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때앵!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공 소리.
공 소리가 울리자 최강철은 성큼성큼 링의 중앙으로 나가 주먹을 들어 올려 마크 브릴랜드의 글러브를 슬쩍 터치한 후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하지만 물러선 것은 한 발자국이었고 전진해 들어간 것은 두 발자국이다.
위잉!
기선 제압.
갑자기 파고든 최강철의 라이트 훅이 번개처럼 마크 브릴랜드의 왼쪽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갔다.
맞으라고 던진 건 아니다.
이미 자신의 스텝을 확인하고 뒤로 빠졌기 때문에 이렇게 큰 주먹이 정확하게 들어갈 리는 만무했다.
그럼에도 마크 브릴랜드는 불에 덴 것처럼 급히 후퇴하면서 자세를 추슬렀다.
최강철이 던진 라이트 훅의 위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놈의 눈은 급격하게 커져있었다.
쉬익, 쉬익.
뒤로 물러섰던 마크 브릴랜드의 전매특허가 터지기 시작했다.
빠르다. 그리고 너무 날카로워 창으로 찌르는 것 같은 레프트 잽이었다.
최강철은 더킹과 위빙을 시도하면서 피했으나 놈의 잽은 계속해서 안면을 스쳐 지나갔다.
위협적인 공격.
잽을 피한 후 접근하면 사이드로 돌면서 지체 없이 좌우 스트레이트가 터져 나와 최강철의 전신에 작렬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펀치들이었다.
본능에 자신을 맡긴 채 온몸의 세포를 곤두세웠다.
막상 부딪쳐 보자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진화되어 마치 허깨비와 상대하는 것 같았다.
놈에게 왜 링의 마술사란 별명이 붙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번쩍번쩍.
사라졌다 나타난다. 그냥 사라지는 것도, 그냥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최강철의 시선에 잡혔을 때 마크 브릴랜드의 펀치는 독사의 치명적인 혓바닥처럼 목 줄기를 물어뜯기 위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어디 얼마나 빠른지 해봐.
수시로 파고들면서 놈의 복부와 안면을 향해 펀치를 날리며 접근했다.
교묘한 스텝과 블로킹으로 펀치를 무력화시킨 후 유령처럼 빠져나가는 마크 브릴랜드의 신형을 따라 붙으며 최강철은 연신 위협적인 펀치를 난사했다.
맞지 않아도 좋다.
지금의 이 펀치는 네가 나를 상대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니 마음껏 도망치고 마음껏 공격해 봐라.
파앙, 팡, 팡!
공격이 실패하는 순간, 뒤로 물러서던 마크 브릴랜드의 주먹이 정확하게 최강철의 가딩을 뚫고 얼굴에 박혔다.
고개가 들릴 정도로 큰 펀치에 맞았다.
원투 스트레이트에 이은 라이트 훅.
스트레이트는 얼굴을 노린 것이고 라이트 훅은 복부를 공격한 것이었다.
몸이 주춤했다.
가딩을 뚫고 들어와 안면을 훑은 놈의 펀치가 잠시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최강철은 이를 드러내며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패턴 좋아. 나는 짐승처럼 물고 뜯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 흥분된다.
* * *
“어떠냐?”
“괜찮습니다.”
“초반부터 너무 대주지 마. 대미지가 쌓이면 후반이 힘들어!”
“저 새끼가 워낙 빨라서요. 방어가 좋아서 맞추기가 쉽지 않네요.”
“완급을 조절해. 그냥 똑같은 속도로 들어가면 패턴이 읽힌단 말이다.”
“알겠습니다.”
“강철아, 내가 말한 건 아직 쓰지 마. 저 새끼 다리가 조금 무뎌지면 그때부터 써.”
“오케이.”
이성일이 중간에서 불쑥 튀어나오며 소리를 지르자 최강철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이제 겨우 1라운드가 지났을 뿐이니 마크 브릴랜드의 스피드는 펄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기다린다. 1라운드는 탐색을 하기 위해 압박에 여유를 두었지만 이제부터 시작되는 압박은 훨씬 치열하고 지독하게 변할 것이다.
때앵!
2라운드의 공이 울렸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다.
최강철은 맞은편 코너에서 나오는 마크 브릴랜드의 눈을 강하게 쏘아보며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3개월 동안 엄청난 훈련량을 쌓았다고 들었다. 어디 얼마나 네 체력이 강해졌는지 보자.
1라운드에 비해 더 빠른 압박이다.
최강철은 뒤로 물러나는 마크 브릴랜드를 쉽게 놔주지 않고 계속해서 펀치를 뻗어냈다.
그냥 도망칠 수 없는 빠르기다.
