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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환생-114화 (114/308)

[114]

* * *

시저 팰리스호텔 특설 링에 화려한 조명이 켜지자 사람들의 심장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오후 일찍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속속들이 입장을 했는데 전부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저 팰리스호텔 특설 링은 20,000명의 관객을 유치할 수 있는 규모였으나 일반인들에게 판매된 건 10,000장뿐이었다.

스폰을 위해 참여한 기업들이 입장권의 절반을 통째로 쓸어갔기 때문이다.

워낙 관심이 가는 빅 이벤트였기 때문에 대기업들은 이번 경기를 자신들의 고객을 초청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영업 활동으로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고객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준다면 자신들에게 더없이 커다란 도움이 될 테니 기업들이 안달을 부리는 것은 당연했다.

마치 아름다운 정원을 보는 것 같았다.

화려한 조명이 들어온 특설 링은 오색 빛으로 물들어 달빛에 잠긴 호수처럼 아름다웠다.

“정말, 대단하군요.”

“내 평생에 이런 곳에서 해설을 하게 될 줄이야… 더군다나 최강철의 경기를 말이야. 난 내일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정신이 없어서 중계나 제대로 할 지 모르겠어요. 2만 명이 꽉 찬 것 같은데요.”

“MBC 애들이 중계하러 갔다 와서 거품을 물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톱스타들이 셀 수도 없이 들어왔어요. 할리우드 스타들이 다 나온 것 같습니다. 이건 뭐, 시상식에 온 기분인데요.”

“배우들만 온 게 아니야. 가수들도 왔고 저길 봐. 알리하고 헌즈도 보이잖아. 농구 황제 조던도 왔구만.”

김영국과 정민철이 특설 링을 가득 채운 관중들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가장 커다란 장충체육관에서 경기를 해도 기껏 5천 명조차 수용하지 못했는데 특설 링이 설치된 가든에 2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가득 차자 꼭 인간들의 바다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군다나 영화나 화면에서 봤던 스타들이 수시로 카메라에 잡혔기 때문에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제 한 게임만 끝나면 드디어 시작되는군.”

“그런데 이놈들 방송 기술이 뛰어난데요. 이걸 중계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20대는 동원한 것 같습니다.”

김영국은 ESPN이 송출하고 있는 화면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한국에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방송 기법이 여러 군데서 보였는데 가장 뛰어난 것은 다수의 카메라를 설치해서 전 방위적으로 경기 장면을 세세하게 잡는 것이었다.

자막의 기술도 뛰어나 양쪽 선수에 대한 프로필과 함께 주요 장면의 하이라이트, 그리고 주 무기가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휴우, 숨 막혀.”

“떨리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이런 경기 한 번만 더 중계했다가는 생명이 10년은 단축되겠어. 피디 사인이 들어오는구만. 시작할 시간인 모양이야.”

그의 말대로 약속된 시간이 되었는지 담당 PD가 큰 원을 부지런히 돌리고 있었다.

이번 경기는 마지막 오픈 게임부터 중계하기로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에 잡담할 시간이 더 이상 없었다.

벌써 2시간 전부터 들어와 있었으나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 시간은 중계가 시작되자 더 빠르게 흘렀다.

세계 랭킹전으로 벌어진 페더급 경기가 박진감 있는 난타전으로 진행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들의 표정이 붉어지기 시작한 것은 오픈 게임이 끝나고 대기실에서 준비하고 있는 최강철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을 때부터였다.

“고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최강철 선수의 모습이 화면에 잡히고 있습니다. 대기실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모습입니다. 컨디션이 좋아 보입니다. 정 위원님, 최강철 선수의 몸이 구릿빛으로 물들어 있군요. 훈련량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겠죠?”

“다른 경기 때와 다른 모습입니다. 굉장히 단단해 보입니다. 저 복근을 보십시오. 근육이 차돌처럼 배어 있지 않습니까. 저런 근육은 단순하게 헬스를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아마 최강철 선수는 엄청난 훈련량을 가졌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 마크 브릴랜드 선수의 모습도 잡히고 있습니다. 마크 브릴랜드 선수 무표정한 표정으로 여유 있게 섀도복싱을 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몸이 가볍게 보입니다.”

