 대결인데요. 허니건을 꺾어야만 진정한 통합 챔피언이 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그 역시 제가 원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허니건, 지금 들으셨지요. 복싱팬들은 당신과 나, 누가 진정한 챔피언인지를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역시 허리케인입니다. 화끈한 복싱 스타일 못지않게 조금의 주저함도 없군요. 허리케인,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링 아나운서가 묻자 최강철이 담담하게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그런 후, 한국말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저를 응원해 주신 덕분에 챔피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무적의 챔피언이 될 테니 계속 지켜봐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링에서 내려오자 수많은 기자가 몰려들었다.

외신은 물론이고 국내 기자들까지 총망라되었기에 그 숫자가 가뿐하게 100명이 넘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요청한 건 아니었다.

이제 막 시합을 끝낸 선수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건 불문율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그들은 링에서 내려와 대기실로 걸어가는 최강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자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10라운드 내내 치고받았더니 얼굴이 화끈거렸고 상반신이 마비되는 것처럼 뻐근해져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따라붙는 기자들을 뿌리치고 호텔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윤성호와 이성일은 그가 침대로 향하자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방을 빠져나갔는데 최강철은 그들이 나가는 것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맛본 달콤한 잠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기분 좋은 느낌에 최강철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너무나 따뜻했고 부드러워 마치 천사의 속삭임을 듣는 것 같았다.

“언제 왔어?”

“방금.”

“아… 지금 몇 시야?”

“아침 9시가 넘었어. 강철 씨는 무려 11시간이나 잤단 말이야.”

“그랬어? 난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래 잤네.”

“일어나. 밥 먹어야지. 강철 씨하고 같이 먹으려고 지금까지 기다렸어.”

“조금만 더 이대로 있자.”

최강철이 침대맡에 앉아 있는 서지영을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끌려 들어간 그녀의 몸이 품에 안기며 쓰러지자 최강철이 팔을 들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품에 안긴 그녀는 눈을 들어 희미하게 웃고 있는 최강철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왜 웃어?”

“좋아서.”

“뭐가?”

“지영 씨를 안을 수 있었잖아. 아침이 되면 남자는 힘이 넘치거든. 그런데 지영 씨가 이른 아침에 때 맞춰 여기로 찾아왔으니 얼마나 좋겠어.”

“이런 늑대, 빨리 안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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