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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환생-111화 (111/308)

[111]

* * *

최강철은 언제나 시합 일정이 정해지면 피지컬부터 끌어 올린다.

피지컬이 완성 단계에 올라서면서 예전처럼 지독한 훈련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완된 피지컬을 단단하게 동여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강화 훈련이 필요했다.

근육 강화의 첫 단계는 뛰는 것이다.

복싱의 기본은 하체의 안정이 우선이고 피지컬을 끌어 올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러닝이기 때문이다.

그냥 뛰는 것이 아니다.

처음 며칠은 근육에 무리가 되지 않도록 거리와 스피드를 조절했지만 근육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5㎏짜리 모래주머니를 양쪽 다리와 팔에 찬 후 로드에서 벗어나 산을 타기 시작했다.

대충 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복싱 인생을 본격적으로 화려하게 꽃피우는 첫 번째 싸움이었으니 조금의 방심도 갖지 않을 생각이었다.

도전자는 도전자답게 전력을 다해야 한다. 링에서 내려올 때 절대 후회하지 않을 만큼.

제프 카터의 합류는 빨랐다.

럼블 쪽에서는 이번 시합을 위해 시합이 결정 나자마자 기술 분석가 제프 카터는 물론이고 뭉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한 전용 마사지사와 닥터까지 합류시키는 성의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성일은 더 빨랐다.

이성일은 마크 브릴랜드의 경기 장면을 5개나 구해놓고 밤을 새우기 시작했는데, 라운드당 잽의 횟수는 물론이고 스텝과 펀치의 연관 관계, 콤비네이션의 특성, 이동 시의 상체 움직임, 스트레이트와 훅의 빈도 등을 통계적으로 분석했고 단점을 찾아내기 위해 애를 썼다.

제프 카터가 합류한 후 그들은 이성일이 분석해 놓은 자료를 보면서 마크 브릴랜드를 꺾기 위한 비책 만들기에 골몰했다.

전략의 완성은 승리를 위한 기본 요소고 그 전략을 바탕으로 준비했을 때 링에서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승리의 포효를 터뜨릴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거의 한 달이 다 지나도록 전술을 내놓지 못했다.

최강철이 피지컬을 완벽하게 끌어 올린 후 자신의 무기들을 점검하기 시작했음에도 그들은 고민에 빠진 채 쉽게 해답을 준비하지 못했다.

어두운 기운.

이제 2달이 조금 넘게 남은 시점에서 아직 전략이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마크 브릴랜드가 까다로운 놈이라는 걸 의미했다.

“이 패턴도 안 되겠어. 너무 위험해.”

“레프트 훅과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날아오겠군요. 더킹과 위빙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거지만 뒤로 빠지잖아. 거리가 맞지 않아.”

“저 새끼 다리를 먼저 잡아야 되는데…….”

“빨라도 너무 빨라. 더군다나 약점이 보이지 않는구만. 못 치는 펀치가 없어. 거기다 리치까지 길어서 거리를 맞추기 쉽지 않겠어.”

“제프, 허리케인의 스피드로 놈을 잡기 어려울까요?”

“놈이 작정하고 아웃복싱을 한다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 방금 말한 것처럼 리치 때문이야. 스피드도 빠른 데다 브릴랜드의 레프트 잽은 그냥 레프트 잽이 아냐. 일단 레프트 잽을 해결해야 하는데 그냥 맞아주는 건 워낙 펀치 스피드가 빨라서 위험해.”

“휴우… 미치겠군요.”

분석실에서 대화를 나누던 이성일이 긴 한숨을 흘려냈다.

수없이 영상을 돌려봤지만 마크 브릴랜드의 아웃복싱은 너무 완벽해서 단점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오죽하면 제프 카터마저 혀를 내둘렀을까.

“최근 들어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진화되었어. 예전 경기에는 조금씩 허점이 보였는데 WBA 챔피언에 오를 때와 방어전을 치른 경기는 상대방이 놈의 안면조차 건드리지 못했어. 놈은 아웃복싱을 하면서 자신의 신체 특성에 맞춘 방어 기법을 특화했단 말이지. 알면서도 못 깰 만큼 완벽한 방어법이야.”

“거기에 맞으면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는 공격력까지 갖추었죠. 그냥 돌진하면 너무 위험합니다.”

“맞아, 레프트 잽을 꺾어도 다음 공격이 무서워. 걸리면 시합이 끝난다. 허리케인이라도 놈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자살행위야.”

두 선수의 특성을 분석한 후 수많은 공식을 대입하며 작전을 짜봤지만 전부 위험하다는 결론이 나왔기에 두 사람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이제 더 이상 시간도 없었다.

지금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훈련조차 하지 못한 채 링에 올라가야 할 판이다.