“그렇군요. 마크 브릴랜드 선수의 컨디션도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곧 최강철 선수의 경기가 벌어질 예정입니다. 고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광고 보고 금방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 *

대기실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윤성호와 이성일의 표정은 긴장으로 잔뜩 굳어져 있었는데 오픈 게임이 모두 끝나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하얗게 변해갔다.

그렇기에 가볍게 몸을 풀고 있던 최강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무슨 코치들이 이 모양이야. 지금 송장 치우러 가는 겁니까? 얼굴 좀 풀어요!”

“우리 긴장 안 했다. 네가 잘못 본 거야.”

“관장님, 우리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혹시 내가 질까 봐 무섭습니까?”

“묻지 마. 거짓말하기 싫어.”

“하아, 정말 미치겠네. 그래서 인혜 누나는 어떻게 꼬셨대? 이럴 때는 말입니다. 무조건 아니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래야 선수 사기가 올라갈 거 아닙니까.”

“야, 솔직히 겁나는 걸 어떡해.”

“참, 내 기가 막혀서. 가서 오줌이나 싸고 와요. 벌써 화장실 갔다 온 지 30분이 넘었잖아요.”

“응. 갔다 올게.”

“같이 갔다 와요.”

최강철이 인상을 쓰자 윤성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옆에 있던 이성일도 따라나섰다.

아이고, 이 화상들. 긴장하긴 무지하게 긴장한 모양이다.

웃음이 나왔다.

윤성호도 이성일도 긴장하는 건 당연했다.

자신은 IBF 타이틀을 지녔지만 진정한 챔피언이 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윤성호도 이성일도 마찬가지였다.

챔피언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하던 챔피언의 꿈이 말이다.

진행 요원이 들어온 건 화장실에 갔던 윤성호와 이성일이 사이좋게 나란히 대기실에 들어와 밴딩 작업을 재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천천히 검은색 가운을 입고 태극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이마에 둘렀다.

처음이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해온 것처럼 익숙해서 이질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호흡을 길게 뿜어낸 후 대기실의 문을 열고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따라붙는 카메라들.

그들은 필사적으로 걸어가는 최강철을 따라잡았는데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를 배웅하는 것과 비슷한 치열함이 담겨 있었다.

복도를 벗어나 경기장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를 환영하는 관중들의 반가움은 이전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 * *

“아이고, 씨발. 우리 깡철이 이마빡에 태극기를 둘렀네.”

“태극기를 두른 건 처음이지?”

“응, 아무래도 진짜 챔피언전이라 그런 모양이다. 태극기를 머리에 두르고 나온 건 국가의 명예를 걸고 싸우겠다는 뜻 아니겠어?”

“장하다, 최강철. 미국에 가서 복싱을 했어도 깡철이는 한국 사람 맞지.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응원하는 거잖아. 깡철이, 화이팅!”

벌써 주머니에 들고 온 소주를 반이나 마신 김영호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꽃다방 조직원들이 동시에 고함을 지르며 화이팅을 외쳤다.

그들은 최강철이 두르고 나온 태극기를 본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는데 링 위로 올라서자 자리에서 전부 일어나 그를 맞아들였다.

“야, 너 소주 남았냐?”

“니 꺼 마셔, 인마.”

“내껀 다 마셨어. 속 타서 그래. 조금만 줘봐.”

“이 자식아, 귀한 거야. 조금만 마셔.”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류광일이 소주병을 넘겨주자 김영호가 잽싸게 받아들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최고조의 긴장이다.

링에서는 최강철이 가운을 벗은 후 양쪽 어깨를 풀면서 껑충껑충 뛰고 있었는데 아직도 태극기가 그려진 두건은 풀지 않고 있었다.

“깡철아, 이 자식아. 꼭 이겨야 한다. 부탁한다, 허리케인!”

* * *

최강철은 천천히 링을 누비며 몸을 풀었다.

관중들의 함성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함성 소리에 조급함이 담겨 있었다.

다시 터지는 함성 소리에 최강철의 눈이 벽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스크린으로 향했다.

반대쪽에서 걸어 나오는 마크 브릴랜드의 주변에는 10여 명의 스태프가 철통같은 방어선을 형성한 채 황제를 호위하듯 전진하고 있었다.

최강철의 입장과는 확연하게 대비될 정도로 거창한 행렬이었다.