1라운드에서는 그냥 물러설 수 있었으나 마크 브릴랜드는 사이드나 백스텝을 밟으면서 펀치를 내야 했다.
최강철의 스피드가 그만큼 빨라져 펀치를 내지 않으면 결국 따라잡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리를 하는 자와 냉정하게 움직이는 자와의 싸움은 언제나 똑같은 결과가 벌어진다.
바로 모험을 하는 자가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최강철은 마크 브릴랜드를 압박하면서 많은 펀치를 맞았다.
공격을 하는 순간은 더킹과 위빙의 각도가 제약되고 암 블로킹과 숄더 블로킹도 수시로 풀리기 때문에 반격을 완전히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최강철은 펀치를 맞으면서도 끊임없이 몰아붙였다.
자신만 맞는 게 아니라 그의 주먹도 가끔가다 놈의 안면과 복부에 꽂히기 시작했으니 이건 그가 바라던 난타전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 * *
“마크 브릴랜드의 연타. 최강철 선수 맞았습니다! 빠릅니다. 마크 브릴랜드 때리고 빠집니다. 따라 들어가는 최강철 선수! 강한 라이트 훅. 빗나갑니다. 아, 아깝습니다. 하지만 최강철 선수 계속 밀어붙입니다! 원투 스트레이트! 가딩으로 막는 마크 브릴랜드. 다시 반격을 합니다! 빠른 콤비네이션. 마크 브릴랜드, 아직도 엄청난 스피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때리고 맞습니다. 최강철 선수의 레프트 훅이 약간 빚나갔습니다!”
“최강철 선수, 고전이군요. 마크 브릴랜드의 펀치가 예리하게 터집니다.”
“5라운드까지 똑같은 패턴으로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데요. 점수상으로는 최강철 선수가 많이 뒤질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충격받을 정도의 정타를 여러 번 맞았습니다. 반면에 마크 브릴랜드는 오늘 컨디션이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마크 브릴랜드의 연타가 다시 터집니다! 외곽으로 빙빙 돌면서 치는 저 펀치를 막아내야 할 텐데요. 정 위원님, 방법이 없을까요?”
“워낙 펀치 스피드가 빠르고 리치도 길어서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제가 봤을 때 최강철 선수의 작전은 끊임없이 전진하며 난타전을 유도하는 것 같습니다만 마크 브릴랜드가 잘 말려들지 않고 있어요. 걱정이네요.”
“말씀드리는 순간, 5라운드가 끝나는 공이 울렸습니다. 잠시 광고 보고 돌아오겠습니다.”
김영국이 마이크를 놓으면서 진이 빠진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지친 기색보다 그의 얼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걱정이었다.
그건 옆에 앉은 정민철도 마찬가지였는데 경기를 지켜보는 그들의 얼굴은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져 있었다.
“정 위원님, 이거 쉽지 않겠는데요?”
“휴우, 저놈이 웬만큼 빨라야지. 더군다나 못 치는 펀치가 없어. 상황에 맞춰서 터져 나오는 펀치들이 너무 예리해.”
“그래도 강철이가 계속 밀어붙이고는 있잖아요. 아직은 기대해 봐야 되지 않겠어요?”
“그건 그런데… 변화가 필요해. 이렇게 계속 진행하면 안 된다고. 계속 따라잡고는 있지만 레프트 잽 때문에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어. 아, 저걸 어떻게 때려잡아야 되는데…….”
6라운드.
링의 중앙으로 나가자 마크 브릴랜드가 웃는 것이 보였다.
마주 웃어주었다.
놈은 자신이 약속했던 5라운드가 아무 일 없이 끝나자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인마, 웃지 마라.
그런 게 인생이지 않겠어.
말한 대로 모든 것이 된다면 그게 어떻게 인생이겠냐.
그리고 너의 웃음은 너무 빨라. 지금부터 네 웃음은 곧 눈물로 변할 것이다.
적의 예봉을 꺾는다.
자신을 지금까지 괴롭혀 왔던 레프트 잽이 날아오는 순간 최강철은 마주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뿜어냈다.
위잉!
리치에서 차이가 났으나 더킹으로 전진하며 날렸기 때문에 거리가 줄어들었다.
아깝게 놈의 턱을 스쳐 지나갔지만 최강철은 그 순간을 이용해서 바짝 파고들며 복부를 향해 좌우 훅을 날렸다.
팡, 파앙!
지금까지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패턴이 나오자 복부를 얻어맞은 마크 브릴랜드가 미친 듯이 뒤로 도망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접근해 오는 최강철을 향해 기관포 같은 좌우 스트레이트와 어퍼컷, 양 훅이 순식간에 10여 발이나 터졌다.