그랬기에 이성일은 슬그머니 이를 악물면서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최후의 방법을 꺼내 들었다.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뭔가?”

“강철이를 믿는 겁니다. 어떤 방법도 어렵다면 결국 강철이에게 모험을 시킬 수밖에 없어요. 탱크 전략으로 갑시다.”

“난타전?”

“누가 더 맷집이 좋은지로 결판나는 거죠. 펀치력 싸움으로 갑시다. 강철이의 반사 신경은 타고났어요. 이번 경기는 전략으로 승부를 볼 수 없을 것 같으니 정면으로 승부를 거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음…….”

제프 카터가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신음을 길게 흘려냈다.

지금까지 청부받은 경기에서 이런 무모한 전략은 세워본 적이 없다.

상대의 단점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그 단점을 파고드는 전략을 세워 승리를 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면도날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로서도 최정상의 테크닉을 가진 마크 브릴랜드를 깨뜨릴 비책을 마련하기 쉽지 않았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스피드, 그리고 완벽한 방어술과 강력한 공격력까지 겸비한 마크 브릴랜드는 괴물로까지 보였다.

더욱 그를 힘들게 만든 것은 놈이 인파이터가 아니라 아웃복서라는 점이었다.

비록 사람들에게 파이터로서 인기는 덜 했지만 마크 브릴랜드는 상대하기 가장 어렵다는 아웃복싱의 마술사였다.

“무슨 전략이 이따위가 다 있어. 너 그동안 놀았냐?”

“관장님, 제 눈 보세요. 이게 놀다 온 눈으로 보입니까!”

“환장하겠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뭐 무조건 돌진하라는 거잖아.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저도 답답해서 미치겠다고요.”

“카터는 어디 갔어?”

“도망갔습니다. 자기 할 일은 다했다고 내빼더군요.”

“이것들이 진짜. 일하다 말고 도망가는 놈이 어디 있냐. 왜 도망갔는데?”

“저보고 설명해 주라고 하면서 갔어요. 이유는 애가 아프다는 건데 아무래도 쪽팔려서 튄 것 같아요.”

“허어…….”

윤성호가 기가 막힌 듯 한숨을 길게 흘려냈다.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제프 카터와 이성일이 놀지 않았다는 건 앞에 잔뜩 놓여 있는 자료만 가지고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마크 브릴랜드의 펀치 패턴과 방어할 때 스텝의 움직임, 심지어 펀치의 숫자와 펀치가 나올 때의 특성까지 전부 분석해 놨는데 거의 책으로 한 권이 될 정도였다.

잠시의 침묵.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동안 잠자코 듣기만 하던 최강철이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좋아졌구만. 예전 세계 선수권대회 때보다 훨씬 좋아졌어. 스피드는 더 빨라진 것 같고 펀치도 더 예리해졌어. 방어 기술도 완벽해.”

“야, 너 지금 저놈 칭찬할 때냐? 너 코치 기죽일 일 있어?”

“관장님, 왜 나한테 신경질을 내세요? 성일이 저놈을 죽이세요. 저 자식, 밥값을 못 하니까 이 기회에 잘라 버립시다.”

“쩝, 밥 이야기 하니까 배고프네.”

“아이고, 이 화상들아. 니들 둘 다 죽어볼래!”

동문서답을 하는 최강철과 이성일을 향해 윤성호가 소리를 빽 질렀다.

이 자식들은 도대체 긴장하고는 거리가 먼 놈들인 것 같았다.

최강철이 다시 나선 것은 윤성호가 답답하다는 듯 서류를 들썩이며 뭔가를 중얼거릴 때였다.

“관장님, 이왕 이렇게 된 거 성일이 작전대로 갑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기억 안 나세요?”

“무슨 기억?”

“제가 놈을 쓰러뜨렸을 때 어떻게 했는지 직접 보셨잖아요. 그때 저는 놈을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혔어요. 안 그래요?”

“그건 12온스 글러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지금 그랬다가 잘못하면 죽어!”

“브릴랜드가 엄청 진화했다고 생각하시죠?”

“진화 정도가 아니다. 꼭 미친놈처럼 변했어.”

“저는 어떻습니까. 관장님이 봤을 때 저는 어떤 것 같습니까?”

“그야…….”

“저놈이 예전보다 진화했지만 나도 달라졌어요. 사람들이 나를 허리케인이라고 부릅니다. 왜 나를 허리케인으로 부르는지 아시잖아요. 어떤 놈도 날려 버리기 때문에 허리케인이라 불리는 겁니다. 이번 경기 성일이 작전대로 해요. 우리 이번 경기에서 진정한 허리케인을 사람들에게 보여줍시다.”