바보 같은 자식. 챔피언의 위용은 그런 것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어디서 겉멋만 잔뜩 들어가지고 폼을 잡아!

그런 생각을 하자 피식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게 링 위로 올라선 마크 브릴랜드의 눈에는 비웃음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저 새끼.

글러브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저놈 반응으로 봐서는 분명 가운뎃손가락이 올라와 있을 것 같았다.

양 선수가 링에 올라오자 식전 행사가 시작되었다.

“관장님, 긴장 좀 풀렸습니까?”

“오줌 쌌더니 조금 나아졌다.”

“저 자식, 여전히 턱이 약할 겁니다. 어쩔까요. 바로 끝낼까요, 아니면 몰고 다니다가 천천히 끝낼까요?”

“넌 정말 나한테 이러고 싶냐. 나를 놀리는 게 그리도 즐겁냐?”

“그럼요. 관장님하고 농담하면 긴장이 자연스럽게 풀리거든요. 그런 면에서 봤을 때 관장님은 정말 세계 최고의 코치십니다.”

“이번 경기는 너한테 맡긴다. 바로 끝내든 천천히 끝내든 알아서 해. 하지만 분명히 알아둘 게 있어. 들어갈 땐 확실하게 파고 들어가야 해. 섣불리 거리를 두면 당한다. 알고 있지?”

“거리는 말이죠, 저놈이 걱정할 일입니다. 캔버스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쳐야 되는 건 저놈이니까요.”

“옛날 생각하면 안 돼.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관장님, 인혜 누나 애 가졌어요?”

“이 자식이,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지영 씨가 화장실에서 봤는데 입덧 같은 거 한다고 그러던데요?”

“너… 그거 정말이야?”

“당연히 거짓말이죠, 크크크…….”

윤성호의 손이 자동적으로 올라갔다.

그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이곳이 전 세계가 지켜보는 경기장이란 것마저 잊은 것 같았다.

최강철은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가 끝나자 링의 중앙으로 걸어가 당당하게 손을 번쩍 들어 승리를 확신한 후 코너로 돌아왔다.

링의 마술사 어쩌고 하며 마크 브릴랜드의 소개가 울려 퍼졌으나 귀에 담지 않았다.

그 역시 복싱 전문가들의 평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마크 브릴랜드의 빠른 아웃복싱을 그가 파괴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똑같은 질문을 기자들로부터 받았으나 그저 웃어주었을 뿐이다.

평가는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링에 서서 싸울 때 한 번도 전력을 다해 뛰어본 적이 없다.

복싱은 스텝과 펀치의 균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달리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의 허리케인 스타일은 인파이팅이기 때문에 상대를 압박하면서 펀치를 날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랬기에 스텝의 빠르기보다 펀치의 스피드가 더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전문가들의 예상도 거기에서 기인된 것이다.

펀치 스피드가 비슷했음에도 복싱 전문가들은 아웃복싱을 전문으로 한 마크 브릴랜드의 빠른 스텝으로 인해 그런 평가를 내렸던 게 분명했다.

이래서 세상은 재밌다.

양 선수의 소개가 끝나자 경기장에 긴장감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 레프리가 양 선수를 부르는 순간 거대한 전쟁이 서막을 올리기 때문이었다.

“마크, 우리 경기 끝나면 친하게 지내자.”

“으…….”

“우리가 원수 사이는 아니잖아. 벌써 두 번이나 싸우는데 이것도 인연 아니겠냐? 나중에 내가 술 한잔 살게.”

“미친 자식!”

최강철이 인상을 쓰는 마크 브릴랜드의 글러브를 툭 치는 순간 레프리의 주의 사항이 끝났다.

잠시 코너로 돌아왔던 최강철이 마우스피스를 물려주는 윤성호를 향해 웃음을 보였다.

“관장님, 시합 끝나면 성일이 저 자식 좀 막아줘요. 저놈 대가리가 하도 딱딱해서 목말 태우면 아프단 말입니다.”

“이기기만 해. 그러면 성일이 대가리는 내가 책임질게.”

윤성호는 이제 최강철의 농담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어차, 지금 이 순간, 믿을 건 최강철뿐이다.

그리고 최강철은 언제나 믿음을 배신한 적이 없으니 그의 농담조차 승리에 대한 투지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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