위빙과 더킹, 패링에 이은 라이트 훅과 스트레이트로 맞섰으나 놈은 이미 펀치를 던지고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또다시 돌진.
다시 날아오는 레프트 잽을 향해 마주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던진 후 복부를 향해 쌍포를 갈겼다.
퍼벅!
효과가 있다. 복부를 맞는 순간 놈의 몸이 움찔하는 게 주먹에서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이성일이 자신에게 주문한 것이었다.
놈의 레프트 잽을 때려잡기 위해 준비한 라이트 크로스 카운터.
연속으로 복부를 맞자 뒤로 물러서던 놈에게서 번개처럼 날아오던 레프트 잽의 횟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좋아, 이게 내가 바라던 것이었어.
레프트 잽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인파이팅이 훨씬 용이해진다는 것을 의미했고 마크 브릴랜드의 안면이 사정권 안에 들어온다는 것을 뜻한다.
접근전의 스피드를 올렸다.
파고드는 스텝의 움직임을 한 단계 더 높이면서 적의 이동 경로를 가로막고 난타전에 돌입하자, 지금까지 한자리에 서 있지 않았던 마크 브릴랜드의 스텝이 기어코 잡혔다.
콰앙, 쾅, 쾅… 콰앙!
스텝이 잡히자 그동안 이빨을 감추고 있던 최강철의 불꽃같은 콤비네이션이 미친 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쏟아져 나오는 펀치 샤워.
결코 단발로 그치지 않았다.
덫에 걸린 맹수의 몸부림처럼 마크 브릴랜드의 펀치 역시 소나기처럼 쏟아져 나왔다.
난타전.
절정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로프를 1m 앞둔 지점에서 부딪쳤다.
서로 때리고 맞는 난타전이 10여 초 동안 계속되자 관중들이 전부 일어섰다.
“와아, 와아!!!”
지금까지 최강철이 계속 밀어붙였으나 효율적인 공격을 하지 못하고 지루하게 경기가 이어졌기 때문에 답답해하던 관중들은 두 선수가 폭풍 같은 펀치 샤워를 터뜨리며 부딪치자 미친 듯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안면을 향해 순식간에 터진 레프트 숏 훅에 머리가 덜컥 걸렸다.
반사 신경을 이용해서 돌리지 않았다면 커다란 충격을 입었을 정도로 날카로운 연타 공격이었다.
이 자식, 봐라.
타격을 받았지만 그 이상으로 돌려주며 전진했다. 어차피 난타전을 벌이면서 이 정도의 출혈은 각오했으니 괜찮다.
경기의 양상이 변했다.
완벽한 아웃복싱을 하면서 무시무시한 레프트 잽으로 최강철의 접근을 효율적으로 차단하던 마크 브릴랜드의 스텝이 잡히자 링의 곳곳에서 수시로 난타전이 벌어졌다.
완벽한 우위를 잡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경기의 양상이 변했다는 것은 마크 브릴랜드를 때려잡을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 *
“효과가 있구나. 잘했다.”
“이대로 계속하면 놈의 스피드가 줄기 시작할 겁니다. 그때부터는 저 새끼를 진짜 죽일게요.”
최강철이 붉게 변한 얼굴로 시퍼런 시선을 빛냈다.
아직 찢어진 곳은 없었으나 워낙 많은 펀치에 당했기 때문에 경기가 끝나면 얼굴이 만신창이로 변할 것이다.
윤성호가 불쑥 나선 것은 이성일이 물병을 들어 최강철의 입에 부어주고 난 후였다.
“저놈한테서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뭘 말입니까?
“네가 공격을 시작할 때 선제공격이 나오더라. 라이트 훅을 던지는 순간 놈이 레프트 숏을 던지면서 연타를 터뜨렸어. 거기에 두 번이나 당했다고.”
“내 라이트 훅의 모션이 크다는 걸 노린 거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저 자식, 빠질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어. 아무래도 저놈은 잡혔을 때를 대비해서 난타전을 준비한 것 같다. 재미도 봤으니까 계속 시도할 거야. 조심해!”
“알았습니다, 조심하죠.”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6라운드에서 공격을 하다가 4차례 걸렸는데 그중 두 번은 윤성호가 말한 대로 라이트 훅을 던질 때 당한 것이었다.
놈이 비장의 무기로 준비한 게 분명했다. 어쩐지 뭔가 있는 것처럼 하더니 그게 놈을 난타전으로 나서게 만든 이유였던 모양이다.
복싱은 모르고 당할 때는 치명상을 입지만 알고 나면 더 큰 기회를 만들 수 있으니 적의 전략은 이제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점점 재밌다.
나를 상대로 난타전까지 준비했단 말이지.
좋아, 아주 훌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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