* * *

한국은 올림픽의 열기에 사로잡혔다.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국민들을 독려하기도 했지만 각 종목에서 세계적인 선수들이 모두 출전하는 스포츠의 축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금메달을 12개나 따며 세계 4위의 성적을 기록할 만큼 선수들이 선전했기 때문에 한국은 올림픽 기간 동안 열광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열광은 10월 2일 올림픽이 끝나면서부터 서서히 새로운 열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바로 최강철의 경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MBC의 스포츠 담당 국장 윤길현이 인상을 박박 쓰면서 이창래를 부른 것은 올림픽이 끝나고 3일이 지났을 때였다.

“국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씨발, 이 부장, 큰일 났다.”

“왜요, 전쟁 났습니까?”

“KBS 이 새끼들이 미국으로 날아갔단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혹시…….”

“그래, 그 혹시야.”

“아, 이 동업자 정신도 없는 새끼들. 올림픽 때도 좋은 건 지들이 다 해 처먹더니 공영방송이란 놈들이 이렇게 뒤통수를 친단 말입니까?”

“그쪽 국장 놈하고 얘기를 해봤는데 이번에는 자기들이 해야겠단다. 그동안 전부 우리가 해 먹었으니 이번에는 양보하래.”

“해 먹긴 뭘 해 먹어요. 언제 지들이 숟가락이나 올린 적이 있답니까?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중계를 했는데 그런 소릴 해요. 체육부에서 허가를 안 해주는 바람에 국민들 도움까지 받으면서 중계했다고요. 그걸 아는 놈들이 그런 소리를 한답니까!”

“이 자식아, 왜 나한테 소릴 지르고 그래. 나도 열받아 죽겠는데.”

“그래서 어쩌기로 하셨는데요?”

“절대 안 된다고 했어. 양보할 걸 양보해야지. 사장님한테 보고했더니 무조건 물어 오래.”

“양쪽이 덤비면 그 새끼들 돈을 올릴 텐데요.”

“시간 없으니까 네가 날아가 봐. 가서 어떡하든 우리가 중계할 수 있도록 따내. 얼마가 들어가든 상관없다. 최강철의 경기는 무슨 수를 쓰든 우리 MBC가 중계해야 해. 알았어?”

“그거야. 당연하죠. 맡겨주십시오. 못 따면 한강 물에 빠져 죽겠습니다.”

“죽지는 마라. 가서 중계방송 따 오라고 했지 누가 죽으래? 갈 때 김도환이 데려가. 너랑 친하지?”

“친하죠.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출장비 끊고 지금 당장 출발해. 김도환이 경비까지 신청해. 내가 처리해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 * *

마크 브릴랜드는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타이어를 끌고 달렸다.

이 경기의 승패는 테크닉이나 방어 능력이 아니라 체력이라는 결론을 기술 분석가들이 내렸기 때문에 그는 3개월 동안 수석 코치인 마일스와 함께 체력 강화 훈련을 지독하게 해왔다.

밥 애런이 보내온 기술 분석가들은 최강철의 불꽃같은 연타 능력보다 프레디 아두와의 경기에서 보여주었던 체력에 더 우려를 나타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최강철이 연속 KO승을 거두면서 6라운드 이상 뛰어본 경험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장기전을 펼쳤을 때 유리할 거란 생각을 했지만 밥 애런이 보내온 청부사들은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마크 브릴랜드가 체력에서만 밀리지 않으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두 선수의 장단점을 비교하면서 최강철이 들고 나올 전략을 예상했는데 그건 바로 이성일이 주장했던 난타전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다.

최강철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돌진해서 마크 브릴랜드의 다리를 만든 후 난타전을 통해 쓰러뜨리는 것뿐이라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이 주문한 것은 12라운드를 풀로 뛸 수 있는 체력과 최강철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견제 펀치를 다양하게 준비하는 것이었다.

30㎏ 타이어를 끌고 5㎞를 달린 마크 브릴랜드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마일스가 다가와 물병을 내밀었다.

그 역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비록 마크 브릴랜드처럼 타이어는 매달지 않았지만 옆에서 보조를 맞추며 뛰었기 때문에 지친 모습이었다.

“수고했다, 마크. 난 네가 이렇게 열심히 훈련하는 건 처음 본다.”

“나는 두 번 다시 지지 않을 겁니다.”

“너는 천재다. 거기다 이 정도로 훈련했으니 누가 너를 이길 수 있겠냐. 이제 마무리만 잘하면 돼.”

“이기고 싶어요. 코치님한테 말하지 않았지만 그놈한테 지고 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안다, 그 마음. 그래서 나도 네가 싸운다고 했을 때 더 이상 막지 않았던 거다. 가슴속에 상처를 안고 사는 복서는 슬픈 법이거든. 마크, 이 경기에서 우리 그 상처를 깨끗이 씻어내자.”

“그럴 겁니다. 나는 그놈을 철저하게 짓밟아서 다시는 헛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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